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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한그릇 - 영원한 거처를 가지셨나요? 1591

LNCK 2008. 11. 14. 13:22

◈영원한 거처를 가지셨나요?             요 14:1-6                     인터넷 설교 스크랩 / 편집 

                                                                                                


▲한참 놀다가도.. 집에 돌아갈 시간이 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동네 한 쪽, 아니면 동네 학교 마당에 한 구획을 정하고

방과 후 친구들과 어울려 해가 저물 때까지 공놀이, 자치기, 줄넘기, 땅 뺏기,

숨바꼭질 게임을 하고 놀던 추억을 안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놀이는 보통 우리 친구들 중 한 부모님의 출현으로

그 막을 내리는 일이 일상이었습니다.

“해가 졌다. 그만들 놀고 집으로 가거라!”


저는 지금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에이 씨!” 하고 놀이의 중단을 항의하고

늘 못 마땅하게 생각했던 한 친구의 모습이 추억의 영상에 떠오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친구는 사회 복지시설(고아원)에 살던 친구였습니다.

자기를 따뜻하게 마중할 아빠나 엄마가 없는 그 친구의 귀가는

별로 신바람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돌아갈 집이 있으십니까?

어느 날 인생의 놀이터에서 해 저무는 줄 모르고 게임에 분주한 우리에게

저 하늘에 계신 분이 ‘그만 놀고 집으로 오너라!’고 부르실 순간이 옵니다.

그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돌아갈 영원한 집이 준비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 한 주간도 분주하게 세상살이를 하다가 이 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우리 모두 분주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신일이 있으십니까?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속도를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더 빨리, 더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경쟁이 한창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하루는

그가 제자들을 떠나 어디론가 가셔야 한다고..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스승 예수님에게 물은 유명한 질문이 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요13:36


이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대답이 바로 본문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14:2


한마디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의 제자들이 이 세상을 떠나 거하게 될 영원한 거처,

곧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고자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이 마침내 도착할 영원한 집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을 교훈하고 있을까요?


▲1. 이 영원한 집은 예수님이 친히 준비하시는 장소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천국의 교훈을 살펴보면

천국은 하나의 ‘상태’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장소’입니다.

천국의 본질은 하나님의 통치에 있습니다.


성경은, 천국은 의의 나라요, 화평의 나라요, 기쁨의 나라라고 가르칩니다.  롬14:17

왜냐면 천국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의롭고 평화로운 기쁨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의로움, 화평, 기쁨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맛보는 천국 경험인 것입니다. <상태>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천국은 하나의 완벽한 <장소>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예비 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자,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집, 장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14:2


오늘 우리는 발달된 현대 과학의 눈부신 진보를 목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과학은 창조주가 엿새 동안 창조한 만물의 신비한

경이로움의 지극히 적은 한 부분을 발견한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위 요14:2절 말씀은, 요한복음의 서문인 요1:3절과 일맥상통합니다.

“만물이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즉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창조주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창조자이신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영원한 거처를 준비하러 간다라고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이 세상을 떠나가신 이후 지금까지 준비하시는 천국은

얼마나 경이로운 장소이겠습니까!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는,

성경에 생각보다 천국에 대한 설명을 많이 제공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천국은 “surprise kingdom”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서양에서 살다 보면 소위 ‘surprise party깜짝 파티’를 경험합니다.

이 파티의 특성은, 파티의 주인공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성공의 열쇠입니다.

그들이 이 파티를 놀라움으로 경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친히 준비하신 ‘서프라이즈 파티’인 것입니다.

이런 경이의 나라, 영원한 거처를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위한 선물로 준비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여러분이 이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결심하신다면

여러분이 바로 이 영원한 거처의 주인공이 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2. 이 영원한 거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3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하면 천국에서 일어날 가장 중요한 사건은

우리가 예수님과 다시 만난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거기서 그 영원한 거처를 준비하고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하여 파티를 준비하면, 파티의 주인공보다도,

파티를 준비한 이들이 더 흥분하며 그 순간을 기다리지 않습니까?


성경은 계속적으로,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함보다

하나님이 인생을 만나기를 더 소원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결국 인생들의 하나님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원하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 문화부 장관을 지내신 이어령 박사께서

그가 세례를 받기 전에 발표한 시가 있습니다.


제목은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1” 인데, 이것은 사실 ‘구도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꽃 한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

절 기억하시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 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까

그리고 처음 바다에 물고기들을 놓아

헤엄치게 하셨을 때

저 은빛 날개를 만들어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를 때

하나님도 손뼉을 치셨습니까.


아, 정말로 하나님

빛이 있어라 하시니 거기 빛이 있더이까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이 때 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이것은 이어령 선생을 만나러 오신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 새겨주신 시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예수님이,

오늘 여러분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을 아십니까?

왜냐고요?

그가 준비하신 저 영원한 거처에서, 당신과 함께,

영원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인 것입니다.


▲3. 이 영원한 거처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수 있는 장소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그런 영원한 거처를 예비하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곳으로 갈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의심 많은 제자 도마는

‘그 곳으로 가는 길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눅14:5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매우 유명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눅14:6


무슨 말입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를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에게로, 그리고 그의 나라인 영원한 거처로

인도하는 길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서두인 눅14:1절에서 예수님은 이미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곧 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던 한 선교사님이

정글 속 오지 마을로 가기 위해 그곳 지리에 익숙한 한 원주민 크리스천 청년을

길 인도자로 고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도 가도 마을은 보이지 않고,

청년은 계속 정글 속, 길 같지 않은 곳을 헤쳐 가며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정색을 하고 다시 청년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형제여, 형제는 확실히 길을 아시나요?”


이 때 청년은 이런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님, 여기서는 제가 곧 길입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따라오세요)


오늘도 예수님은 모든 믿음의 구도자들,

길을 찾고, 진리를 찾고 생명을 찾고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우리가 그 분의 안내를 받아 드리기로 결심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 보다 길을 앞서가며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한 거처의 입구에서 또한 먼저 기다리시다가

우리를 손짓하고 우리의 손을 잡아

저 영원한 거처로 인도해 들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령 씨는 “무신론자의 기도 2”편을 또한 써 냈습니다.

이 시에서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의 손을 잡고 계신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들어 보시지요.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어렴풋이 보이고 멀리에서 들려옵니다.

어둠의 벼랑 앞에서

내 당신을 부르면

기척도 없이 다가서시며

네가 거기 있었느냐

네가 그동안 거기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달빛처럼 내민 당신의 손은

왜 그렇게도 야위셨습니까

못 자국의 아픔이 아직도 남으셨나이까

도마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그 상처를 조금만 만져 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내 눈물방울이 그 위에 떨어질 지라도

용서하소서.

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

여태까지 무엇을 하다 너 혼자 거기 있느냐고

더는 걱정하지 마옵소서

그냥 당신의 야윈 손을 잡고 내 몇 방울의 차가운 눈물을 뿌리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내가 길이요”라고 선언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이미 하나님께 나아오기 부족하고 더럽혀진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거룩한 피를 흘릴 각오를 하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일은 그 분을 우리의 인생길의 유일한 안내자,

완벽한 안내자,

우리 인생의 구주와 주님으로 의탁하고 믿는 것입니다.


▲미국에 조니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의 전도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을 갖게 된 그는

주일은 물론이고 학교를 오가는 길에 늘 교회를 들르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회에 머무는 시간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그냥 교회 제일 뒷좌석에 앉아 “하나님, 저에요 조니.”

이 한마디 하고 그는 교회당을 나오곤 했습니다.

그는 힘든 일이 생기거나 아플 때도 역시 교회에 잠시 들려

이 짧은 인사말을 하고 교회당에서 나오곤 했다고 합니다.


조니는 고교 3학년 때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병원에 입원하여 생사를 헤맬 때

갑자기 그가 미소를 지어서 부모가 물었다고 합니다.


“조니야 무슨 일이 있니?”

조니는 웃으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어요”

“뭐라고?”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조니, 나야 네 하나님!”

그리고 그는 이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이 예비한 그 영원한 거처의 주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08.10.26. 인터넷설교 스크랩  *원제목 : 영원한 거처


.............. 더 읽으실 분...............


▲덧없는 인생을 표현하며 웃는 ‘모나리자의 미소’

유명한 화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유명한 작품 <모나리자>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그녀의 신비한 미소입니다.

모나리자를 해석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하여 왔습니다.


가장 전통적인 것으로는

그녀의 남편이 당대의 가장 유명한 화가 레오나르드 다빈치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한 기쁨의 미소라든가,


가문의 대를 이을 잘 생긴 둘째 아들의 출산을 기대하는 남편의 사랑을 확인한

행복한 여인의 미소라든가의 설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미술 사학자요 미술 평론가인 다니엘 아라스는

아주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짧게 스치는 미소야 말로

인생의 덧없음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천재 작가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이 여인의 그림의 왼쪽 어깨 너머에 작은 ‘다리’bridge 하나를 그려 넣습니다.


다리가 있다는 말은 강물이 흐른다는 말이고

그것은 덧없는 시간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뒤의 풍경은 평범한 마을 풍경이나 자연이 아닌,

사람들이 하나도 살지 않는 태고의 괴기한 원시적 풍경입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태고부터 흘러오는 그 영원한 시간 속에서의

덧없는 한 찰나의 미소로서.. 모나리자의 그림의 본질은

‘시간에 대한 명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건강도.. 부도.. 인기도.. 행복도..

그리고 행복한 미소조차도 말입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의 죽음은 존재의 중단이나 소멸을 뜻하지 않습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에게 “죄를 범하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아담이 죄를 범하고 바로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성경에서 죽음이란 단어는 일관성있게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는 순간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경험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하나님의 생명도 떠나간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존재의 소멸보다 훨씬 더 비참한 것입니다. 그는 살아도 죽은 것입니다.

삶의 의미도, 삶의 보람도, 삶의 영광도 없는 인생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죄를 범함으로 인함인 것입니다.


롬3:23에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고.


▲문제는 이런 결과를 알고서도, 이런 경고를 받고서도

인생들이 죄를 범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가 가져다주는 쾌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의 미끼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쾌락의 정체를

“잠시(for a short time, for a season)의 죄의 낙”(히11:25)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잠시의 쾌락, 그 찰나의 쾌락의 순간,

길어야 한 시즌이 지나가면 죄가 우리에게 반드시 요구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죄의 삯은 곧 사망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죽음-창조주 하나님과의 단절이요,

더 나아가 육체적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망조차 마지막 우리의 실존이 아닙니다.

성경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게 된 인생의 결국을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죄인에게)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그리고 이 심판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

곧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의 희망이 없이 그 분에게서 영원히 단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의 실존 혹은 하나님을 떠난 허무의 실존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실존의 비극성을 하나님이 기억 못하시는 인생이라고 묘사합니다.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인생-행여나 이것이 오늘 여러분의 실존, 우리의 실존,

그 '허무한 실존'의 모습이 아닌가요?


우리는 이와 대조적인 '영원한 실존'에 대하여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제별 분류] 종말과 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