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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8

보다 나은 선택의 지혜 1592

LNCK 2008. 11. 14. 20:00

◈보다 나은 선택의 지혜                전7:1-4       -스크랩, 출처보기-

                                                                                          #1592

기독교의 진리를 종종 역설paradox이라고 하는데

전도서 본문에는 3개의 역설이 나옵니다...



◑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습니다            전7:1

              

-내용은 여기 클릭-


 

◑2.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습니다                       7:1


▲상식에 반反하는 역설

임신한 주부의 배가 점점 불러오고 만삭이 되면, 해산할 날을 기다리며 좋아합니다.

기다리던 아기가 고고의 울음소리를 내면서 태어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축하합니다. 축복합니다.

한 생명이 태어났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요 감사할 일입니다.

더구나 요즘같이 <저 출산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반면에 사람의 임종이 가까우면 누구를 막론하고 심각해집니다. 슬퍼합니다.

애도합니다. 위로합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어째서 지혜자는 출생하는 날보다 죽는 날이 낫다고 할까요?


▲1. 그 이유는... 죽은 다음에는 이름이 남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가 아무리 잘 살고, 덕을 세우고, 공을 끼쳤어도

그 이름에 큰 영광을 돌리지는 않습니다.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세상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링컨 대통령이, 미국에서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이 된 것은,

그가 암살당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케네디도 마찬가집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혹시 길게 하고, 오래 살다가... 뭇매를 당할지 누가 압니까?


아직 민주화가 덜 된 제3세계에 가면, 대통령으로 재직하다가

퇴임 후에 큰 고초를 당하고 망신을 당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필리핀의 마르코스가 그랬습니다.

대신에 공항에서 내리다가 암살당한 아키노는, 필리핀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부인인 코라손 아키노 여사가 남편 대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훌륭한 일을 하고, 업적을 남기고 일찍 죽으면.. 영웅이 됩니다.

보상도 후하게 합니다. 그 보상에 대해서 누구도 과하다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는 날은 자기 이름이 아름다운 이름인지 부끄러운 이름인지 판명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죽은 사람은

그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기 시작하는 날이기에...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습니다.

 

김용기 장로님, 장기려 장로님, 한경직 목사님, 이중표 목사님, 대천덕 신부님, 그 외...

살아서 많은 존경을 받으셨지만, 죽는 날부터 더 큰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2. 죽는 날은.. 고생을 마치는 날이기에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달려 갈 길을 마쳤으니 이제 내게는 면류관이 있을 뿐이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다고 믿었습니다.


정상적으로 태어나는 아기라면, 출생하는 날 저주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축복을 받습니다. 축복가운데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여정은 결코 순탄치가 않습니다.

내일을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 속에서 숨 가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고생스럽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도 없이 통과해야 합니다.

출생하는 날은 고생의 시작입니다.

수고와 땀 흘릴 일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관련글 : 중국 도교 신자들의 지혜? -클릭-


그러나 죽는 날은 그런 모든 수고의 마침입니다.

사도 요한은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주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면서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되고 행한 일이 따르기 때문에               계14:13

주 안에서 죽는 그 죽음이 복되다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출생하는 날은 고생의 시작이요, 수고의 시작이요,

질병과 사고를 예상하고 두려워 떨어야 하는 그 삶의 시작이지만

죽는 날은 The End! 끝입니다. 완성입니다.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날입니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기독교는 슬픈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죽는 날이 나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면 복락의 시작입니다.

출생하는 날은 고생의 시작이지만, 죽는 날은 쉼과 안식의 시작이기에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가룟 유다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태어나는 날 그의 부모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라고 ‘유다, 찬양!’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이름을 받았습니까? 얼마나 좋은 이름으로 출발했습니까?

그러나 그가 죽을 때 잘 죽지 못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악취 나는 이름이 되어서, 저주의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12사도를 기리고 싶은 마음에서 12 그루의 멋진 나무를 심었답니다.

그리고 나무에다 차례로 12제자들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표를 붙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 졌습니다. 12그루가 잘 살기를 기대했는데

맨 마지막 나무가 시들시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죽어 갔습니다.

그 나무의 이름은 가룟 유다였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은 출생하는 날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을 다 살고난 뒤에 결정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도 더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3. 사후 세계가 더욱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은 것은 그 날이 하나님께 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한 평생 열심히 주를 섬기다가 일생의 수고를 다 마치고 하나님께서

“수고했다. 너 이리 오너라!” 부르실 때

“네!” 하고 가는 죽음이라면 그 날은 출생보다 훨씬 나은 날입니다.


성자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그가 죽을 때에 옆에서 펑펑 울고 있는 아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얘야, 울지 마라,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 그리고

“아무데나 묻어다오! 하나님 앞에서 부활할 것 아니냐?

그러니 아무데나 편히 묻어다오” 이렇게 유언을 하고 죽었답니다.


죽으면서도 부활신앙을 증언하고 죽은 것입니다.

이런 죽음은 실로 위대한 것입니다.

출생하는 날보다 귀하고 이름답고 가치 있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상의 신앙에 대한 추억은.. 조상의 죽음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조상이 어떻게 죽었느냐에 따라서

후손들의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말입니다.


▲‘태어나는 날보다 죽는 날이 낫다’는 말은, 죽음을 예찬하는 사死의 노래가 아닙니다.

죽음 자체가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세상과

죽은 후에 살게 될 영원한 세상을 비교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늘 슬픔과 문제와 고통이 있는 세상입니다.

고해苦海와 같다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했습니다.

이런 세상보다는

우리 주님과 늘 동행하면서 참 기쁨과 참 사랑이 넘치는 천국이 낫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웃는 시간보다 근심 속에 사는 시간이 더욱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는 눈물도 한숨도 죽음도 아픔도 고통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찰나의 나라에 입국하는 것이요,

순간의 도성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잠깐 사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죽는 그날 이후에 눈을 뜨는 곳은 영원한 곳입니다.

잠시 머물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 나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출생하는 날보다 죽는 날이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의 날은 슬픈 날이 아니라

천국에 입국하는 날이요, 주님의 환영을 받는 날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잠시 머물다가 갈 이 세상에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너무 깊은 정도 두지 말고, 또 미련도 갖지 말고,

영원한 나라의 삶을 예비하는 기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3. 초상집이 잔칫집 보다 낫습니다.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전7:2


초상집에 갈 것이냐? 잔치 집에 갈 것이냐?

상식적으로 초상집보다는 잔치집이 좋습니다. 유쾌하고 즐겁습니다.

먹을 것도 있고 풍악이 있습니다.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한 마당입니다.


그러나 초상집은 심각합니다. 슬픔이 있습니다. 애곡합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반대일 것 같습니다.

잔치 집에 가는 것이 초상집에 가는 것보다 백번 나을 듯싶습니다.

그런데 기어이 잔치 집에 마음을 두지 말고, 초상집으로 가라고,

그게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결혼식장에 가는 것보다 장례식장으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왜? 무엇 때문일까요?


1. 여기도/저기도 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나에 있는 혼인잔치에 주저하지 않으시고 거기에 참석하셨습니다.

축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참석 하실 뿐만 아니라

그 잔칫집의 신랑이 당한 난처한 입장을 해결하여 주심으로써

그 결혼예식을 더욱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초상집 출입을 금기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베다니에 있는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무덤에 가서 함께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를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무덤에서 살려 내심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들어내셨습니다.


우리도 잔칫집/초상집, 둘 다 가야 합니다.

"잔칫집", 돌잔치, 생일잔치, 결혼잔치가 있습니다.

그런 자리는 기뻐하는 곳입니다. 노래하며 춤추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가서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것’ 나쁠 것 없습니다.

또한 죄 짓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그보다, 초상집에 가서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게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보다,

우는 자를 끌어안고 울어 주며 위로하면,

슬픔을 당한 그 사람에게 더 위로가 되며, 더 깊은 인상을 심어주게 될 것입니다.


▲2. 초상집에서는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아주 헛되고 물거품 같은 실존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죽음이 찾아오고

살아 있는 가까운 사람들과 영영히 헤어질 그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연약하고 덧없는 존재이면서도

매우 교만하고 자신만만하여 안심하기 쉬우며,

육에 탐닉하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낫다’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장례식장에 가는 것은 장례식의 화려함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화환은 몇 개나 들어 왔으며, 조문객은 얼마나 많으며,

자녀들 중에 누가 가장 슬퍼하는가? 그런 것을 살피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친애한 이를 멀리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유가족들의 슬픔에 동참하고,

자기의 먼 집으로 떠나는 죽은 자로부터.. 좋은 교훈을 얻으려고 가는 것입니다.


①모든 사람의 결국이 어떠한가? 그것을 배우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이 사람처럼 죽는다. 그러므로 나도 죽을 것이다.’

이것을 생생하게 배울 수 있는 곳이 장례식장입니다.

여기 죽은 사람은 절대 다시 살지 못한다, 생은 단 한 번뿐 임을 알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 하였으므로,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왕 노릇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나도 지금 죽은 이 사람처럼, 언젠가 관에 들어간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갈수밖에 없다는 것을 재인식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당하는 이런 허망하고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나 또한 당하게 될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배우러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장례식장은 그 어느 명문 신학교보다 뛰어난 종말론 강의실이며

그 어떤 교수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인간의 종말을 강의하는 선생님인 것입니다.


②산자라면 당연히 도전을 받습니다.

“산 자는 이것에 유심하라!”고 했습니다.                전7:2

기 “산자”는 장례식장에 찾아 온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장례식장을 찾아 온 산자를 향하여 ‘무언의 도전’을 합니다.

‘내가 죽은 것처럼 당신도 죽을 것이요. 정신 차리세요!’

장례식장에서 이런 도전을 받기 때문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3. 과연 나는 지혜자입니까? 우매자입니까?


전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나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했습니다.

‘항상 내 마음 속에 초상집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인가요?


<미련한 사람은 현재 내게 닥친 일에만 집착하여 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초상집을 생각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먼 미래, 앞으로 오랜 세월, 그것을 미리 내다 보는 사람이 지혜자라는 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 날을 의식하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어떤 사람이 지혜 자며 어떤 사람이 우매자인가?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복잡하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학적부를 뗄 필요도 없고, 이력서를 검사하고 대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매너가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한 질문을 통해서 알아 볼 수 있는데, 그 마음이 어디에 가있는가?

초상집에 가 있는가?

만약에 그 마음이 항상 잔칫집에 가 있다면

그는 우매자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매 자! 어리석은 사람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그의 마음은 온통 즐겁고 유쾌한 것에 쏠려 있습니다.

그의 기쁨은 신기한 놀이와 환락에 있습니다.

즐거운 얘기와 즐거운 노래에 있습니다. 즐

거운 사교와 환락의 낮과 밤에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의 결국을 알고 그 날을 준비하며 기다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터넷설교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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