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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인간으로서 시험을 이기시다 1652

LNCK 2008. 12. 20. 23:50
 

◈참 인간으로서 시험을 이기시다   마4:1~11       설교 녹취



▲인간이 성숙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시험>은 필연적이다.

모든 사람이 시험을 받지만, ‘모든 사람이 시험을 시험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시험을 시험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그래도 믿음이 어느 수준 이상이다.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시험이 자기에게 전혀 시험이 되지 않는다.


아시는 대로, 공부에 관심 없는 학생은, 시험이 시험되지 않는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일수록, 시험이 시험된다. (시험에 1~2개 틀린 것으로 벌벌 떤다)


마찬가지로, 영적 성숙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 시험이 시험 안 된다.

시험에 빠지는 줄도 모르고 그냥 빠진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셔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이런 뜻도 된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 성령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이.. 시험을 받는다.

성령의 지배가 없는 사람은.. 시험이 시험 안 된다.(시험이 오지만 인식 못 한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시험을 시험으로 여기고, 시험과 씨름한다. 예수님이 성령 인도로 시험 받으셨다. 


▲왜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 전에 이런 시험을 받으셨을까?

<이런 보편적인 시험을 통과하면서.. 사람이 성장되어 간다.>

이것이 공관복음에 모두 ‘광야 시험’ 사건을 기록한 목적이다.


사람은 일생동안, 빵 문제, 권력 문제, 명예 문제와 싸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을 이기고 극복하는 사람은.. 점점 성숙으로 나아가고,

성령이 없고, 성숙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시험을 시험으로 아예 인식하지 않는다.

(이런 삶은, 바꾸어 말하면, 영혼이 없는 동물의 삶과 같다.)



◑1. 돌로 빵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


▲왜 예수님은 마귀의 그럴 듯한 제안을 거절하셨는가?

예수님은 그 제안을 ‘시험’으로 규정하셨기 때문이다.


여러분, 사람은 절대로 돌로 빵을 만들 수 없다.

만약 예수께서 돌로 빵을 만드셨다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신 것이다.

인간은 밀가루로 빵을 만들지, 돌로 빵을 만들 수 없다.


마귀는 예수님께, ‘인간되기를 스스로 포기하라’고 유혹했다.

이것은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포기하라는 유혹이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니라

인간의 문제를 오직 ‘빵의 문제’라고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


‘사람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이런 얘기를 우리는 거리낌없이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말은 ‘먹는 것’을 삶의 가장 숭고한 목적으로 산다는 뜻이고,

그런 사람은, 마귀의 ‘첫째 시험’이 오면 꽈당 넘어지고 말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마귀는 ‘빵 문제’로 일평생 계속 그를 시험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살다보면,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지 ‘빵(돈, 이익, 경제)과 연결’시키는 어떤 특징을 보게 된다.

그 이상의 고상한 가치, 영원한 가치는,

현실적 문제인 ‘빵’(경제) 앞에서 모조리 다 무력화된다.

그가 바로 이 첫 번째 시험에 빠진 사람이다.


▲이 시험의 해결책 -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산다는 것은, 오직 ‘빵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러분,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지만,

‘사람은 태어날 때 제 먹을 것 타고 난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이런 말이 있다.

안 믿는 사람도, 그렇게 어렴풋이 믿고 산다.

이런 말들은, ‘빵의 문제’가 지상至上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빵의 문제’를 최고의 가치관으로 살지 말고,

‘더 높은 가치’가 있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동물적 목숨’ 과 ‘영적인 생명’이 있다.

동물적 목숨은.. 물질과 빵에 의존하지만,

그러나 영적인 생명은.. 빵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다.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는 양식은.. 두말할 필요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귀는 끊임없이 인간의 최우선 필요는 ‘빵 문제’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끊임없이 ‘말씀’이 인간이 최우선해야할 ‘영적 양식’이라 답하셨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각자는 심각하게 자신에게 질문해보자.

나는 마귀처럼 ‘육의 양식, 빵’ 문제를 최우선 가치로 설정하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예수님처럼 ‘말씀의 양식’을 최우선 가치로 바라보고 살아가는가?


이 ‘말씀’이 나에게 ‘참/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사실을 체득한 사람 만이

‘빵의 유혹’으로부터 자유한다.



◑2. 천하만국 영광을 줄 터이니 내게 절하라


▲힘과 권력power을 가져라는 시험

마귀는 예수님의 의도를 잘 파악한 것처럼 보인다.

‘너는 결국 이 백성들을 구하러 오지 않았느냐?

이 백성들을 고통에서 당장 벗어나게 해 줄 방도가 있다면,

그것을 주저할 필요 있느냐?


누구한테 절을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

고난과 궁핍에 처한 백성들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압제를 당하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권력>을.. 너는 가지고 싶지 않느냐?

나에게 절하라, 내가 네게 주리라’


▲여러분, 하나님 나라 역사는, 결코 <힘과 권력>으로 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도 줄곧 <힘>을 사용하실 것을 요구받으셨다.

5천명을 먹이신 후에도, 예수님은 그 <힘>으로 왕이 될 것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단호히 그것을 거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예수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오히려 경고하셨다.


▲기독교 역사가 이 사실을 극명하게 잘 보여준다.

복음은 <힘과 권력>으로 전파된 역사가 거의 없었다.

<힘>을 앞세워 복음전파를 시도했던 역사는... 거의 다 실패했다.


-중세 십자군전쟁을 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셨을까?

그들은 성지를 탈환하지 못했다.

2백년에 걸친 그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세기에는 영국이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식민지 지배를 통해 복음을 전파했지만,

인도는 결코 복음화되지 않았다.


-4백 년 동안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던 네덜란드

왜 인도네시아를 복음화 시키지 못했을까?


-프랑스의 지배, 미국의 지배를 수 십 년 동안 받아왔던 베트남

왜 복음이 살아나지 못했을까?


-많은 유럽 기독교 국가들로부터 식민 통치를 받았던 아프리카

왜 아직도 복음화 되지 않았을까?


이것은 <힘과 권력>의 도움을 받은 복음전파는

결코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명백한 증거다.


▲뒤집어서 한국이 이만큼 복음화가 된 것도 같은 이유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기독교 복음은, <힘과 권력>으로 이 땅에 전래되지 않았다.


이 민족이 무력하기 그지없던 그 시절에

오히려 한국교회는, 민족의 고난의 역사에 묵묵히 동참/앞장섰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항일투사로 ‘희생의 길’을 갔다.

그것이 한국 초기 기독교 성장의 요인이 되었던 점이 분명히 있다.


만약에 기독교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통해 전래되었다고 한 번 상상해 보시라.

아마 이 땅의 기독교는 지금, 상상할 수 없이 적게 남아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렇게 존경 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한국 교회가 <힘>을 앞세우기 시작하면서, 사회에서 냉대를 받기 시작했다.

교회가, 세상과 똑같이 숫자와 돈의 힘을 앞세우며, 그것을 자랑하려고 할 때

오히려 조롱거리가 된다.


▲이렇게 <힘>을 앞세우다 보니, 우리가 앞 다투어 세속적 <힘>을 가지려 했다.

그래서 교세를 늘리고, 건물을 확장시키는 일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열매로 알 수 있다’는 논리를 들고 나왔는데,

그 열매를 ‘세속적 힘’으로 (잘못) 해석해서,


교회조차도 적자생존의 경쟁 논리로 앞 다투어 성장일변도로 나갔다.

그런 가운데 ‘수단과 방법’은 점점 무시되었다.

그런 무차별적인 성장 정책이.. 교회의 존경심을 스스로 잃어버린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정작 기독교의 진리를 고수했던 일부 성실한 목회자들은

경쟁에 밀려 교회가 성장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능한 목회자로 전락된 과거가 없잖아 (일부) 있었다.


이것 역시 <힘>의 숭상 논리에서 파생된 문제다.

<힘>앞에 절하고, 힘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지 말고, <힘>으로 밀어붙여서 업적을 이뤄내라고 유혹한 것이다.


▲주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이 말씀은, 다른 수단 방법을 동원하지 말라는 뜻도 된다.

오직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방법, 십자가 자기희생의 방법’으로

그 일을 이루라고 하시는 뜻도 된다.


또한 모든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뜻도 된다.

세상 영광과 권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에 비교하면 정말 비교가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 크게 보이거나 흠모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래서 주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신다.

 

▲그런데 사람이 <세상 영광, 힘 권세의 영광>을 너무 흠모하게 될 때

거기에 절을 할 수밖에 없다.

자꾸 자기가 감투를 쓰려고 하고, 높아지려고 하고,

지배자가 되려고 하고... 그 때 마귀는 그 사람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힘>을 흠모해서 권력을 잡으면, 또 그 권력으로 압제하는 사람이 된다.

 


◑높은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뛰어 내리라


▲왜 예수님은 거절했을까?

뛰어내리라는 것은.. 자기 영광과 인기를 얻으라는 것이다.

높은 꼭대기까지 아니더라도, 제가 지금 강대상에서 아래로 풀쩍 뛰어내려도

사람들은 좋다고 박수를 칠 것이다.


마귀는 이렇게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자기 <이름, 인기, 명예>를 위해서 살아보라고!

그래서 그 시험에 넘어간 사람들은

자기 <이름, 명예>를 위해서라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못할 일이 없다)


▲인간은 자기 <이름, 명예>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일 때문에, 남을 죽이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에는 아무 유익이 없다.


자기 이름 유명해지는 것이, 예수님이 유명해 지는 것이요,

자기가 인기 얻는 것이,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나, 복음전파는 그런 식으로 되지 않는다.

피상적 복음전파는 될지 모르나, ‘자기전파’이지 ‘복음전파’는 아니다.


또한 그런 일을 위해서 동분서주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지만,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를 드러 내려 한다면

그것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마귀의 시험에 Yes한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마귀의 시험에 빠지는 것은.. 끊임없이 인정받고자하는 욕구 때문이다.

자기가 남다른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런 틈을 타서, 마귀는 우리에게 <무모한 짓>을 하도록 시험한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은 ‘남에ㅔ 보이는 것’이 아니다. 뛰어내려 보여줄 필요 없다.

그냥 ‘내적으로 누리는 것’이다.


▲성도들도 종종 목회자에게 요구한다.

성도들은 ‘당신이 신령한 목사이면, 뭔가를 좀 보여주시오!’ 하지만,

성령충만은 본질상 내적으로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임하는 것이다.

무슨 마술처럼, 자기가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뭣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누림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것을 굳이 높은 꼭대기에서 무모하게 뛰어내리면서까지 증명해 보일 필요 없다.


당신이 오늘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마귀의 시험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 모습 그대로 자기인생을 살면 되는데,

자꾸 뭔가를 보여 주려고하다 보니까.. ‘외식’이 나오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에 속으면 안 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끊임없이 요구한다.

‘당신이 신령한 주의 종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당신이 장관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그런 소리에 속아서, 자기를 오버하면 안 된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위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부추기는 호칭이다.

‘당신이 회장이니까.. 어떻게 해야지’ 이런 식으로

자기가 책임을 지지도 못할 일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지도자는 ‘자유’해야 한다.

나는 내 페이스pace로 내 능력만큼 살면 된다.


뛰어내리라는 마귀의 요구에 예수님의 대답은 이런 뜻도 된다.

‘나는 연약한 인간이다. 나는 그런 것 못 해!

(인간들아) 괜한 능력 달라고 하나님을 괴롭게 하면 안 돼, 인간으로 살아라!’


▲성도들 잘못도 있다

미국 LA에서 10년 동안 한 교회에서 목회하셨으나

교회가 성장이 되지 않아 목사님이 고민에 빠졌다.

성과를 중요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목사님 자신도, 성도들도 모두 답답해했다.

 

목사님은 결단을 하고, 한국의 기도원에 10일간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목적은 단 하나! ‘위로부터 입히우는 능력’을 받기 위해서였다.


교인들도, 기도원에서 금식하는 목사님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했다.

목사님이 능력 받아 내려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누구보다 목사님 자신이 열심히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러나 작정한 날짜가 다 되어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비하게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아무 체험도 없었다.

교인들은 ‘목사님이 무슨 능력이라도 받아서 올거야!’ 하며 기대하고 있었다.


목사님은 ‘엘리야가 본 것처럼, 한 조각 구름이라도 봤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래서 더 힘써 기도했다. ‘이대로는 못 갑니다. 성도들 볼 면목이 없습니다.

아무 능력이라도 좋으니, 한 개만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며 몸부림쳤다.


그 금식 끝에 드디어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냥 내려가거라. 그냥 교인들을 열심히 사랑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네 능력이다!’ 라는 응답이었다.

그는 확신 있게 그 내적음성을 듣고, 금식을 마치고 기도원을 내려왔다.


미국에 돌아가 자기 교회에 돌아갔는데, 교인들은 눈치가 모두 궁금해 했다.

금식하고 오신 ‘목사님 얼굴에 무슨 광채라도 나는지...?’ 유심히 살폈다.

목사님이 기도를 하시면 ‘무슨 기운이 흘러나오는가?’ 그것에 신경 쓰는 눈치였다.

설교를 하시면 ‘무슨 능력이 나오는가?’ 끊임없이 그런 것에 관심을 가졌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한 동안 그렇게 자기를 주목해서 바라보니

할 수 없이 교인들에게 말했다.

‘내가 10일간 금식하고 받은 응답은,

그냥 그대로 교인들을 성실히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아무도 그것을 ‘제대로 된 응답’이라고 수긍하는 눈치가

안 보였다고 한다.

여전히 성도들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 같은 특별한 능력’을 요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진짜 위에서 임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분도 일부 있고,

그래서 가짜로 능력을 지어내서 보여주는 분도 있다. 성도들이 너무 요구하니까...)


여러분, 특별한 인물이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만용이다.

마귀의 시험이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물론 불가항력적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위에서 능력이 임할 때도 분명히 때때로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면, 빨리 '보통 인간'의 자리로 되돌아 와야 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다. 표적을 보여주시다가도, 제빨리 인자로 돌아오셨다.

5천명을 먹이신 후에도, 산에 홀로 기도하러 가셨다.

 

중국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이렇게 '보통 사람의 영성'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나라는, 자꾸 목회자를 우상화 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상화 하는 데서 외식이 나온다.

 

기독교의 본질은 ‘일상의 삶에서 나오는 보통 사람으로서의 영성’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무능하게 시험을 이기신> 모습의 본 뜻이다. 


     주여, 우리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뭔가를 좀 이루고 나면, 제가 뭔가 된 줄로 착각하고

     마귀의 시험에 금방 빠져버립니다.

     순간순간 다가오는 시험을 이김으로써, 우리가 더욱 성숙으로 나아갈 줄 믿습니다.

     우리가 <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07.11.25. 설교 녹취                        *관련 글 :  보통 사람의 자리로 돌아가야

 

[주제별 분류] 우상 숭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