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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한그릇 - 세례요한의 갈등과 예수님의 답변 1609

LNCK 2008. 11. 25. 14:20

◈세례요한의 갈등과 예수님의 답변    마11:2~12  설교 녹취



▲한 목회자의 딜레마

종종 제가 가르친 제자들이 목사가 되어 제 연구실로 찾아온다.

그들의 인상만 척 봐도 ‘뭔 일이 일어났구나..’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교수님, 목회를 그만 둬야 할 것 같습니다.”

“왜요?”


“현장이 이렇게 지치고 험할 줄 미처 몰랐습니다.

목회가 감옥과 같고, 전쟁터와 같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한다.

“목회를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 두세요.

그것보다 더 행복한 다른 길이 있으면.. 그 길로 가야죠!”


이럴 때 그들이 보이는 반응은 거의 한결같다.

“제가 이 길을 떠나 다른 길로 간다고 해도

더 행복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 다른 길이 없군요.

목사님, 지금 목회가 당장은 힘들게 보이겠지만,

복음의 역사, 말씀의 열매는... 그 싹이 아주 느리게 올라옵니다.


자기 주변을 한 번 냉정하게 살펴보세요.

이제껏 목사님이 뿌린 말씀의 싹이 느리지만, 아주 천천히 올라오지 않습니까?

이 곳/저 곳에서 그 열매와 그 영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큰 성과가 없다고, 결코 좌절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이 설교의 주제


여러분, 예수님과 역사상 수많은 주의 종들의 걸어가셨던 길이 바로 그러하였다.

당장은 큰 열매가 안 보였지만, 그 길이 낙심되고 캄캄한 길이었지만,

그 열매와 영향력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의 딜레마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그는 제사장 가문의 사가랴의 아들이었다.

당시 제사장 등 종교권력이 누리고 있었던 지위와 권세는 상당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일반 목사보다 몇 배나 더 큰 지위와 권세를 누렸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새로운 영적 여정을 떠났다.

마치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듯이

그도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낯선 길로 향해 나섰다.

그래서 고운 옷과 기름진 음식 대신에, 가죽 옷과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말씀을 풀이하면, 이런 뜻도 된다.

‘당신들의 잘못된 기득권, 안주하는 자리에서부터 벗어나시라!’

‘잘못 형성된 사고와 가치관으로부터 떨치고 일어나시라!’


이런 것은 바로 세례요한 자기 자신의 경험이었다.

자기가 먼저 그것을 벗어버리고, 떨쳐버리고 일어나니까,

아브라함처럼 광야와 같은 환경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밀접하게 동행하는

새로운 신앙의 세계로 경험해 들어갔던 것이다.


▲사탄의 대적, 흔들리는 세례요한

이런 세례요한의 사역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많은 영향력를 미쳐서

당시 헤롯왕 까지도 그를 두려워할 정도였다.


그러자 사탄이 대적하여 일어나, 헤로디아를 격동시켜

세례요한을 옥에 가둬버린다.


감옥에 갇힌 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백성들의 환호소리도 점점 사라져갔다.

백성들의 관심으로부터 세례요한은 멀어져만 갔다.

이 때 세례요한이 약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앞서 상담 온 목사님처럼)


‘내가 옳다고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나는 정말 바르게 걸어온 길인가?’

이렇게 자기 확신이 흔들거렸다.


▲20세기의 세례요한, 본회퍼의 갈등

그는 독일 나치정권과 히틀러에 항거하다가 순교한 의인 중의 의인이었다.

당시 그 서슬 시퍼런 히틀러 앞에 감히 누가 입을 벙긋 할 수 있었는가?


그러나 그는 홀연히 일어났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히틀러에게 도전했다.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았지만, 그는 용기 있게 나아갔다.


그는 1943년 투옥되어, 1945년 4월경 감옥에서 최후를 맞이했는데,

그 사이 옥고를 치른 2년 동안,

그도 인간인지라 마음에 번민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다.


‘이게 내가 지금 바르게 가고 있는 길인가?

혹시 영웅심에 들떠서 그런 것은 아닌가?

과연 이것이 의로운 행동이었는가?’

우리가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그가 옥중에서 지은 다음과 같은 시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가끔 나더러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 확고한지,

마치 자기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가끔 나더러 말하기를

감시원과 말하는 나의 모습이 어찌 자유롭고, 친절, 분명한지,

마치 내가 그들의 상전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또 나에게 말하기를

불행한 하루를 지내는 나의 모습이 어찌 평온하게 웃으며 당당한지

마치 승리만 아는 투사 같다는데

남의 말에 (투영된)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든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약한 나

목을 졸린 사람처럼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나

색과 꽃과 새소리에 주리고

좋은 말 따뜻한 말동무에 목말라 하고

방종과 사소한 굴욕에서 떨며 참지 못하고

석방의 날을 안타깝게 기다리다 지친 나


친구의 신변을 염려하다 지쳤다.

이제는 기도에도, 생각과 일에도, 지쳐 공허하게 된 나다.

이별에도 지쳤다.

이것이 내가 아닌가!


나는 누구인가?

이 둘 중 어느 것이 진정한 나인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이 둘이 동시에 나인가?


남 앞에서는 허세,

자신 앞에서는 한없이 불쌍하고 약한 나인가?


이미 결정된 승리 앞에서 무질서해 떠는 패잔병에 비교할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적막한 물음은 끊임없이 나를 희롱한다.


내가 누구이든 나를 아시는 이는 오직 당신뿐

나는 하나님 것이외다.

오, 하나님!


▲주기철 목사님의 갈등

주기철 목사님도 그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대장군처럼 당당하게 감옥으로 향했지만,

그 횟수가 빈번해지고 더해질수록

1938~1944년까지 5년 4개월 동안

감옥에 수도 없이 들락날락 거리면서 수많은 고문과 시련을 겪으시면서

또 몸이 쇠약해질수록, 그는 점점 더 떨기 시작했다고 한다.


형사가 집에 찾아오면 두려워서 숨기도 하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기도 했다고 한다.


‘신사참배를 하고 말아야겠다!’

여러 번 가족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때 오정모 사모님이 여러 번 그의 순교의 길을 격려했다고 한다.


주춤주춤하면서 주기철 목사님은

‘저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어떻게 할꼬?

(내가 죽으면) 이 가족들은 어떻게 할꼬?’


그럴 때마다 사모님은 격려했다.

‘염려마세요. 제가 맡아서 돌볼 터이니 그 길을 가세요!’


그렇게 <힘겹게, 갈등과 더불어> 순교의 길을 가셨던 것이다.


▲흔들리는 세례요한

그렇게 용감하고 확신에 넘쳐있었던 세례요한도

그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연 이제까지 걸어왔던 내 길이 옳은 길이었던가?’ 하는 회의가 밀려왔다.


마침내 그는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리는 듯 했다.

자기 영적 여정의 항해가 좌초되는 듯 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엉뚱한 길을 잘못 들었다가,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닌가?’

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여러분, 우리 각자도 신앙 여정을 열심히 달려서 오늘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갑자기 어느 날, 세례요한처럼, 그런 갈등과 번민을 이미 여러 번 해 보셨을 것이다.


믿음을 지키며 정직하게 사업의 길을 걸었는데,

점점 사업이 무너져가는 경험을 할 때도 있고,


나름대로 열심히 목회의 길을 가지만, 목회가 생각대로 안 되는 경우도 많다.


좋지 않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는데,

건강이 좋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어떤 권사님은, 일평생 남편과 두 아들의 구원 문제로,

또한 가정을 일으켜 세워보고자 하는 일념으로 열심히 주님을 섬겨왔는데,

이제 60세가 넘도록, 여전히 아무런 진전이 보이지 않자

‘내가 이제껏 믿고 섬겼던 주님과 기독교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며 회의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 기도를 들으시기나 하는 것일까?’

‘믿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 이런 회의가 안 드는 사람 없다.


▲신앙의 회의가 드는 사람들

오늘 한국교회는, 이런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신앙 문제에 직면해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렇게 이렇게만 하면 될 것 같아서 열심히 그 길을 달려가 보았는데,

뭐가 내가 원하던 대로 속 시원하게 되는 것은.. 거의 없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내 신앙심이 여전히 득도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인가?’



◑세례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신앙적 딜레마에 빠진 세례요한이 참다못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이 말은 이런 뜻이다.

‘당신이 정말 오실 메시야가 맞다면

어떻게 제가 이렇게 감옥에서 고초 당하는 것을..그저 보고 계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무심하셔도 되는 것입니까?’


더 비약하면 이런 뜻도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앞으로 주님을 계속 메시야로 믿어도 되겠습니까?

관두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요?’ (앞서 목회자/권사의 질문과 비슷)


▲예수님의 대답

“가서 너희 스승 세례요한에게 말해주어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고 있다.

못 듣던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세례요한은 아마 이 말만 들어도, 무슨 뜻인지 다 알아들을 것이다.)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가?

‘지금 내가 하는 이 일들은, 세례요한 당신이 행하던 일들이 아니었소?

지금 내가 그 일을 계승해서 계속 해나가고 있소. (요한의 사역 승인 의미)

당신의 길은 옳았고, 당신의 판단도 옳았소. 절대 틀린 것이 아니오!


보시오, 당신이 외쳤던 대로.. 맹인이 지금 보고 있소.

방향감각을 잃었던 사람들이.. 방향감각을 찾아가고 있소.

병든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있고

희망 없이 살던 사람들이.. 다시 희망을 갖기 시작했소.


영혼이 죽었던 사람들이 지금 살아나고 있소.

당신이 외쳤던 그 일 아닙니까!

지금 내가 바로 그 일을 계승해서 계속하고 있소!


지금 당신의 상황이 어찌하든지, 지금까지 당신은 제대로 잘 살아왔소.

그러니 믿음을 그대로 지키시오!’


▲이 메시지를 전해들은 세례요한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혼란스러워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가던 길을 그냥 계속 달려갔다.

그래서 옥중에서 순교하기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타협하지 않았다.


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다.

하나님의 의를 끝내 지켜내었다.

믿음으로 끝내 승리하였다.


▲비참한 죽음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승리의 모습을 보면서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도 비참하게 죽지 않았느냐?’

‘그것을 어떻게 승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자가 낳은 자중에 이보다 큰 자가 없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그는, 결코 실패한 자가 아니다.

가장 큰 자이다.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난해한 구절이지만, 이렇게 볼 수 있다.

‘천국은, 세례요한처럼 믿음을 지킨 사람들의 몫이다.’

‘천국에 들어올 사람들은, 세례요한처럼 자기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예수님은

천국은 세례요한 이래로 계속 침노를 당하며,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확대 해석하면, 앞으로 역사에

세례요한과 같이 침노하는 사람이 계속 나올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 믿음을 꿋꿋이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앞으로 역사에 계속 나올 것이다...


▲정리하면

위에서 언급한 어느 목회자의 갈등, 어느 권사님의 갈등..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독교 <신앙의 길>을 가면서도,

어쩌면 삶에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하고, 갈등하고 방황하기도 하며,


본 회퍼 목사님처럼, 주기철 목사님처럼

<사명의 길>을 가면서도

‘내가 과연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며 회의에 빠질 때가 있다.


내 <믿음>은 뜨거운데, 아무 문제 없는데

내 <현실>은 답답하고, 꽉 막힌 듯한 느낌을 종종 받는다.


현실에서 나는 너무 무능한 것 같다. 동창회에 가 보면 특히 그렇다.

믿음으로 사는 나는 왜소한 것 같고,

믿음 없이 세상에서 거침없이 사는 그들을 보면.. 신앙에 회의가 들 때도 있다.


긴 논지의 해답은 이것이다.


①당신이 뿌린 믿음의 씨앗이, 곳곳에서 열매를 맺고 있지 않는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시라.

그 열매와 영향력이 보이지 않는가?


눈에 두드러지게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열매는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 세례요한, 베드로, 사도바울, 사도야고보, 사도요한이 갔던 길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오늘 우리가 너무 결과지상주의에 매달려 있는 것이 문제다.

자기 주변에서 천천히/서서히, 열매와 영향력이 나타난다면

결코 좌절하지 마시고, 그 길을 계속 걸으시라! 그것은 올바른 길이다.


②한 걸음 더 나아가

너희 인생이 이 세상에서 결판나는 것이 아니다.

세례요한 이래로 천국은 계속 침노를 당하며, 장차 세례요한보다 큰 자도 나올 수 있다.

-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의 믿음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고,

곳곳에서 열매로 나타나고 영향력을 드러낼 것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되시기 바란다.

그래서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계속 걸어가게 되시기 바란다.


▲누룩 같은 영향력

얼마 전에 (2007년 9월 30일 설교) 주일 아침에 TV [일요진단]에서

약 1시간에 걸쳐서 ‘단기 선교’ 주제를 다루는 것을 보았다.

공중파 방송에서, 그런 주제가 <아프간 피랍 사태>를 계기로 논의되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아프간 피랍사태를 두고서, 기독교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그런 공격 앞에 교회가 무기력하게 노출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다. 기독교와 교회의 세계선교가 이제 세상 속에 선전되어지고 있었다.

그 영향력이 세상 속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욕 먹는(십자가 지는) 방식으로!


무전배낭여행은 알지만, ‘단기선교’를 들어본 적도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단기선교 - 어떻게 할 것인가?’의 주제를 놓고 방송에서 토론하고 있었고,

비교적 결론도 좋게 마무리 지어지는 것을 보았다...

주님의 나라는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어지는 것이다.


<07.09.30. 인터넷설교 녹취  *원제목 : 내 믿음은 여전히 유효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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