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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대신 꿩 1758

LNCK 2009. 2. 21. 14:08
◈닭 대신 꿩             창26:26-35                 -설교 스크랩, 출처 보기- 



▲원래 속담은 ‘꿩 대신 닭’입니다.

설날 떡국을 끓여먹을 때, 옛날 우리 조상들은 떡국에 꿩고기를 넣어서

먹었던 것 같습니다. 설날에 먹는 만두도 꿩 만두를 해서 먹었지요.


‘꿩 대신 닭’이란 말은, 꿩고기 맛이 닭고기보다 더 좋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 제목이 어째서 ‘닭 대신 꿩’일까요?

이 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닭 대신 꿩’이라고 하면,

더 잘 기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 본문 설명


▲블레셋 왕이 직접 화친을 청하다.

블레셋 족속의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서 화친을 자청합니다.

이삭이 하나님께서 복을 받아서 창성해졌습니다. 강대해졌습니다.

그러나 왕이 와서 화친을 청해야 될 정도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이삭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기에

그래도 왕인 자가 와서 화친을 청하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살펴봤더니

‘이삭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봤다’고 아비멜렉이 말합니다. 26:28


이삭이 ‘네가 나를 미워해서 나를 쫓아내더니 도대체 왜 찾아왔느냐?’

이렇게 물어볼 때 아비멜렉 왕이

“여호와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는 것을 우리가 보았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계약을 맺자.” 이렇게 애기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왜 왕이 굴욕적으로 나왔을까요?


▲1. 당시 문화적 이유

당시 근동지방에는, <자기의 민족종교의 신이 누가 더 강한가?>하는 관점에서

늘 보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아비멜렉 왕의 눈에는


이삭에게 함께 하는 하나님이 굉장히 강한 분으로 여겨졌고

그러면 자기도 그 여호와하나님을 받아들이면 될 텐데 그러지는 못하고

자기가 섬기는 우상과, 이삭을 보호해주는 하나님을 비교해볼 때

막상막하 아니면, 자기가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으므로...

화친을 청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

그런데 이러한 풍습을 떠나서

<아비멜렉이 이삭에게서 여호와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았다>

라는 이점이 상당히 귀한 점이라서

이점을 중점적으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는 아비멜렉이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이 여호와하나님이라는 신을 숭배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을 텐데

이 아비멜렉이 이삭에게서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보게 된 이유’를 가만히 창세기 26장을 통해서 살펴보면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영토 안으로 이삭이 들어와서 살 때,

이삭이 곡식의 풍년을 100배로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고

또 창성하고 번성한, 창대하고 왕성했다고 합니다.  26:12

그래서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 때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함을 보았다>고 얘기 합니다.


▲3. 이삭이 고난당할 때, 고난을 견딜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다> 

그러면 어느 때에 보게 되느냐?

그 뒤에 창대하고 거부가 되자 이삭을 쫓아냅니다. 이삭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비멜렉은, 자기가 손해를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쫓아내는데,

쫓겨나는 곳에서 또 쫓겨나서 이삭이 우물을 파지 않습니까?

한 번 파고, 두 번 파고, 세 번 팝니다.

 

이렇게 우물을 계속 판 이유는, 그 지역의 목자들이 와서 시비를 걸면서

우물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아비멜렉왕이 사주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왜? 멀리 쫓아내려고.

그때는 우물이 없으면 죽는 거니까. 그래서 쫓아냅니다. 더 밀려나게 합니다.

두 번이나 쫓겨납니다.

그래서 이삭이 그것이 ‘다툼’의 장소다. 그리고 ‘대적’의 장소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삭은... 다투려하고 대적해오는 장소를 양보합니다. 피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르호봇이라고 이름을 붙인 곳에서 우물을 팠을 때

이삭이 뭐라고 얘기하느냐? 다툼이 끝나고 대적이 끝난 장소에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번성하게 하셨다, 넓은 장소를 주셨다’ 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 우물사건들, 우물을 통하여 다툼과 대적의 사건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르호봇이라는 곳에 우물을 판 사건을 지난 뒤에

이 아비멜렉왕이 다가와서 화친을 청하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을 우리가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슨 뜻일까요?


▲닭 대신 꿩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시는 것을

이 아비멜렉 이방 왕이 분명히 보았습니다.

어떤 때 보게 되는 것입니까?


이삭이 곡식을 백배로 거두고 잘 나갈 때, (꿩일 때) 본 것이 아닙니다.

이삭이 우물 빼앗기고, 쫓겨 다니고, 고난당할 때 (닭일 때) 본 것입니다.

 

이제 아무 별 볼일 없는, 힘없고 빽없는 <닭>인줄 알았는데, 그래서 무시하려는데,

알고보니, 이삭의 인격이 <꿩>인 것입니다. 닭이 아니었습니다.


▲예상이 빗나가다.

아비멜렉 왕이 예상합니다.

분명히 우물을 파는 것을 자기지경의 목자들이 가서 시비를 걸때

이삭이 그것에 대항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우물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생존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긴다고 할 때, 분명히 생존을 위한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는 것을 예상하고 마음에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우물을 빼앗았을 때.. 이삭이 그냥 비켜갑니다. 

이삭도 우물은 있어야 되는데,

지금 자기가 자리 잡고 살던 곳에서 쫓겨 난 것도 억울했으니

나(아비멜렉)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있었을 텐데,

우물을 팠는데, 또 아무소리안하고 물러나는 것이.. 충격인 것입니다.

 

아비멜렉으로서는 마땅히 이삭이 응수할 것으로, 다툼으로 나올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안하고 그냥 갑니다.


마치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거부가 된 사람이 몸종과 가솔들이 꽤 있었을 텐데... 그냥 벗어납니다.

두 번이나 그런 일을 겪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또 우물을 팝니다.


그걸 보고 아비멜렉이 이삭의 모습을 예상합니다.

분명히 사람이라면, 인지상정으로 생각할 때

이삭의 대적하는 모습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닭을 예상합니다. 그런데 닭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때 이삭에게서 '꿩'을 본다는 것이에요.


이때 '하나님의 형상'을 그 자리에서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상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 때 하나님을 그 자리에서 보게 됩니다.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고난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원리


우리가 생각하기에 ‘복음 전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내가 성공하고, 출세해서, 그런 도움을 받아서 복음 전파가 되리라고 보는데,

(이런 관점도 영 틀린 것은 아닙니다. 물론 틀린 ‘부분’이 많지만요)


성경이 말하는 ‘복음 전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성도들의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위에서 본 이삭의 예, 아래서 보는 스데반의 예 말고도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십자가’ 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예가 연속적으로 계속 나오는데도,

우리는 내가 성공하고 출세해서 복음전파에 쓰임 받겠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방법만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고난을 대하는 <나의 변화된 성품을 통해서>

죄인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스데반의 고난을 통해.. 사울이 돌아옵니다.

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죽습니다. 그 광경을 사울이 봅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메섹으로 기독교인을 잡아 죽이려고 가던 바울이

사막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고, 단 일회의 만남을 통하여

완전히 하나님의 종으로 주님의 종으로 바뀌어버리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이렇게 바울이 한 번의 사건을 통하여 주님께 회심하고 돌아서게 된 데는

스데반의 죽음이 심리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서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돌아서는 사울 청년의 마음속에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사울 자기 입장에서는

자기를 돌로치는 자를 향해 마땅히 분노해야 합다. 이유야 어쨌건, 자기를 돌로 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며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사울은, 자기도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서 ‘자기의 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자를 돌로 쳐 죽이고 있는데>


스데반은, '자기의 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자를 위해서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예상하는 스데반의 모습이 안보입니다.


당연히 보여야할 ‘닭’이 스데반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충격이 가해졌을 것입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 사전 정지작업이 있은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한 방에 쓰러졌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고난을 통해.. 로마가 변화되다.

마찬가지입니다. 네로가 기독교인을 잡아 죽일 때

사자 밥이 되게 하고 불에 태워죽입니다.

마땅히 사람의 인지상정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 사람들은 울어야합니다.

네로황제에게 빌기라도 해야 됩니다.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벌벌 떨어야합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며 천사 같은 얼굴로 죽어갑니다.

더군다나 자기 자식들의 손을 잡고 함께 죽어가는 부모들을 보면서

네로가 미쳐버리고 맙니다. 예상이 벗어납니다.

분명히 ‘닭’이라는 모습이 나타날 것으로 예견했습니다만... ‘꿩’이었습니다.


그 닭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뭔가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뭔가 다른 기운을 보게 되고,

뭔가 다른 세계가 그 사람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정에서 고난을 통해.. 남편이 변화됩니다.

남편입장에서 볼 때, 남편이 이렇게 말하면 아내는 화를 내게 되어있습니다.

“김치가 맛이 없어. 당신은 김치를 한두 번 담아봐?

만날 담글 때마다 이렇게 맛이 다르고 맛이 없냐?”


그러면 보통 아내들은, 그 말을 인정 안 합니다.

자기가 다시 한번 먹어보고 “맛이 없긴 뭐가 맛이 없어? 배가 불렀구나!

너무너무 맛있고만, 먹기 싫으면 그만 둬.”

그러면서 반찬을 확 빼앗아버리고, 남편에게 안 줍니다.


자, 이렇게 살던 아내가 갑자기 변했습니다.

“맛이 없어? 미안해, 내가 너무 절였나보다. 내가 너무 소금을 많이 쳤나보다.

젓갈을 조금 넣었나 보다. 다음에는 잘해볼게.”


‘닭’을 예상했는데 갑자기 이상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꿩'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교회를 다니고 있어요. 이러면서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옆집 아줌마의 예

자식이 대학에 세 번이나 떨어졌습니다.

자, 삼수하고 떨어졌는데, 그 옆집 아주머니를 보는데, 예상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 아주머니가 죽을 맛이 되었겠구나...’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얼굴에 빛이 납니다.

‘이게 웬일이야? 닭이 안 보이고 꿩이 보이네? 저속에 도대체 뭐가 있어?’

‘교회 다닌데... 교회 다니는 사람이 다르긴 다르구나.’

 

▲마치는 말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과 가치관과 그들의 풍습에 의해서

상식적으로 이런 상황이면, 이런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똑같은 가치관으로 살아가는데...


이런 상황이면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는데,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이, 우리 앞에서 자기 예상이 벗어남을 느낄 때

‘분명히 저 사람은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다, 그렇다면 고자세로 나오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만나보니 말할 수 없이 겸손합니다.


어마어마하게 돈을 많이 번 거부가.. 여전히 검소할 때,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여전히 검소하고, 여전히 낮은 곳에 머물고 있을 때,

 

또 거꾸로 완전히 망했습니다. 돈을 못 법니다.. 그래도 웃고 살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이거 참 이상하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을 때 예견되는 울상의 모습이 아니라,

거의 얼굴이 천사 같은 빛을 발하게 될 때

바로 그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변화된 품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게 되고,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 왕 앞에서 이삭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비멜렉 왕은 이삭에게 화친을 청하게 됩니다.

이삭에게서 ‘어떤 무서움’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이삭의 생각 속에서는, 사람과의 경쟁에 이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하루 살아갈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을 딛고 서야 내가 이긴다,

다퉈서 앞서야 된다는 생각을 마시고


다 뺏기는 것 같고, 다 속는 것 같고, 다 내주는 것 같고

아무것도 이기는 것이 없는 것 같아도

내 삶의 자리는 사람에게서부터 이겨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바보처럼 양보하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 때 사람들이 내게 화친을 청하여 올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며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어!’      <07.01.22.설교 스크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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