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보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라 행3:1~10 설교 스크랩
▲설교자에게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본문
과거에 저는 이 본문으로 설교할 때마다 좌절감을 느꼈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이 평소에 가끔씩이라도 일어난다면
본문은 아마 가장 신나는 설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은 너무나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교인들의 반응도 시큰둥하였습니다.
말은 안 해도, 꼭 ‘목사님도 한번 앉은뱅이 일으켜 보세요!’ 하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도
앉은뱅이가 아니라, 감기도 낫지 않을 때는.. 좌절감이 듭니다.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초점’이 무엇입니까?
본문을 보면 누구든지 ‘나면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엄청난 기적’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초점은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이 아닙니다.
기적에 초점을 맞추고 말씀을 보면.. 말씀을 정확하게 붙잡지 못하게 됩니다.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나중에야 이 놀라운 본문에서 오히려 좌절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기적’만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이 말하려는 핵심은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면서 앉은뱅이가 걷고 뛰고 찬양하는 것을 보고 놀라
베드로에게 몰려들자, 베드로가 펄쩍 뛰었습니다.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몰려들어서
베드로에게서부터 또 어떤 역사를 보기를 원할 때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행3:12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베드로가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정말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16절에 말씀합니다.
...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예수님입니다. 여러분이 보셔야 할 것은 예수님입니다.
나면서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셔서,
앉은뱅이를 일으키셨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베드로가 그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획을 신중하게 따르는 베드로
성전 미문에 기도하러 가는 도중, 베드로는 아마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님, 오늘 저를 통해 무엇을 하시기 원하십니까?’
그렇게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인 거지를 보았습니다.
날마다 보던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마다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 날 베드로는 그 사람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계획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일으키시려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그 거지를 일으켜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기적을 본 사람들이 자기에게 몰려왔을 때 막 신났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계획을 물으면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했습니다.
▲주문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한 것은 어떤 주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일으키시기 원하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으니까
뭐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역사가 일어나겠지.’ (주문으로 사용)
한때 일부 사람들이 그렇게 가르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 보니까, 그렇지 않음을 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은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주문이라고 생각하면 실망스러운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너를 일으키시기를 원하시니, 너는 아멘하고 일어나라!’
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베드로 마음에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그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뜻은 그를 긍휼히 여김도 있었지만, 전도의 문을 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게 하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실제로 이 사건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모였고,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 날 5천 명이 구원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기적을 행하신 목적은.. 복음을 듣게 하고
5천 명이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날 5천 명의 병자들이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기적의 치유 병원이 생기고, 베드로가 병원장이 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병든 사람들을 계속 고쳐주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목적은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들이 영생을 얻는 복음을 듣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그들을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단지 복음을 듣는 귀가 열기 위함이었습니다.
기적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고,
복음을 듣고 믿은 자들은 구원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 날 예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기적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통로
앞으로 2009년도에도 우리에게도 기적이라 할 만한 일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와 같은 역사를 집회마다 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적이 일어날 때마다
기적이 아니라 더욱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같이 계시구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구나.
그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듣기는 쉬워도,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기적을 통해 초기 한국교회도 부흥했습니다.
한국 교회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신유 사역자 중 한 분이 김익두 목사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2만여 명의 난치병 환자들을 안수 기도하여 고쳤으며,
280여 개의 교회를 세웠고, 200여 명의 신학생들을 공부시켰습니다.
그러다가 6.25사변 때 공산당에 맞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기적적인 치유 역사를 의심하고 배척하는 사람들 때문에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 나타난 이적이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1921년 장로교 임택권 목사는「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는 김익두 목사 부흥 집회에 나타난 놀라운 이적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 초대교회 당시는, 치유 이적이 구원의 큰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치유 이적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김익두 목사님에게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전도사 시절, 길을 가다가 앉은뱅이 거지를 보았습니다.
그는 본문 행3장의 베드로가 미문 앞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믿기만 하면 성경대로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해 보자’ 결심하고 한적한 과수원 돌담 밑으로 거지를 업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이름으로 일어나라!”하면서 그 앉은뱅이의 손을 잡고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앉은뱅이 거지는 아파서 죽겠다고
“살려 주세요!” 소리 쳤습니다. 그는 크게 좌절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하나님께 ‘왜 성경대로 안 되느냐’고 몸부림치며 기도하다가
나중에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관심이 온통 기적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의 마음만 품기로 했습니다.
다시 그 거지를 만났을 때, 지난 날 잘못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를 향한 주님의 마음에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후 그 목사님을 통하여 수많은 치유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임을 명심한 베드로
오늘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려고 하지 말라!
오직 예수님만 주목하고 예수님의 마음만 품으라! 주께 순종하기만 하라!”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눈에는 예수님이 크게 보였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행3:6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이란 항상 “내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보다 예수님이 더 크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콩알 만큼 작게 보이는 것입니다.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알지만,
문제는 예수님의 능력을 인식하는 차이가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 위기가 올 때 그 <문제가 커> 보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작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실직의 어려움’과 ‘예수님’,
‘병원에서도 포기한 중병’과 ‘예수님’.., 어느 것이 더 커 보입니까?
우리가 무슨 일을 하기 앞서서 먼저 성령충만을 구하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심히 크게 여겨져
어떤 문제나 어려움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내적 증거가 있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는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후에 말도 하고, 결정도 하고, 행동도 해야
오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분명히 믿어지고
그 예수님이 세상보다 더 크게 느껴지도록 기도를 먼저 한 다음에
무슨 일이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2009년 한해 이제부터
여러분 생애가 우리는 우리 주의 역사하심을 날마다 일마다 경험하고 삽니다.
▲문제가 작아질 때까지, 예수님이 커 보일 때까지!
어느 목사님이 재미있게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작아질 때까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산같이 느껴지던 문제가 점점 작아져서
나중에는 콩알 처럼 작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홀라당 입에 넣어버리면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표현을 재미있게 하셨지만, 이것이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세상을 이겨나가는 성도들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요즘 매월 첫째 주 <금요 치유기도회>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기대하며 갑니다.
항상 예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놀라운 치유의 역사, 회복, 악한 영에서 사람들이 건짐을 받는 증거를 주셨습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직 ‘병자를 치유하려는 목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오늘도 기적이 일어나야 할 텐데...’
‘오늘도 병자들이 고침을 받는 일이 일어나야 할 텐데...’
제 마음 속에는 몸이 아픈 교인, 그리고 기도회에 참석한 교인,
그리고 목사의 체면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를 해드렸는데도, 치유 기도회가 끝나고 나면
실제로 나타나는 역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좌절이 오는 것입니다.
제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몰랐습니다.
왜 기도를 하는데도, 순종을 하는데도, 하나님은 역사해 주시기 않는가?
어리둥절 하다가,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병든 사람을 보지도 말고, 그 기도회에 참석한 성도들도 의식하지 말고,
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도 생각하지 말고, 오늘 내가 친히 일할 것이니,
너는 나만 바라보라!’
그때부터 기도회를 인도하거나, 성도를 위해 기도해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마다 주님은 반드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성도들이 기적을 경험해도,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기적만 주목하게 된다면
더 큰 혼란이 생깁니다.
사람은 점점 더 큰 기적, 더 많은 기적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본 사람은.. 예수님의 인도를 받게 되지만,
기적을 바라본 사람은.. 끊임없이 더 큰 기적을 구하게 됩니다.
자꾸 기적을 보여주어야 하는 강박관념,
큰 기적을 보여주어야 하는 강박관념에 빠져서.. 이상한 방법의 유혹에 빠집니다.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어야 되니까, 주님이 인도하시지 않는 방법,
인위적인 방법,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방법으로 미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실제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실패입니다.
▲치유기도를 하는 사람도 그렇지만, 치유를 받는 이도 그렇습니다.
목사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질병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적보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기적과 현상만 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실족하고 미혹 당하고 넘어집니다.
예수님을 놓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은 뒷전이고 기적만 구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몰려들어 계속하여 떡을 만들어 달라고 구했고
예수님은 아무 역사도 일으키지 않으시고
계속 ‘나를 먹으라 내 살이 영생의 양식’이라는
그들이 듣기에 이상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때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그때 기적을 보지 않고 영생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붙잡은 제자들은
나중에 다 하나님의 기적의 사도들이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주의 역사를 이루는 삶을 살게 되지만,
기적을 바라보고 주님을 따라가려고 하는 분들은 나중에 실족하게 됩니다.
떡을 구하고.. 영생을 놓칩니다.
건강을 찾다가.. 영생의 주님을 놓칩니다.
▲삶이 힘든 이유
어느 날 예배를 드리고 나가시던 성도 한 분이 눈물이 핑 돌면서
"목사님 저 너무 힘들어요!" 한 마디하고 휙 지나갔습니다.
제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지나가 버렸는데….
마음이 아파서, 다른 분들과 악수하면서 속으로
하나님께 ‘하나님 도와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 순간 제 가슴속에 꽂히듯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아니다! 저 딸은 더 어려운 순간도 많았었다. 그래도 다 이겨냈다.
지금 저렇게 힘들어하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마귀는 너 자신을 보라고 계속 유혹합니다.
교만하고, 자만하게도 만들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위축되게도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예수를 바라보라!’고 도전합니다.
기적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축복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돈이 없을 때, 더 놀라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는 돈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 필요가 있습니까? 창피한 문제 아닙니까?
우리가 제일 자존심 상하는 것이 “나는 돈이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정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 날 좀 돈이 있었다면, 돈을 주었을 것입니다.
돈을 주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돈을 주고 싶어도, 돈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꽤 큰 교회 중 하나이지만, 도와달라는 요청은 끊임없이 옵니다.
어떤 때는 도와드릴 돈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도와 드릴 돈이 없습니다.” 하면 실망을 넘어 화를 냅니다.
믿어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지독한 구두쇠구나! 도와주기 싫은가 보다!’
하는 반응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을 때, 더 놀라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돈이 없었기에 예수님의 의도를 깨달은 것입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을 때가 있지만, 예수님은 항상 함께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 생각을 하니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이 줄 게 있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을 네게 주겠노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그것을 열심히 나누어 주면 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내가 너에게 주겠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힘이요 재산입니다.
▲돈이 없어도, 오직 예수님 한 분입니다.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 돈이 없어서 못한다. 나는 배우지 못해서 못한다.
나는 장애인이어서 못한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못한다”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돈이 없어서, 돈으로는 할 수 없는 더 크고 놀라운 일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는 결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켜 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일을 했습니다.
오직 그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것 때문에도 위축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기적만 바라보면, 결국에는 실망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
50여 년 곱추 생활에서 고침받은 백기현 교수의 간증.
그 강력한 증거에 하나님께 박수를 보내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앉은뱅이도 있고, 곱추도 있습니다.
기적을 바라보면 그늘이 더 짙습니다. 더 큰 좌절이 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합니다.
강영우 박사님은 실명이 되고 눈뜨기를 위해 몸부림 치면서 기도했지만
그는 눈 뜨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눈을 떴으면 소년 가장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미국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는 한인 중 한 사람이 되었고
지금 현재 미국을 움직이는 500인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헬렌켈러는 3중고의 여인입니다.
그는 너무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눈뜨고 귀가 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위대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 화니 크로스비는 어려서 실명을 했는데
‘하나님이 내 눈을 뜨게 해주신다고 해도 사양하겠습니다.
천국에 가면 눈을 뜨게 될 텐데,
내가 눈을 뜨고 첫 번째 뵙는 분이 예수님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눈을 감고서, 눈 뜬 사람들이 아무도 하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해냈습니다.
<2009.1.4 인너텟 설교 스크랩 (사도행전 8) [주제별 분류] 신유, 기적
'분류 없음 > 2009'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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