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과 인성의 내 삶에 조화 막1:29~39 모두 펀 글, 출처1 출처2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셨던 것은,
우리 성도들이 영성과 일상을 동시에 완전하게 가지라는 뜻도 된다.
예를 들면, 아침에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낮에는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다.
◑기도와 활동의 조화
교회 역사 안에서 교부시대에 있었던 많은 이단의 출현과 신학적 논쟁의 중심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한 몸에 잘 보존될 수 있는지 하는 문제였다.
결국 칼체돈 공의회(451년)에 와서, 이 두 본성이 분리되거나 흡수됨 없이
위격적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선포함으로써 조화와 균형을 찾게 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 자주 대두되고 있으니
구체적으로는 신앙과 생활의 일치, 기도와 활동의 조화 등이
늘 우리에게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베네딕토 성인은 ‘기도하며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수도생활의 규칙으로 빛을 주셨다.
성인의 정신은 예수님의 삶 안에서 잘 드러나는데,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요5:17~19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하루 일과를 잘 보여준다.
주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 가운데서도
새벽 캄캄할 때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막1;35
예수님 안에서는 활동과 기도의 깊은 일치가 있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완덕의 정상에서는 기도와 활동의 일치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내 말을 믿어주십시오. 마르타와 마리아는 나란히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잘 모시고 항상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께 푸대접을 안 해드리고 잡수실 것을 바칠 수 있습니다”
◑늙어서 잘 믿으려면.. 젊어서 잘 믿어야 합니다.
심은대로 거두기 때문에 그렇고,
관성의 법칙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물론 젊어서 엉망이다가, 늙어서 잘 믿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렵습니다.
대부분은 젊어서 잘 믿는 사람이, 늙어서도 잘 믿습니다... 그것이 더 쉽습니다.
종종 이런 생각이 듭니다.
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불타는 열망(정욕?)이 지금보다는 사그라지지 않을까?...
좀 더 사제 생활의 연륜이 생기면, 지금보다 더 사랑하게 되고,
더 여유로움 마음과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더 나이를 먹으면, 지금보다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서
이러저런 활동보다 성당에 머무는 시간이 많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엊그제 신학교 영성 면담 신부님과 전화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참 어리석은 망상이었음을...
그저 저만의 생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신학교 때처럼...
진정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야고보야, 기도도 공부도 다 때가 있는 거란다.
나이가 많이 들면, 좀 더 기도하는 시간이 많을 것 같고,
더 예수님을 향하여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단다.
물론 젊은 때가 더 유혹도 많고, 시련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젊을 때 기도하고, 열심해야지,
막상 늙어 버리면 기도하기가 쉽지 않단다.
기도 역시 힘이 있어야 30분, 1시간, 또는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이지,
늙어 힘이 없으면, 기도하기보다는 더 많이, 더 자주 쉬고만 싶어진단다.
그래서 야고보도, 젊을 때 기도를 많이 하거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내일, 미래는 지금, 오늘의 모여 이루어진 결실입니다.
때문에, 오늘 기도하지 않는다면, 결코 내일, 미래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오늘, 지금 일을 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는다면,
결코 미래에 멋 훗날에 일할 수 없고, 공부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하지 않는 것은 결코 내일, 멋 훗날에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때문에, 지금, 현재의 삶이 좀 힘들어도, 많은 시련과 유혹이 있다 하더라도,
좀 더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지금 행하는 이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성인의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좋은 말씀이 있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일이 두렵지 않겠습니다.” 아멘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다 막1:29~39
이 본문은 (너무 쉬워서) 오히려 가르치기가 쉽지 않으므로.., 한 번 배워 봅시다.
▲정신적인 열병도 있다.
우리도 열이 나서 자리에 누워 있을 때가 있었는가?
언제 또 무엇 때문에 열병을 앓았는가?
열병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병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앓는 열병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반당했을 때, 부부 싸움을 했을 때,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화가 났을 때, 또는 질투심이나 이기심 등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열병을 앓는다.
아마도 우리 현대인에게는, 육체적인 병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인 이유로 열병을 앓을 때가 더 많을 것이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도 평소에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서로 다투는가 하면, 막9:33
제자들이 좌,우편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는 것은 일종의 시기심, 질투심이요,
그것 때문에 자기들 안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열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열병은 우리를 앓아 누워있게 만든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떠나갔다.
그렇다. 예수님을 깊이 만날수록, 나의 ‘열병’이 낫게 된다.
▲세상에서 비천한 자들을 찾아가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무심코 읽고 지나칠 수 있지만, 그 당시 사정을 안다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닌 굉장히 개혁적인 일이다.
그 당시에 여인의 존재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법정에 증인으로 내세울 수도 없었다.
게다가 늙고 열병으로 누워있는 보잘 것 없는 여인이라면
얼마든지 무시해버릴 수도 있는 여인을
예수님이 친히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가문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코전1:26.
위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가장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여인을 통해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먼저 가져야.. 추구가 가능하다.
마가 복음이 모두 600여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100여 문장이 여인에 관한 문장이며
그것도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여인이 등장한다.
그만큼 예수님은 여인의 위치를 존중해주셨고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되찾아 주셨다.
그리고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막10:43-35 라고 말씀하신 대로
복음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셨다. (늙은 여인을 고침을 통해서)
복음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는 다르다.
높고 화려하고 힘있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관점과는 정 반대되는
가장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여인을 통해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고,
봉사 받는 삶이 아니라 봉사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셨다.
이렇게 인간적인 사고와 가치관에서, 복음적인 사고와 가치관으로 바뀔 때
비로소 우리는 복음에 눈을 떴다라고 말 할 수 있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삶을 산다고 감히 말할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실현시켜야할 하느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복음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결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통해서 이루워 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삶은 힘있고 가진 이들만이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연약한 인간도
실현시킬 수 있고, 건설할 수 있는 나라이다.
가장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복음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가장 위대한 일이다.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
‘열병을 앓는 병자들이 사는 나라’와
‘열병에서 치유되어 일어나 봉사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는 같은 나라가 아니다.
이런 새로운 삶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열정적인 예수님의 일과
저녁때, 예수님은 많은 병든 사람들과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 막1:32~34
다음날 새벽에는 외딴곳에 가서 기도를 드리셨다. 막1:35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그 기도의 힘으로 많은 활동을 하시는 모습이다.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참 열정으로 살아가셨구나...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지닌 열정적인 모습과 삶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활동하는 공생활이 불과 3년 밖에 안 되기에
그렇게 삶에 애착을 갖고, 열정적으로 살아가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이었다.
병자를 만나고 치유해주는 그 모습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모습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는지!
그러기에 당신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다른 이웃 고을에도 찾아가자. 그 곳에도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막1:35
여기서도 우리는 인성과 신성의 완벽한 조화를 본다.
새벽에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님은(신성적 측면)
낮에도 무슨 신형엔진을 다신 것처럼,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다니셨다.(인성적 측면)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이 안 느껴질 때는..?
교부시대 제롬(347-420)은 아래 글을 자주 묵상했다.
만약 예수님이 당신의 침대 앞에 서 계신다고 생각하면,(임재하심을 느낀다면)
당신이 계속 늦잠을 잘 수 있겠는가? 당연히 벌떡 일어날 것이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예수님은 <이미 여기에, 우리 가운데> 와 계신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도, 그는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거기 계셨다.
또한,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요1:26 참조.
그러므로 당장 내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예수님과 내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너희 가까이 와 있다. 언제나 임하신다. 막1:15
‘믿음’이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만약 우리 손을 뻗어 그 분을 잡을 수 없다면, (내 곁에 계심이 잘 느껴지지 않으면)
그 분의 <발> 앞에 완전히 엎드리자.
만약 우리가 주님과 대면하지 못한다면,
우리 눈물로 그 분의 <발>을 씻자.
나의 회개는 주님께 향수가 된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당신의 동정심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늘 묵상하며 살자.
Jerome, an early church bible scholar and translator(347-420), reflects on this passage:
“Can you imagine Jesus standing before your bed and you continue sleeping? It is absurd that you would remain in bed in his presence. Where is Jesus? He is already here offering himself to us. ‘In the middle,’ he says, ‘among you he stands, whom you do not recognize’ (Cf. John 1:26) ‘The kingdom of God is in your midst’ (Mark 1:15). Faith beholds Jesus among us. If we are unable to seize his hand, let us prostrate ourselves at his feet. If we are unable to reach his head, let us wash his feet with our tears. Our repentance is the perfume of the Savior. See how costly is the compassion of the Sav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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