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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1704

LNCK 2009. 1. 21. 10:21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고후5:15                 설교 녹취

 

 

◑복음의 초보만 알고 사는 교인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은퇴하실 때, 누가 이렇게 질문을 드렸다.

“목사님의 평생 사역 중에, 이제 은퇴하시는 시점에서

특별히 깨달아 지는 점이 혹시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동안 저는 복음이 교회 바깥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고,

한평생을 교회 바깥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살아왔는데,

지금 은퇴할 즈음에 깨닫고 보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 복음을 다시 듣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번 특별새벽기도시간에, 주님이 제게 주신 마음이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분명히 다시 전하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성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말씀과

실제로 자기 현실에 신앙생활 하는 방식은 너무 다른 것이 현실이다.

오늘날은, 그 다른 것이 정상인 것처럼 여기며,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성경이 약속하신 성도의 삶과, 실제 자기 현실적 삶은... 너무 다르다.

 

예를 들면, 요4:14절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실제로 자기 삶에 간증으로 그대로 나타나는 성도는...

소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요7:37~38절에,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는데,

정말 자기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고 감격스러워하는 성도는.. 보기 어렵다.

 

롬8:37절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했는데,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여러 시련과 어려움을 당할 때,

넉넉히 이김’은커녕, ‘겨우 이기기’만 해도.. 참 대견스러운 성도이다.

겨우 이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의 ‘약속의 말씀’들이, 왜 성도의 삶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계2장에서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 앞에서 ‘아뇨, 안 버렸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우리 중에 과연 몇인가?

 

우리 신앙생활, 가정 모습, 직장에서 내 모습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것이 처음 사랑을 잊어버린 자의 모습이 아닌가?

 

예수님은 ‘너희가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고 하셨다.

 

그렇다. 한 번 생각해보자. 내가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

성경에 나타난 신앙과, 내 신앙이 만약 다르다면,

어디서부터 달라졌는지,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는지.. 한 번 심각하게 검토해 보자.

 

▶그래서 실제로 우리가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복음을 듣는 데서 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과연 나는 복음을 정확하게 잘 들었나?’

 

여러분, 자세히 뜯어보면, 우리가 복음과 성경을 잘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 많이 듣고도,

실제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분명한 체험과 ‘성령님’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와 그런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기도의 능력, 기도의 응답’

이것도 수도 없이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나는 삶을 통해서

‘내가 진짜 기도를 아는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이것도 수도 없이 많이 들어서, 그래서 머리로는 아는 것 같은데,

실생활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

 

위에서 이런 예를 많이 든 것은, <복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복음에 대해서 많이 들어서,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복음적 삶에 대해 전혀 모르고들 다들 살아가고 있다.

 

 

◑복음을 정확히 모르니까, 삶에 능력이 없다.

 

교인에게 ‘복음이 뭐냐?’고 물어보면

‘자기가 예수 믿어서 죄사함 받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전혀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렇지만 예수 믿어서 죄사함 받는 것만 복음이라고 생각하니까

삶은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삶에 모든 문제가 닥치는 것이다.

 

‘내가 예수 믿고, 예수님은 나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예수님이 나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내 모든 죄가 사함 받았고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제 죽으면 천국에 간다...’

 

이런 정도로만 복음을 단순하게 알고 끝내버리니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내 생활전체가 뒤죽박죽이 되어있고,

성경의 말씀과 내 삶이 다르고, 내 삶속에는 간증이 없고

나 한사람도 그렇게 제대로 살지 못하니까, 가족 한 사람 제대로 예수 믿게 못하고,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그렇게 (겨우 턱걸이로) 살아가는 것이다.

 

여러분, 만약에 예수님이 ‘죄사함’을 주시기만 원했다면

‘너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를 지었지만,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이렇게 <쉽게> 선포하시고 끝내면 된다.

 

하나님이 정말 이것 하나만 원하셨다면,

굳이 예수님이 <어렵게>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굳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을까?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우리 죄를 사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설교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단순히 우리 죄를 용서하시려고 하신 것만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거듭나게 하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히 새 삶을 살게 하시기 원하신다.

그게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다. (아래 계속 설명 나옴)

 

그러므로 아직 내가 완전히 새 삶을 살지 않는다면,

나는 아직 정확한 복음을 모르는 것이다.

삶이 변화된 사람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정확한 복음을 아는/믿는 사람의 삶의 증거

 

▲1. 더 이상 죄의 종노릇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6:6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너는 이제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말씀하기 원하시지 않고,

우리가 ‘죄의 종노릇 하지 않게 되기’ 원하신다.

그렇기 위해서는, 죄의 종노릇하는 자기가 죽어야 한다.

 

인간이 타락할 때, 마귀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죄가 우리 주인 노릇을 했다.

우리가 죄의 종노릇하지 않는 것이란,

이것이 복음으로만 해결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 스스로 십자가에서 완전히 자신을 내어주셨다.

 

큰 권세를 가진 임금이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를 놓고

‘내가 너를 사면한다’ 그렇게 말 한마디, 사면장 종이 한 장이면 끝난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그 사형수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완전히 거듭난 사형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당신 자신이, 당신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시고,

(사면장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시고,

그리고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주신 것은

우리도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 삶의 본을 친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2.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전5:15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거듭난 삶, 완전히 다시 태어난 삶의 핵심은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렵고 힘들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로만 공자처럼, ‘너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마!’ 하시며

얼마든지 말로만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러나 쉽게 말로만 하지 않으시고

그토록 어려운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자기 자신이 죽는’ 모습을 실제로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여러분, '자기를 위해 살지 마세요!' 그런 교훈적/도덕적인 말

수 백 번 들어도 별로 소용없다. 사람들은 금방 자기를 위해 살아버린다.

우리 본성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존재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모여서 같이 일을 해 봐도

결국에는 대다수가 이기적이다. 자기 자신의 관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시험에 들고, 공동체에 문제가 생긴다.

다 자기가 죽지 않고 펄펄 살아 (날뛰고) 있기 때문이다.

담임목사인 저도 마찬가지고謙遜表現, 여기 모인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다.

 

복음은 그냥 ‘예수 믿고 죄사함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시작하더라도)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이 죽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냥 이론적으로 말고, 그런 복음적/십자가 지는 삶을 자기가 살아내야 한다.

 

결국은 ‘자기 자신이 죽는’ 문제 하나가 아직 해결되지 못하니까,

자기 자아(자존심, 자기 영광, 자기 죄성, 이기심, 체면, 미움, 질투)가 살아있어서

가정에서도 문제, 직장에서도 문제, 심지어 교회에서도 문제가 일어난다.

예수 믿는 사람도, 예수 안 믿는 사람과 아무 차이가 없다.

 

결국은 나 자신

지금 여러분의 삶이 왜 그리 혼란스럽고, 상처가 많고, 복잡해지고, 어려우신가?

기쁨은 어디 갔는지 찾아보기가 어렵고.., 왜 그러신가?

 

우리가 철저히 '나 자신'을 위해서 살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부사이에도 철저히 이기적으로 자기만 위하니까.. 부부사이도 어렵다.

 

부모 자식사이에도 ‘결국은 나 자신’이고,

교회서 교인들끼리 신앙 생활하는 중에서도 ‘결국은 나 자신’이고

 

이 문제 하나가 해결 안 되면, 아무리 교회 오래/열심히 다녀도

자기 삶이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혼란스러워진다.

결국은 ‘죄의 종 노릇’하면서 평생 신앙생활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저 우리에게 말로만 ‘너 자신을 위해 살지 말라’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완전히, 십자가에서 내어준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자신을 위해 살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그런 본을 십자가에서 친히 보여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말로만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실제로 자기 삶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죽는’ 삶을 사는 것이다.

 

복음의 지식을 내 삶에 가능하게 하는 연결고리가 <감동>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그저 머리/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자기 마음에 깊이 찡하게 <감동>받은 사람이

‘아~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겠다’는 굳은 결심/인생관이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을 보고, 복음을 듣고 <감동>받기는.. 쉽지 않다.

가능하지만 어렵다. 설교 들을 때만 '그러려니...' 하다가 곧 다 잊어 버린다.

예수님은 우리와 너무 동떨어져 계신 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감동>받을 것인가?

→내 주위에 진짜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감동>받는다.

 

내 주위에 진짜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을 보면,

예를 들어 손양원 목사님을 보면,

‘아 저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구나, 저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구나’ 하면서

손양원 목사님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않고,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에수님도 자기 삶으로 직접 보여 주시지 않았는가!

 

‘아 저게 바로 자기가 죽은 삶이구나,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겠다...’ <감동>받고서

자기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을 비로소 한 걸음씩 살아내는 것이다.(이 단락 편집자)

   

마치는 말

여태까지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 결과가 고작 ‘지금 삶, 지금 내 모습’ 밖에 안 된다.

그래서 더욱 나 자신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야 되겠다고 발버둥 치게 되는데...

결과는 더 악화된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수록.. 실망과 비참함을 거둘 것이다.

이것은 복음적 삶이 아니다. 타락한 인간 본능의 삶이다.

 

복음을 정확하게 알고,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평안을 누리게 된다.

 

십자가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사신 표이다.

 

실제로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못 박고 살면,

자기가 완전히 죽는 것/망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 <복음의 역설의 진리>가 역사한다. 그래서 신비하게 살게 된다.

그냥 옛날처럼 보통으로 사는 게 아니라,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살게 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온전한 복음이지,

그냥 머리로 '아는 것'은 온전한 복음이 아니다. (후략)

 

<08.12.29. 인터넷설교 녹취, 정리       *관련 글: 십자가는 감동해야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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