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6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712

LNCK 2009. 1. 26. 19:19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막10:38     설교 편집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막10:38

 

 

야베스의 기도」에 보면,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갔다가

큰 창고 건물에 들어가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 창고 입구에서, 그에게,

창고에 들어갈 수는 있지만, 들어가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천국에 보아서 안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나며, 우겨서 창고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까 너무나 예쁜 상자마다 가지런히 놓여있는데,

상자마다 각각 사람 이름이 써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에게 <자기 상자>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물론 있다고 말하자, 그는 자기 상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너무나 보고 싶어서

자기 이름이 붙은 상자를 찾아 풀었더니

거기에는 상상하지도 못한 귀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속상해서 “이것이 내 것이라면, 내가 세상에 있을 때

왜 주님이 내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왜 이 상자 안에 이런 것들이 들어있나요?”

 

그 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이 상자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려고 계획하셨던 것이라네.

그런데 네가 구하지 않아서 줄 수 없었던 것이라네.

그래서 내가 보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 우화는 기도에 대한 비유인데, 우리가 이것 저것 많이 구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구하지 않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설교가,

임종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못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임종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진짜 도움이 되는 설교를 하셨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자기가 임종의 자리에 누워 있을 때가 되면,

비로소 깨달을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헛된 말씀을 많이 전하였는지'를

 

모든 설교가, 임종을 맞이한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향점과 방향이 그쪽으로 맞춰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신교인들은, 너무 임종과 관련된 말씀을 못 듣고,

평소에 준비를 못하며 사니까, 막상 임종이 닥치면 당황해 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가 없는 사람은, 임종 때 갑자기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친밀한 교제가 있는 사람은, 큰 불안 없습니다.

 

성도 개개인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을 구하지 않으면, 임종의 때가 닥치면 당황스러워 합니다.

'예수만 믿으면 천국 갈 줄 알고 있었는데..,' 왠지 자꾸 불안해집니다.

왠지 자꾸 삶에 비참하리만큼 집착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에 오셔서 무슨 기도 하셨습니까?

오늘 교회에 오시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소원이 무엇입니까?

사업이 어려운 분들도 기도하셨을 것이고, 몸이 아프신 분도 기도하셨을 것이고,

입시를 앞두고 있는 자녀를 둔 부모님도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짜 중요한 것을 구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주시려고 하는 그것을 구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이「우리의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을 당합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받으실 때 심히 안타까운 것이 많으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진짜 중요한 것은 다 놓치고

쓸데없는 것들만 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그렇게 성공에 집착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목사가 되었으니 ‘큰 교회 담임 목사가 되어야 되겠다.’

그것이 목회의 성공인 줄 알았어요. 저는 그것 자체가 잘못인 지도 몰랐습니다.

 

정말 저는 오랫동안 큰 교회 담임 목사가 되는 마음의 소원을 가지는 것에 대해

전혀 문제라고 여기지도 않았고,

솔직히 제가 정말 그것만을 원한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기도 싫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성령님으로 거듭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제 실체를 보여주셨어요.

 

제가 진짜 원하는 것이 큰 교회 담임 목사가 되이며,

그것이 얼마나 문제인가 하는 것도 보여주셨어요.

그것은 제가 진정으로 구하는 것이 ‘예수님’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큰 교회를 담임’하는 것이었지.

 

어떤 분은 막연히 ‘많은 회중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설교에 과연 사람들이 변화되었나?’ 하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설교로 인해 변화된 사람이 있었다면,

회중들의 숫자에 관계없이.. 그는 성공한 설교자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설교로 인해 변화된 사람이 만약 없다면,

회중들의 숫자에 관계없이.. 그는 실패한 설교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주의 일로 일주일 내내 바쁘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져보면, 대부분 자기 영광을 구한다고 바빴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주일에 단 1시간 봉사라고 죄송하다지만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영광을 구한 봉사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중에 스스로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은 은혜를 구하고, 말씀을 구하고,

사랑을 구하고, 성령충만을 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 속을 들여다보면

비명을 지를 만큼 자신이 세상적인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는 돈이고 명예이고 성공, 편안함, 건강입니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예수님이 아니고 세상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마음의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데 있지 않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 도움을 받을까?’, ‘나를 드러낼 기회는 없는가?’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와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 그 분을 구하십니까?

예수님을 향한 목마름과 굶주림이 없는 곳에는 부흥이 임하지 않습니다.

부흥은 세상에서 먹고 사는 것들을 구하는 자에게는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부흥은 예수님을 만나는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정말 알게 되면

여러분의 인생은 완전히 바뀝니다.

하나님이 막연하게만 믿어지니까 믿음에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짜 믿어지면 세상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정말 믿어지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부흥은 예수님께서 정말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진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흥이 누구에게 오느냐 하면,

세상적인 소원이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의 축복만 구해왔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우리에게 해주실 수 있는 일을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동행할 때 져야하는 십자가와 헌신은 부담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부흥이 임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그 분을 구하기 때문에 주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고,

주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떠나서 산다는 것이 상상이 안 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은 반드시 하나님이 부으시는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님들이 모든 교회 예배를 다 인도하실 수 없어서

교인 중에 성경을 읽을 줄 알면 조사로 임명하여 그에게 성경을 한 권 맡기고

예배를 인도하게 하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평신도 전도사님이지요.

 

경상북도 어느 산골 마을 예배당에 교인들이 모이고

조사님이 예배 인도를 하게 하였습니다.

성경을 봉독한 순서가 되어 조사님은 시편 23편을 봉독했습니다.

 

어두침침한 등잔불 아래에서 두터운 돋보기를 끼고 겨우 읽어 내려가다 보니까

영 떠듬떠듬 읽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제대로 죽 읽으면 내용 파악이 되겠는데,

제대로 읽지를 못하고 더듬더듬 끊어 읽다가 보니까

 

여...호와는 나의...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더듬거리며 읽었다는 거예요.

 

성경 봉독을 마친 조사님과 교인들은 심각해졌습니다.

본문을 “여호와는 나의 [목 자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해한 것입니다.

 

조사님은 성경을 내려놓고는 참으로 비장한 얼굴이 되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가 내 목을 자르셔도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조사님이 큰 소리로 외치자 온 교우들이 함께 외쳤습니다. “아멘!”

 

초창기 웃지 못 할 에피소드이지만, 코끝이 찡하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비록 성경은 잘못 읽었지만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조사님이나

그 조사님과 온전히 하나 되는 성도들의 모습이 귀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2006년 추석 연휴 기간 동안에 서해대교에서 큰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희생자 중에 입시생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언제 이 세상을 떠날 지 모릅니다.

입시 공부도 중요하지만, 먼저 해결해 놓고 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알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점점 성장하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심각한 도전을 주셨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목사에 대한 대우도 달라지는데,

하나님께서는 제게 세상적인 풍요와 하나님의 영감,

둘 다 가지려는 것은 욕심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목사가 하나님의 영감과 세상적인 풍요,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한다면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잘한다고 느끼겠습니까?

아니면 “목사님, 좀 그러네요. 목사님은 영적으로 충만하신 것이 중요하지,

세상적으로 대우받는 것에 대해서는 초연하시면 좋겠습니다.” 하시겠습니까?

 

그 둘을 다 붙잡으려는 유혹이 목사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을 다 붙잡으려다가 무너진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찌 이것이 목사만 그렇겠습니까?

평신도라고 결코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관련글 : 기능과 멋, 둘 중 하나만 선택하게 되어있다

 

 

여러분 중에는 그래도 좀 막막한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도대체 어디 가서, 어떻게 예수님만 붙잡으라는 것인가요?

 

소경 바디매오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예수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앞은 안보이니 어떻게 합니까? 욕을 먹으면서도 그는 그냥 앉은 자리에서

“나사렛 예수여! 나사렛 예수여!”하며 소리만 질렀습니다.

 

주님이 그 소리를 듣고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아직도 여러분에게는 막연한 대상입니까?

처음에는 다 그런 단계부터 주님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짖을 수는 있지 않아요?

 

“예수님, 저는 여기 있습니다. 주님이 어디 계신지 저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 마음의 소원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이 고백의 기도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이 기도가 이 자리에서만 아니라 예배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도,

오늘 밤에도, 그리고 내일 아침에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네가 정말 나를 구하는구나.’하고

인정하실 수 있도록 구하시기를 원합니다.

 

<06.10.08. 인터넷 설교 스크랩, 편집                          [주제별 분류] 기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