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꿈, 종의 현실 창37:1~11 설교 녹취
◑서론 : 꿈과 현실의 괴리
▲크리스천은 ‘왕의 꿈’을 가진다.
인간은 누구나 로얄 패밀리가 되고 싶어한다.
한편으로 로얄 패밀리를 막 비판하면서도
자기에게 기회가 오면 로얄 패밀리적 삶을 은근히 즐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크리스천을 가리켜 ‘로얄 패밀리’라고 부르는 사실을 아시는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 royal priesthood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벧전2:9
▲‘왕의 꿈’을 가졌지만, ‘종의 현실’ 때문에 괴롭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이런 주장과는 달리
오늘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초라하다’는데 있다.
성경은 우리를 ‘로얄 패밀리’라고 부르지만, 실제 삶은 ‘머슴살이’하는 것 같다.
문제가 무엇인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꿈이 없는 것이 문제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저는 어려서부터 ‘꿈을 가져야 한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는 설교를
교회에서 수도 없이 들으면서 자랐다.
이 때 단골로 등장한 인물은 요셉이었다.
요셉은 꿈을 꾸었고,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준비했고,
거기에 따르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주로 이런 식이었다...
◑1. ‘왕의 꿈’에는 ‘종의 현실’이 따른다.
▲엄친아 요셉
요즘 말로 하면, 그 때 당시 요셉은 나에게 ‘엄친아’였다.
*엄친아: 엄마 친구의 아들, 잘 생기고, 공부 잘하고, 부모 말도 잘 듣는 가상의 인물
최근에는 ‘엄친아’와 비슷하게 ‘삼지’가 널리 돌고 있다고 한다.
‘착하지, 예쁘지, 공부잘하지’이다.
어쨌든 요셉은 당시 성장기 학생이었던 제게 ‘엄친아’였고, ‘삼지’였다.
‘꿈도 잘 꾸지, 잘 생겼지, 총리도 됐지.’
따라서 저는 요셉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마다, 듣기가 싫었고, 의문이 생겼다.
과연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는 꿈을, 17세 때 꾸었는가?
무슨 꿈을 꾸긴 했지만, 그것을 애굽의 총리가 되리라고 해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1.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 원하는 꿈vision을 가지지만, 요셉은 스스로 원해서 꿈을 꾼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요셉이 부모와 형들에게 절을 받고 싶어 했고,
이를 위해 대가를 치렀다고 성경은 어디에서도 얘기하지 않는다.
그저 요셉은 어느 날 밤, 꿈의 습격을 당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요셉을 선택했고
그의 목적을 꿈으로 요셉에게 알리신 것뿐이다.
이것은 바로가 꾼 꿈에 대해, 요셉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바로가, 꿈을 한 번도 아닌 두 번을 꾸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확실하게 행하실 것을 바로에게 보여준 것>이라고 말한다.
요셉 역시 꿈을 두 번 꾸었다. (곡식 단, 해와 달과 열한 별)
그렇다면 요셉의 꿈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자기 소망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요셉에게 연거푸 확실히 보여주신 것>이 된다.
요셉의 꿈은, 요셉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시고, 하나님의 하시기 원하시는 소원을
요셉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2. 우리는 꿈vision을 꾸면, 좋은 일이 생긴다지만.. 요셉은 정반대였다.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바람에, 이미 미운 털이 박혀 있었는데, 창37:2
어쨌건 이 꿈 때문에 요셉은 형들에게 더욱 더 미움을 받게 된다. 창37:5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더욱 편애한다. 37:3
그래서 채색옷을 입힌다.
다윗의 공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던 것을 볼 때 삼하13:18
옷이 어떤 신분을 나타내던 그 시대에, (오늘도 유니폼은 신분을 나타낸다)
요셉이 입은 옷은.. ‘족장의 후계자’를 나타내는 옷이었던 것 같다.
야곱은,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낳은 장자 요셉을
어쩌면 자기 가문의 실질적 후계자로 점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요셉에게만 특별히 후계자를 상징하는 ‘왕족 복장’을 입혔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런 편애가 얼마나 형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는지는
우리가 직접 보지 않아도 훤하게 알 수 있다.
형들은 요셉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고 했는데,
직역하면 ‘그에게 샬롬이라 말할 수 없었더라’는 뜻이다.
형들이 요셉을 만나면 인삿말 조차도 하기 싫었던 것이다.
한 종족의 후계자 계승권이, 막내나 다를바 없는 요셉에게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자
형들이 분개할 만 했다.
▲3.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요셉은 종으로 팔려버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던 요셉에 대한 미움은
요셉이 꿈을 꾸고, 꿈 자랑을 하자..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요셉이 꿈을 이야기했는데,
형들이 곡식단이 서서, 자기 곡식단을 향하여 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자 형들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네가 참으로 우리 왕이 되겠느냐, 네가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그 꿈과 그의 말로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했다고 했다.
결국 들에서 양을 치던 형들에게, 멀리서 요셉이 심부름으로 다가오자, 형들은
‘저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우리가 저를 죽여 구덩이에 던지고,
맹수가 저를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꿈이 어떻게 되는가 한 번 보자!’고 했다.
여기서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를 직역하면 ‘꿈의 대가가 오는도다!’라는 뜻이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면, 그의 꿈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니, 어떻게 형들이, 동생이 꾼 꿈 때문에 열 받아서 동생을 죽이려 했을까?’
그런 형들이 아주 야비하고 잔인하게 보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왕이 되고 싶어하는 열망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내가 그 입장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을 욕하고 비난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오늘 평범한 크리스천들이 스트레스를 받은 이유는,
‘넌Non 크리스천 가운데 잘 나가는 사람’ 때문이 아니다.
‘자기 주변에 잘 나가는 크리스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가 더 크다.
우리는 ‘내 주위의 남들보다 조금 더 성공하기를 바라는 속성’이 누구에게나 있다.
미국인들의 속담이 이런 심리를 잘 보여준다.
‘부란 동서relative보다 연봉이 백불 더 많은 것이다!’
구정이나 명절이 되면, 식구들끼리 모일 때
돈을 잘 못 버는 사람은, 무척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모양이다.
우리도 미국인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 주위에 ‘집안 좋지, 인물 좋지, 학벌 좋지’ 하는 ‘삼지’들이 있고,
그들의 존재감 때문에 괜히 스트레스를 받는다.
형들의 입장에서 볼 때, 요셉은 자기들에게 ‘엄친아’, ‘삼지’였다.
‘아버지 사랑 독차지 하지, 채색옷 입었지, 꿈도 잘 꾸지’
그러니까 형들은 요셉이 죽이도록 미웠던 것이다.
◑2. ‘왕의 꿈’은 '사명'이다. 개인적 성공이 아니다.
▲1.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적 꿈>을 <개인적 성공의 꿈>으로 오해한다.
특별히 형들은 요셉의 꿈을 오해했다.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요셉의 꿈이 <일신상의 영달, 개인적인 성공>을 계시한 것이라고 오해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꿈을 <개인적인 성공>으로 잘못 해석한다.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고위직에 오른, 소위 입지전적인 성공신화 사례로써
요셉을 써 먹는다.
그러므로 제 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요셉 같이 되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요셉이 내게도 ‘엄친아’요,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요셉의 꿈은 개인적인 성공의 꿈이 아니었다.
그의 꿈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 열방을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누구를 통해 이루실 것을 보여주신 꿈이었다.
너와 네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이 창12:3
이제 야곱의 후손 중에 요셉을 통해 이루시겠다는 뜻을
그 꿈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2. 하나님이 ‘사명적 꿈’을 주실 때는, 의외의 사람을 택하시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은
야곱의 12아들가운데, 막내나 다름없는 11번째 아들 요셉이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이해 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요셉의 그 꿈은, 기존질서를 전복하는 반역의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회에도 장자권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했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조차도, 요셉의 꿈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를 꾸짖기까지 했다. 37:10
그러나 야곱은, 아들 요셉을 꾸짖기는 했지만, 형들과 달랐다.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37:11
왜냐하면 야곱 자신도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라는
당시 사회기존질서를 초월하는 어떤 계시를,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가 태어날 때, 부여받았던 사람이었고,
그리고 실제로 자기 삶을 통해 보면, 그 예언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꾸짖으면서도, 그 말을 자기 마음에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꿈을 용납할 수 없다.
기존질서를 흔들면서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이런 것을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세상은, 이런 얄궂은 애들은 잡아다가 구덩이에 던져 넣어야 된다고 본다.
따라서 형들은 꿈을 없애기 위해 꿈꾸는 자를 죽여 없애려 하다가
어찌어찌해서 애굽에 종으로 팔아버린다.
그렇게 그 꿈과 꿈꾸는 자를 없애려 했는데,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3. '종의 현실'을 통해 '왕의 꿈'을 이룬다.
▲1. 종의 형통
우리는 ‘요셉은 꿈을 성취하기 위해 대가를 치를 줄 알았다’ 이렇게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요셉은 꿈을 성취하기 위해 애굽에 간 것은 아니다.
요셉은 꿈 때문에 형들에게 팔려서, 강제적으로 애굽에 내려간 것이다.
채색옷(왕의 옷)을 입고, 왕의 꿈(절 받는 꿈)을 꾼 요셉이
지금 엄청난 검은 먹구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태연하게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39:2~3
나는 이 대목에서 성경기록자를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데, 왜 요셉의 삶은 이 모양 이 꼴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애굽에 노예로 못 팔리게 막아야 되지 않는가?
또한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했는데.. 노예가 형통해봤자 아닌가?
▲2. 고난을 통과하지만, 그 가운데 함께하시고 보호하신다.
우리 상식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이런 요셉의 기록은
실제로 <요셉 메시지의 핵심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중요한 장치이다.
요셉의 꿈은, 요셉의 삶의 고난을 면제해 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형들의 시기심으로 요셉이 애굽에 팔리는 것을 막지 않는다.
대신에 하나님이, 요셉의 꿈 때문에 애굽에 팔려가지만,
함께 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은 확실하다.
형들이 꿈을 없애버리려고, 요셉을 애굽에 팔아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케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도 (자기가 원치 않아도 주어진) 꿈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해석자들은, 요셉이 꾼 꿈 때문에 애굽에서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실이 아니다.
요셉은 17살에 총리 꿈을 꾸면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 꿈 얘기는 처음에 나오다가, 한 동안 안 나온다.
그러다가 형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에 와서, 총리가 된 요셉 앞에서 영문도 모르고
절을 했을 때, 비로소 요셉이 자기가 과거에 꾼 꿈을 생각했다고 했다. 창42:6, 9
만일 요셉이 17세 꿈 꾼 직후부터, 애굽의 총리가 되고 싶어 했다면,
그는 과대망상증 환자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럴리 없다.
요셉은, 그 꿈이 무슨 꿈인지 도대체 몰랐을 것이다. 그저 심상찮다 정도로 생각하고
다만 하나님만 신뢰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텨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 꿈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서
10년 동안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걸어간 것뿐이다.
그렇게 하다가 더 비참하게,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성폭행범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3년 동안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상상치 못할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는데,
요셉은 총리를 목표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그냥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걸어갔을 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고, 그를 형통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도록 하셨다.
▲3.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은 것이다.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39:4~5
이방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이, 요셉 때문에 복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창12:3절의 언약이
요셉을 통해 지금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본다.
어디 그 뿐인가?
애굽의 총리가 된 후 7년동안 임한 대 기근에서 고대 근동을 살려낸 것은,
그가 정말 ‘복의 근원’으로 사명을 성실히 감당한 것을 보게 된다.
◑적용
▲1. 내 야망의 꿈인가? 주님이 주시는 ‘왕의 꿈’인가?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우리가 꿈꾸는 꿈은, 개인적인 야망, 일신적 영달, 가족의 성공이 담긴 꿈인가?
아니면 세상을 향한 긍휼이 담긴, 하나님이 주시는 꿈인가?
오늘 우리가 꿈을 가져야 된다고 말할 때, 개인적인 큰 소망을 가져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꿈을 받아들여야 된다>는 말이다.
우리를 세상에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꿈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뿐만 아니라,
오늘 하나님의 백성된 내게도 똑같이 주신 꿈이다.
이 꿈은 내 스스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 열방이 복을 얻고, 우리가 세계 모든 민족에 복이 되는 꿈은
우리의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는 꿈이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는 꿈도, 우리가 자연스럽게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자연인들은, 이런 꿈을 원하지 않는다.
솔직히 당신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꿈을 갖고 싶으신가?
아니면 그냥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꿈을 꾸기 원하시는가?
저는, ‘내 한 몸 편하게 살면 그만이지, 왜 굳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가?’
과거에 이런 생각을 종종 하며 살았다.
목사가 된 이후에도, 이런 생각 가끔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꿈은 우리의 소명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꾸어야 하는 꿈은, 우리 이기적 소원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꿈꾸어야 한다. 꿈=사명이다.
따라서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꿈은 ‘왕의 꿈’인데
이것은 세상에 위협적이기 때문에
왕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다보면, 고난을 마땅히 당하게 되어있다.
▲2. 크리스천은, 왕으로 부름 받았지만, 종으로 사는 현실... 요셉이 모델이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삶을 통해
크리스천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왕의 신분이지만
세상 가운데서는 종으로 섬기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요셉은 왕의 의복을 입고, 왕의 꿈을 꾸는, 왕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디발의 집에서 10년 동안 종노릇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오늘 세상에서 ‘종처럼’ 빌빌거리며 사는 것인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3. 예수님이 직접 모델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인간들은 너무나 무지해서, 이런 기독교 신앙원리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 하고, 서로 큰 자, 높은 자가 되려 했다.
따라서 이제 예수님이 직접 세상에 오셨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보여주신 행동과 말씀은
하나님의 종이 ‘왕이지만 세상에서 종으로 섬기며 사는’ 신분임을
몸소 행동으로, 말씀의 가르침으로 잘 보여주셨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는 너무 참혹하다.
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만 하면, 메시야로 믿겠다‘는
유대인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는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8, 막10:45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시지만, 종으로 세상을 섬기도록 부름 받으셨다면
그의 제자된 우리들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래서 루터는 이 같은 진리를 오래 전에 깊이 깨닫고 이렇게 강조했다.
<크리스천은 왕의 신분이지만, 종으로 섬기도록 부름받았다!>
오늘 우리가 왕의 꿈을 꾸지만,
현실은 지지리 잘 안 풀리는 종의 모습인 것은
이런 크리스천의 ‘이중 정체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왕의 신분으로서.. 혜택과 특권만 요구하지
종으로 섬기며 사는 것은.. 거부한다. 등한히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는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기도하신 것은, 당시 유대인들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오늘 우리들을 위한 기도인지도 모른다.
▲4. ‘출세’가 아니라, ‘섬김’이 진정한 성공의 척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세상을 축복하시려는 꿈/목적이
오늘 내 삶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는가? 요셉처럼 말이다.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세상에서 유명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요셉처럼,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시는가?
특별히 구정/추석이 되면 온가족이 모일 때, 크리스천을 조소할 수도 있다.
‘도대체 믿음이 뭐냐? 믿으면 복 받냐?’ 이렇게 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크리스천이라 하나,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때로는 머슴살이 한다는 느낌 때문에
명절에 친지들을 만나기 꺼려하는 청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슴살이를 하지만, 요셉처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의 섬김으로 인해 내 일터/가정/공동체가 복을 받고 있다면
나는 ‘왕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자녀, 빛과 소금’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을
잘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꿈을 크게 크고, 그 꿈을 위해 대가를 치르고
그 꿈이 이루어져 이미 풍요롭게 되고 성공했다 하더라도
자기 삶이 '열방에 복'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5. 섬기다 보면... 총리도 될 수 있다. 총리를 목표한 것은 아니지만...
요셉이 하나님의 주신 꿈을 꾸고도 13년 동안
묵묵히 자기에게 맡겨진 종의 길에 순종한 결과
요셉은 그 누구도 기대하지 못한 방식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지금 우리가 ‘왕의 꿈’에 비교해 볼 때, 너무 초라한 ‘종의 현실’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끝까지 하나님께 신뢰의 끈을 놓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간다면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형통케하시고
전혀 상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애굽의 총리처럼 높여주실 것이다.
<09.01.25. 인터넷설교 녹취 *원제목 :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인가? ▣ 기독교 승리주의
'분류 없음 > 2009'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이 생각났더라 1754 (0) | 2009.02.19 |
---|---|
경제풍랑을 헤쳐 나가는 3가지 길 1753 (0) | 2009.02.18 |
어머니 (0) | 2009.02.17 |
네 이웃을 네 몸처럼 1749 (0) | 2009.02.16 |
하나님의 진노와 뜻을 돌이키심 1744 (0) | 2009.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