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시42:10 2009.02.08.설교 녹취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오늘날 존재하는가?
참된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오늘날에도 과연 존재하는가?
세상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와 교회가 나타나기를 목말라하고 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며 목말라하는 세대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시42:10
이방의 우상들은, 나무나 돌로, 쇠로 만들었기 때문에, 눈에 보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득세하고 교만하던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비난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오늘도 세상은, 크리스천들에게 묻는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비난의 말도 되지만, 목마름의 말도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목말라 하고 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면서, 하나님을 좀 보여 달라고 아우성이다.
뭔가 자기들 세상과는 다른, 기독교의 참된 정수를 보여 달라고 목말라한다.
오늘날 기독교에 대해 안티, 또는 비호감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
영 타락한 사람 소수를 제외하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면서, 하나님을 좀 보여 달라고 아우성인 것이다.
건전한 보통 사람들이 기독교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 밑바닥에는 참된 하나님, 참된 기독교를 보여 달라는 목마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잘 보여주셨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주세요’ 했을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다. 요14:9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본 것이다.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11:26
▲오늘 우리 기독교의 사명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 사회에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하는 엄숙한 사명이 있다.
무조건 성장하고, 크게 지어올리고, 많이 끌어 모으는 시대는 지나갔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그래서 목말라 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명>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져있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식상해 하고 있다. ‘가 봤지만 별 수 없더라’며 실망한다.
물론 그런 사람 자신이 문제가 있지만, 우리는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생수를 못 찾으니까,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 한다.
제가 한 번은, 알고 지내는 크리스천 의사에게 검진 받으러 병원에 갔었는데,
그가 진료하면서 틈틈이 무슨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 의사 집사님은 제(설교자)게 자기가 보는 책을 극찬했다.
‘목사님, 이 책을 쓴 분이, 여느 목사님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것 같아요!’
그는 하버드 신학대학을 다니다가, 한국에 와서 승려가 된 사람이고,
그런 자기 신념과 철학을 책으로 써서, 그 책이 화제가 되었는데
그 의사 집사님이 그 책을 극찬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마음속에서 이 시편 말씀이 생각났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목마른 세상에 하나님을 과연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1.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4:12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 주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성도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초대교회가 유무상통 하면서, 교회 내에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또한 당시 초대교회 교인들 가정은, 무의탁노인, 고아, 장애우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짐짝처럼 느껴지던 사람들을.. 성도들이 품었던 것이다.
그 때 세상 사람들은, 교인들을 우러러보기에 앞서
하나님을 보게/알게/생각하게 된다.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구나, 하나님이 저들을 저렇게 변화시키셨구나!’
▲2. 자기 가족을 살해한 인디오들을 향하여 나아간 사람들.
짐 엘리엇과 그의 동료 4인이 남미 아우카 인디오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했는데,
짐 엘리엇의 부인(엘리자베스 엘리엇)과 네이트 세인트 선교사의 누이(레이첼)이
아우카 부족에 복음 전하러 들어갔다.
결국 아우카 부족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께로 돌아왔다.
스티브 세인트는 순교한 네이트 세인트 (항공) 선교사의 아들이다.
이 스티브와 그의 여동생은, (아마) 그들이 십대 때
자기 아버지를 죽였던 아오카 인디오 민카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살해자 부족사람 중 한 명인 민카이는 회심하고 나중에 목사가 되다)
그들 형제 자매 두 사람은, 자기 아버지의 살해자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놀라운 이야기 아닌가! ☆관련글 보기
아들 스티브 네이트도 나아가다.
이 사건 이후에 에쿠아도르 아우카 부족 지역이 선교의 명소가 되었다.
미국에서 단기 선교 및 그 외 선교 자원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갔다.
돈과 인력으로 말하면, 너무 엄청나게 들어갔다.
사람들이 가서 예배당을 지어주고, 세월이 지나서 낡으면 페인트칠 해 주고..
그런데 세월이 지나니까, 그 일도 시들해진다.
그리고 그 예배당을 수리해야 하는데, 현지인 인디오들은 팔짱만 끼고 있었다.
‘저것은 백인들 예배당이야! 또 와서 페인트 칠 하겠지...’
아버지가 순교할 당시 5세였던 스티브는, 역시 에쿠아도르 본부에서 살고 있었는데,
미국으로 돌아가서 대학을 마치고, 좋은 직장 다 팽개치고
다시 에쿠아도르로 돌아왔다.
그는 지금, 자기 아버지를 죽인 그들과 함께,
그 원시적인 부족에서 (선교하며) 살고 있다.
원주민들은, 이 스티브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깨닫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주춤했던 그 지역이, 다시 복음화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3. 한국에도 비슷한 역사가 있다. 바로 손양원 목사님이다.
손양원 목사님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교회가 좀 (좋은 의미로) 이상해졌으면 좋겠다...
▲세상과 별다름 없는 교회는... 안 된다.
오늘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다.
그리워하고 있다.
‘교회가 좀 이상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자기들 상식적인 판단 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하고, 놀라운 일들을 좀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즉, ‘주님의 사랑을 좀 실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위에서 예를 들은, 스티브 세인트 선교사, 손양원 목사님,
또한 예를 들지는 않았지만 의연하게 아프간을 사랑해서 순교한 형제님들!
이런 일들이 계속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기독교인>
<세상이 경이롭게 여기지 않는 기독교회>
그런 것들은 우리가 지금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고
뭔가 ‘하나님을 보여주는 힘이 부족한’ 것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OO제일교회가 무엇으로 ‘제일’이 되고 싶어 하시는가?
이 강북 지역에서 건물 크기로 제일?
아니면 모이는 회중 숫자로 제일?
그런 것들도 ‘제일’이 되면 좋지만,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제일>이 되시기를 바란다.
그런데 다른 목표와 가치를 두고 ‘제일, 제일’ 하는 것은
자기들 중심적인 소원/교만 일수도 있다.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제일이 되겠다’
‘목마른 세상에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제일이 되겠다’는 목표 이외에
다른 ‘제일’은
하나님 나라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이 교회가 제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정말 제일 예수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제일 교회’가 될 줄 믿는다.
...................................... 더 읽으실 분 .........................................
▲'마스길 기도'
‘마스길’의 난외 주석에는 ‘교훈’이라고 되어있다.
마스길은.. 시편에서 ‘묵상’ 또는 ‘교훈’으로 번역되는데,
기도하다가.. 그 기도내용 중에.. 기가 막힌 문장이 떠오르면서
그 ‘떠오른 문장’을
그 다음 번 기도시간에도 계속 기억/묵상하며 기도하게 되는데
그래서 그것이 ‘묵상’ 또는 ‘교훈’의 뜻이 되는 ‘마스길’이다.
그러니까 시편42편 전체가, 또는 시53편 전체가 .. 그런 ‘기도 중에 떠오른 교훈’
즉, 마스길이 되는 것이다.
즉 시42:1절,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오 하나님이시여, 내 영혼이 주를 찾아 헤매입니다... 부터
42:11절(끝절)까지
오 내 영혼아, 어찌하여 슬퍼하는가?
왜 그렇게 속상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희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를 구원하신 분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신 그분을 마땅히 찬양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 모두가
시편 저자가.. 기도하다가.. 기도로 아뢴 내용을..
나중에 그것을 양피지에 적어서, 시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때, 기도하다 보면,
어떤 한 문장의/주제의 기도에 계속 집중적으로 머물 때가 있다.
쉽게 다른 기도 제목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그 한 가지 기도만 계속 반복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시42:1절 같은 기도를, 수 십 번 반복하며
계속 매달릴 때가 있다.
그 기도에 사로잡혀서, 그 기도에 집중하게 되고, 계속 그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이것은 중언부언 하는 기도, 한 말을 또 되풀이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 가운데, 한 가지 기도에 깊이 빠져드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오래 기도하다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기도가 ‘풀어지는’ 느낌이 든다.
‘아, 이 기도는 응답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때부터 기도가 감사로 바뀌게 된다.
그 기도가 주님 앞에 전달되었다는 확신이 든다.
그러면서 기도의 내용을 (자기가 반복적으로 묵상하며 기도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 바로 마스길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 프란시스 자비에르.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선교에 뜻을 두고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일본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자비에르는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복음을 증거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마치 자비에르 선교사에게 특별히 할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조용히 자비에르에게 다가왔다.
자비에르는 설교를 일단 중지하고 그에게 가까이 돌아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때 갑자기 그 사람은 자비에르의 얼굴에 대고 침을 탁 뱉었다.
아무런 기미도 없이 뱉어 놓은 침이어서 자비에르는 엉겁결에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자비에르는 한 마디 말이나 기분 나쁜 기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아니하고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아내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설교를 계속했다.
처음에 자비에르의 설교를 냉소적으로 코웃음 치며 듣던 사람들이
자비에르의 이 행동을 보고 나서 엄숙해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는 그 도시에서 존경을 받는 의사 한 분이 참석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러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가르치는 법,
저러한 용기를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진리,
저렇게 자신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덕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사상은
결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저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에 틀림이 없다.”
<09.02.08. 인터넷 설교 녹취,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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