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일차적 소명은 '사랑' 요15:12~13 설교 녹취
◑사랑하라는데, 사랑하기가 어렵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 교훈이 ‘사랑’인 것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로 ‘당신은 정녕 하나님을, 또한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
라고 질문을, 오늘 심각하게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고자 한다.
▲가족이라도 서로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
누구보다도 서로 사랑해야할, 부부사이에 있어서도
사실 배우자를 진정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동화책에 보면,
‘왕자와 공주가 우여곡절 끝에 만나서 서로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로 끝나지만,
사실 현실은, 한국이나 미국이 40%에 가까운(이상의) 이혼율을 보이고 있다.
고부지간은 말할 것도 없고, 형제지간, 부자지간도
한 집에서 살면서 매일 서로 쳐다보면서 살면... 갈등하게 된다.
그런 연유로 ‘자식이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라’는 말씀을 명심하게 된다.
사람들은 서로 붙어 있으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기 때문이다.
늘 떨어져 지내다가, 명절이나 생신 때 가끔씩 만나야.. 서로 반갑지
늘 한 지붕 밑에서 같이 살면.. ‘가족이라도’ 서로 사랑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원수까지 사랑하라니... 도대체 웬일인가?
한 이불 덮고 수 십 년 같이 살았던 부부도, 서로 갈라지는 판국에
도대체 원수까지 사랑하라니... 딱 깨놓고 보면, 현실성이 떨어지는 말씀인 것 같다.
우스개 소리로, 어느 교회에서 설교 중에
‘마음속에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했더니
100세가 가까운 노인 한 분이 손을 드시더니 하시는 말씀,
‘미워하던 사람이 옛날에는 있었는데, 다 죽었어!’ 하셨단다.
당신은 너무 오래 사시고, 자기 주변 사람들은 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는, 원수가 없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현실로 인해, ‘사랑하라’를 이상적인idealistic 계명으로 여기고, 슬쩍 넘어가 버린다.
성경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지만,
성도는, ‘가족도 사랑하기 힘든데, 원수까지 사랑하라니...너무 비현실적이야’ 하거나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대놓고 공개적으로 무시하는 것도 아니니...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 또한 둘째 계명’을... 은근슬쩍 넘어가 버린다.
그 명령을, 그저 이상적인/비현실적인 계명으로 여기고,
평소 신앙 생활 중에서,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 결과, <사랑하라>는 계명을..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 정도로 이해한다.
예를 들면, 부부간에도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 명령이니까!
그러나 현실은, 부부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지 않아도 큰 문제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저 불륜만 저지르지 않는 정도면..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여기고.. 대충 넘어간다.
부부로서 최소한의 의무와 정조만 지킬 뿐, ‘부부 사랑’은 남의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그래서 정조만 지키며 최소한 의무만 행하는 가정... 뭐가 행복하겠는가?
‘그냥 애들 결혼시킬 때를 위해서, 못 헤어지니까 같이 산다’는 부부가 늘고 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성도의 도리만 하면서
대강대강 믿는 성도들이 참으로 많다.
바로 윗 단락(▲)에서 언급한 냉랭한 부부지간처럼,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가.. 그런 싸늘한 관계가 되어버린 것은,
‘사랑하라’는 명령을.. ‘큰 잘못만 저지르지 않는 것’ 정도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죄)임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방어막을 치고, 안전하게 사랑하는 세태
▲내가 상처받을까봐 두려워서 사랑을 100% 주지 않으니까.. 내 삶이 행복하지 않다.
작가 노희경은 ‘제2의 김수현’으로 불리며,
‘꽃보다 아름다워’, ‘굿바이 솔로’, ‘내가 사는 이유’ ‘빗물처럼 화려한 시절’
등의 드라마를 집필한 스타 작가이다.
그가 2008년 12월에「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수필집을 냈다.
그 중에 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한 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할 땐 더욱 그랬다.
사랑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 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 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아 정말 행복하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내게)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상처받을까봐 두려워서 사랑을 주지 않으니까.. 내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
는 뜻이며, 그게 바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마음이.. 바로 윗 글과 같은 마음이지 않는가?
왜 나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고 고백하지 못하는가?
- 상대방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하나님을 ‘미치도록 사랑합니다’고 고백하지 못하는가?
- 방부제 넣지 않은 빵처럼 쉽게 부패하는 정도로만.. 내가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나 한 번 ‘주님, 사랑해요!’ 하다가
일주일 내내 그 사랑하는 주님을 까마득하게 잊고 산다.
더욱이,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늘 만들어 놓는다.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그저 ‘가벼운 사랑의 고백’만 드린다. 언제나 철회할 수 있게!
괜히 진하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하나님이 다 바쳐라, 오지로 가라’하면 큰 일 날 것 같아서
그저 살살,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빠져나갈 구멍 두고서...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
이런 것이 ‘이성적인, 상식적인 사랑’이 될 수 있겠지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그런 사랑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며 우리에게 보이신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다 버리신, 100% 헌신하신 사랑인데... 우리는 너무 인색하고 계산적이다.
▲오늘 우리 각자는 (노희경 작가처럼) 심각하게 스스로 질문해 보자.
‘너 그리 피상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정말 행복하냐?’
‘너 배우자를 그리 사랑하는 둥 마는 둥 해서 정말 행복하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하면 된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 분을 사랑하라는 것인가?
우리는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과연 사랑할 수 있는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은, 깊이 생각하면.. 부담스러운 말씀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십자가에 죽는 방식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랑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 문제없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이웃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내게 매우 거북하다.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지신 십자가는.. 얼마든지 감사하며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는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 부담스럽다.
미움과 증오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내가 십자가를 지는 방식으로 원수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미친 짓이다. 냉엄한 현실에서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으로 보인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정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정의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이것은 내가 십자가를 진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2~13
이렇게 말씀하시고, 친구를 위해서, 친히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
▲이런 사랑을 잘 깨달았던 이해인 수녀의 고백
그는 봄마다 피는 진달래를 보고 이렇게 노래했다.
해마다 부활하는 사랑의 진한 빛깔 진달래야,
네 가련한 꽃술이 바람에 떠는 날
상처 잎은 나비의 눈매를 본 적이 있니
견딜 길 없는 그리움의 끝을 너는 보았니?
봄마다 앓는 우리들의 지병은 사랑!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한점 흰 구름 스쳐가는 나의 창가에
왜 사랑의 빛은 이토록 선연한가?
이 시행은 아가서 5:8절을 염두에 두고 노래한 것이다.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아5:8
여러분, 주님을 생각하노라면, 가슴이 벅차고, 가슴이 찡해지고, 눈물이 나시는가?
만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봄마다 앓는 지병이 생겼다면
(비록 세상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술람미 여인처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주님께 고백할 수 있다면,
(비록 돈을 많이 못 벌었다 하더라도) 그는 진정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크리스천들이 이렇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성경의 ‘사랑하라’는 명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도 않는데, 억지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요,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그 사랑에 깊이 감격되어
십자가 위의 주님의 사랑을 찡하게 느끼므로... 자원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불교와 대비해서 설명하면
불교는, 깨달음을 얻는 종교다.
그러나 기독교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을 ‘경험’하고
이 주님을 알아가고, 이 주님을 더욱 열렬히 ‘사랑’하는 종교다.
이게 불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다.
불교는, 삶 가운데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이지,
그들이 사랑하는 부처와의 인격적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뜨거운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줄 수는 있지만, 가슴이 뜨거운 체험을 주지는 못한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명상을 하고, 참선을 하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불교와 달리, <사랑하는 주님과 인격적 만남>이 신앙의 핵심이다.
그래서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장이 뛰게 된다.
연인을 만나는데 마음이 차분해 진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지 않는가!
연인을 만나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사랑의 노래가 저절로 솟아 나와야 정상 아닌가!
◑사랑의 소명, 직업적 소명
▲직업vocation이 우리의 소명calling이지만, 그것은 2차적 소명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네 직업에 충실하라’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2차적 소명이다.
자기가 받은 달란트를 따라서
법조인, 의사, 실업인, 예술인, 체육인 등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그 직업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직업 자체가 제일 일차적으로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성도는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소명>이 일차적으로 강조된 바탕에서
<즉 성도는,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도록 지음 받고, 부름 받고, 세상에 보내졌다>는..
이 ‘사랑의 소명’이 먼저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을 제쳐두거나 간과한 채로
‘직업적 소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순서가 틀렸다.
그러나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1차적 ‘사랑의 소명’을 잃어버린 채
직업을 통해 영광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2차적 소명을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직업적 소명’보다, ‘사랑의 소명’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예
어느 목회자의 딸이 재수 끝에 최근에 어느 대학에 들어갔다.
경기 남부의 자기 집에서, 강북에 있는 캠퍼스까지 먼 거리를 통학 하다보니...
귀가 시간이 자꾸 늦어져서, 아빠인 목사님과 실랑이를 자주 벌이게 되었다.
목사님은 ‘밤 10시 통금’을 고집했으나,
딸은 그 시간에 맞춰서 귀가하는 법이 없었고, 그래서 집안에 긴장이 일어났다.
딸은 오후 6시에 수업 끝내고, 저녁 식사하고,
8시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열리고 친구와 대화가 시작되는데,
어떻게 그 시간에 집으로 출발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10시까지 집에 오려면)
그래서 딸 귀가시간을 두고 문제가 비화되어
이제는 목사님과 사모님이 서로 다투게 되는 일까지 생기자,
하는 수 없이 딸을, 아예 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 친구와 하숙을 시켜버렸다.
딸이 하숙집으로 떠나는 날, 목사님은 딸에게 말했다. ‘하숙집도 10시까지 들어와야 해!’
그 목사님의 경험에 의하면, 자기가 딸을 키워보니까,
딸이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 들어가고..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직업적 소명)
그 보다 더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에 응답하는 딸>이 되는 것이었다. (사랑의 소명)
딸이 성숙하면서 점점
‘나는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싶어!’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들으면서,
정말 아빠를 점점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런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의 교제가
공부 잘 하고, 좋은 대학에 다니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딸을 지극히 사랑하고, 늘 걱정하는데,
만약에 딸이, 전화도 한 통 안 하고, 돈 필요할 때만 집에 찾아오고,
아버지에게 평소에는 말 한 마디 안 건네고,
늘 친구들하고 시간 보내는 데만 정신 팔려, 부모를 완전히 제껴 놓고 산다면
공부 잘 하고, 좋은 직장 다니는 것(2차적 소명)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나는 아빠 같은 남자는 절대 싫어!’ 하면서, 농담이 아니라 몸서리를 친다면,
딸의 연봉이 수 억 대라고 해도.. 아무 아빠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자녀들이 많다.
일류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을 갖고 있으나
부모를 완전히 팽개치다시피 하면서 사는 사람들 말이다.
부모가 쪼그랑바가지라서.. 자기 얼굴이 창피하다는 사람도 간혹 있고,
부모가 너무 무식하고 사회적 신분이 낮아서., 자기 부모를 감추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직장에 부모가 불쑥 찾아오면... 낯선 사람 대하듯 하기도 한다.
자식이 좋은 대학에 붙고, 좋은 직장 얻어서 돈 많이 벌고 성공하는 것(2차적 소명)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고, 아끼고, 서로 마음이 통하고,
부모와 진정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1차적 소명)
부모가 원하는 것은,
자식이 뭐가 되건 간에,
먼저 부모와 따뜻한 사랑의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관계가 되기를 더 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우리가 크게 성공하고, 잘 나가는 것도 원하시겠지만
그것보다 먼저,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더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신앙생활 하고 있는가?
<09.02.15. 인터넷설교 녹취, 축약 ▣ 사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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