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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려 하지 말고, 시인이 되십시오! 1794

LNCK 2009. 3. 16. 09:32
 

◈시를 쓰려 하지 말고, 시인이 되십시오!     빌1:3~6  설교 스크랩, 축약



◑존재 자체로 감동을 주는 삶


▲에베레스트 산 - 그 존재자체가 감동을 줍니다!

얼마 전에 이 지상에서 가장 높다는 에베레스트 산을 가보았습니다.

그 산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그 산을 잘 볼 수 있는 위치까지 갔다 온 거죠.


산을 멀리서 볼 수 있는 위치까지 가는데, 여기서 출발해서 열흘이 걸려요.

가까이 가서 보려면 보름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 산을 잘 볼 수 있는 위치까지 가는데.


그런데 그 산에 가까이 가는 데만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격스러운 것 같아요.

멀리서 보는 산의 웅대한 그 자태는

그야말로 그 산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 같아요.


‘왜 그럴까?’ 생각해 봤어요.

산은 아무런 음성을 발하지도 않고, 직접 무엇인가를 주는 것도 없는데 왜 그럴까요?

그리고 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그 산 가까이에 안겨 보고자 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삶의 웅대함이란,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것만 가지고도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웅지를 주고, 기쁨을 주고, 감동을 주고,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생각을 주고,

무언의 대화 속에 그 삶에 감동을 주고 그 삶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만히 삶의 존재로서, 이 자리에 존재만 하고 있어도

나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얻고

나를 쳐다보기만 해도 마음속에 아이디어가 솟고

나를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에 용기가 솟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믿음의 인물이겠죠.


우리 삶도 우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많은 사람이 힘을 얻는 삶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을 가지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기쁨을 얻는 작품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후대를 위한 수고의 삶


▲오늘 날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던 원인

수많은 복음의 헌신자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지 않습니까?

이 땅에 수많은 헌신한-그리고 그의 생명을 던졌던 선교사님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있는 것 아닙니까?


요즘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토마스 선교사는 이 땅에 와서 변변히 복음 한 번 전해보지 못하고

대동 강변에서 참수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복음의 피뿌림과 헌신의 역사들이 쌓여져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주님을 알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양화진 선교사묘역에 가면 이 묘비를 보는 가운데 참 신기한 것들이 있어요.

그 연보를 보면, 불과 몇 살 살지 않은 어린이들의 묘비가 있는 겁니다.

그 아이들이 왜 이 땅에 와서 묻혔을까를 생각해요.


부모의 손을 잡고 왔을까? 아니면 부모의 태중에서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갔을까를 생각합니다.

제나라에 태어나서 모든 문화적인 환경 속에서 정말 잘 자랐다면

오래 살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 당시에 도대체 그 아이들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알게 되면, 그 모든 모습과 죽음의 의미는

<오늘 날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던 원인>이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는 알게 됩니다.

그 아이를 잃었던 선교사님들의 아픔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겠지요.

정말 낯선 땅에 와서 색다른 문화가운데서 적응하지 못해서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위하여 가슴아파하는 그 부모님의 마음들,

그리고 그들까지 이 땅에 모든 뼈를 묻고...


마침내 시간이 지나.. 이 땅의 많은 백성들이 주를 알게 된 그 감격을

그들은 결국 하늘나라에서도 누리고 있을 겁니다.


삶이라는 것은 당시에 깨닫지 못하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때 당시 우리가 잃은 것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삶에 주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된다면

비로소 우리 삶에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밥 먹다 이 세상 끝나면 그것은 너무나 누추한 삶이지 않습니까?

좀 더 넓은 집에서 살고 좀 더 편안히 살기 위해서 버둥거리다 간다면

그 버둥거림도 모든 사람이 대부분 이루지 못하는데

그렇게 살다가는 대열에 하나 더 속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각합니다.


▲죽은 후에도 영향력은 반드시 남습니다.

어떻게 살아도 우리가 죽은 후에는 다 끝이 아닙니다.

다 죽으면 끝난다고들 말하지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호흡이 끝나도, 생명은 아직 끝이 아닌 것처럼,

영향력도 끝나지 않습니다.


(거의 1천년 전에 살았던 아시시의 프란시스가

고르바초프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관련글 보기-)

 

살아있어도 도움을 못주는 사람도 있지만,

이 세상을 떠났어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생명력을 보다 멀리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냥 필부로 이 세상을 살다 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겠으나

그러나 그 가운데 주님이 우리 안에 이루시려고 했던 그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며 산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알거나/알지 못하거나)

우리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나로 인해 이 세상에/많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기여가 되고/공헌이 되는

그런 좀 더 큰 마음을 가지고, 좀 더 큰 틀 안에서 살아가야되지 않겠습니까?



◑부족한 내 삶을, ‘작품’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냥 편히> 살다가 가기를 원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냥 편히 사시다가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원하심을 이루기 위해 애쓰다가

‘나는 어찌할 수 없을지라도, 주님이 내 안에서 결국 시작하셨으니 이루심을 믿고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예수의 날까지 이루심을 믿고’   빌1:6

주님의 역사를 이루시겠습니까?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삶이란 고통이 있지요. 아픔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눈물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슬픔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몸도 건강하고 가정도 행복해요. 일도 잘돼요. 인격도 훌륭해요.

지혜와 지식이 있어요. 그런데 믿음도 좋아요.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심한 경우, 찌그러진 인생도 있습니다.

저는 요즘 사람들을 보면 왜 그렇게 불쌍하고 가엾은지 모르겠어요. 다 불쌍해요.

죄송합니다만 다 찌그러진 인생인 것 같아요.

성격도 이상하고, 심지도 굳지 못해서 늘 흔들려요. 게으르고 무능해요.

안타까운 삶의 지경을 그가 겪고 있지만

결국 생각해보면 그것도 자기가 선택한 거예요.


▲평범하거나 찌그러진 인생을 → 작품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

우리 인생은 또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아요.


찌그러진 우리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우리 인생은 또 달라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갈릴리의 어촌마을에 베드로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그 인생을 전혀 다른 삶으로 만들었어요.

‘고기나 잡아먹고 살았으면 그냥 편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 삶은 그 이후로 불편한 삶의 연속이었지만

전혀 다른 삶이 되었던 것입니다.


편하게 살려고 하지 맙시다. 그러나 의미 있게 삽시다.

삶의 걸작을 위해서 도전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작품을 만들어 가시는 기간이 깁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가려는 사람과 도봉산을 올라가려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마음도 틀리고, 준비도 틀리고, 삶의 모습도 틀린 겁니다.

도봉산 올라가려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어요.

그러면 이 사람은 맑은 날만 택해서 올라가면 돼요.


그까짓 것 맑은 날 골라서 올라가면 인생의 목표 이루는데

뭐하러 비오는 날, 눈 오는 날, 추운 날, 바람 부는 날에 올라가겠어요?

춥고, 눈 오고, 비오고, 바람 불면.. 올라갈 필요 없어요.

맑은 날 골라서 올라가면 돼요.


그런데 에베레스트 산 올라가려는 사람은

춥고, 비오고, 눈 오고, 바람 불고,

정말 길이 미끄러운 날은 더 골라서 올라가야 돼요.

왜냐하면 그 먼 길을(두 달 걸린다고 해요) 결국 가야되니까

맑은 날만 골라서 가다가는, 몇 달이 걸리면서, 결국 못 올라가게 되겠죠.


그러니까 눈 오고, 비오고, 바람 불고, 춥고 떨리는 날씨에 관계없이 계속 갑니다.

도봉산 등반과는 벌써 마음가짐이 틀리잖아요.


가다가 자기 다리를 다쳤어요. 다리가 부러졌어요.

그러면 도봉산 올라가려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은

얼른 내려와서 병원에 가면 돼요. 그래서 부상당하면 급히 내려옵니다.


그런데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가려고 하는 사람이 가다 다리가 부러졌어요.

그냥 내려올 수 없어요. 뒤돌아 내려오기도 만만치 않아요.

부러진 상태로도,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계속가야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에베레스트 등정과 같습니다.

직장생활은 30년 후에 은퇴가 있지만, 신앙생활에는 퇴직이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내가 이루는 것은, 1~2년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기도, 평생 헌신, 평생 완덕의 삶을 쌓아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신앙생활은 에베레스트 등정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작품으로 만들어 가시는 시간은.. 하나님 솜씨로 일평생 작업입니다.

우리 역시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마음으로.. 길게 보면서 가야 합니다.

 


◑시를 쓰려고 하지 말고, 시인이 되십시오!


제가 오늘 우리 성도님께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떨까요?

제가 요즘 이런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여러분 어떤 말이 맞는지 한 번 생각해보세요.

①시를 쓰니까.. 그 사람이 시인이에요.

②시인이 쓰니까.. 그게 시예요.


①훌륭한 시를 써서 그 사람이 시인입니까?

②아니면 훌륭한 시인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시를 쓰는 것입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릴게요.

①좋은 설교를 하니까 그 사람이 훌륭한 설교자입니까?

②그 사람이 좋은 설교자니까, 그 사람이 하는 설교는 좋은 설교입니까?

자, 어느 것이 맞습니까?


①‘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무나 훌륭한 말씀이죠. 그 말씀을 하셔서.. 예수님이십니까?

②아니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자, 정말 주옥같은 말씀을 하셔서.. 예수님이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이니까.. 주옥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①명 설교를 하니까.. 좋은 설교자입니까,

②아니면 좋은 설교자이니까.. 명 설교를 하는 겁니까?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려면

‘어떻게 좋은 설교를 할 수 있을까?’ 하고, 목사로서 이 고민은 늘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좋은 설교를 만들려고 생각하지 말고

네 자신이 좋은 설교자가 되면, 네 입술과 가슴에서 나오는 모든 설교는

그게 좋은 설교가 아닐까?> 늘 이런 생각을 해요.


▲마치는 말

인생에 주옥같은 시를 쓰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평생 시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단, 시인이 되는 길은, 에베레스트 산의 등정과 같이 일평생 작업이 요구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그 일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인이 되고 나면, 자기는 전혀 몰랐는데

그 존재 자체로 남에게 영향을 주며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09.02.22. 인터넷설교 스크랩, 축약      *원제목 : 걸작을 만드는 인생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