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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철저히 절망해 버리세요 1795

LNCK 2009. 3. 16. 21:35
 

◈차라리 철저히 절망해 버리세요      욥17:1-16    -설교 스크랩, 출처-

 

 

▲2009년 새해의 화두 -희망

새해가 되면 늘 우리가 희망이라는 단어를 별나게 많이 듣게 됩니다만,

금년 2009처럼 ‘희망’이라는 말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해가 없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전 세계를 쓰나미처럼 덮친 경제위기가

실물경제를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희망’이라는 단어가 아주 절실하게 느껴지는

그런 해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사회의 많은 지도급 인사들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자’며 격려합니다.

현재 경제불황 상황을 극복하고, 경제적 호전을 희망하자는 것이지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희망>함으로써.. 더 <절망>적이 될 수 있습니다.

깊이 절망하고 있는데.. 그게 사실은 내용적으로 보면 아주 희망찬 상황이고

희망하고 있는데.. 그것을 희망함으로써 더 절망적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있습니다.


절망함으로써 더 희망적이 될 수 있고

희망함으로써 더 절망적이 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깊이 절망하는 욥

오늘 본문 욥기 17장에 보면...


v11. 나의 말이 지나갔고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

하는 욥의 고백이 나옵니다.

욥은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서, 지금 전혀 희망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경영(계획)과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며 깊이 절망하고 있습니다.


(욥이 평소에 ‘부정적인 사람, 쉽게 절망하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탄식할까요?

설교자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데요.)


v12.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 앞에서 어둠이 가깝다 하는 구나. 이게 무슨 말입니까?

공동번역으로 봅시다. 밤은 낮으로 바뀌고 빛이 어둠을 밀어낸다지만


즉, ‘캄캄한 밤이 다 지나가면, 해가 뜨는 밝은 낮이 올 것이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캄캄한 밤이라도 동 터는 새벽이 온다는 희망을 가져라’는 뜻인데,

욥의 친구들이 조언한 말인데, 별 도움 안 되는 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욥은 계속 철저히 절망합니다.

v13. 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매

v14.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말합니다. ‘쨍하고 해 뜰 날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을 가져라, 

그러나 욥은 <절망 그 자체를 고스란히 받아들여> 버립니다.


스올이 내 집이 되기 원하고, 흑암에 침대를 펴고,

무덤, 구더기 운운 하는 것은.. <자기가 지금 기꺼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절망적 상황에서, 욥의 친구들은 ‘(값싼)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욥은, 절망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자기가 무덤에 내려가겠다고 말합니다. 



▲절망에 처하면, 손 떼야 될 것에 손 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려움이 올 때, 절망에 처할 때, 

그를 격려 한답시고 값싼 희망을 남발하는 것은

하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치고 펄쩍 뛸 일입니다.


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십니까?

무조건 희망을 갖고서 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해서 바라는 바가 끊어지라고 주시는 것이에요.


그걸 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어려움이 오면 손 떼라고 허락하시는 겁니다.


경제위기가 오면, 경제를 우상시 하는 마음을 손 떼라는 것이에요.

돈, 사업을 우상화 했던 것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처리해야 될 일입니다.


▲값싼 희망을 남발하는 욥의 친구들

그런데, 버려야 될 것 못 버리고 그대로 꼭 쥐고 있으면서,

‘인간의 숨어있는 무한대의 능력을 집중적으로 발휘해서 이것을 극복해 나가자’

라고 처방을 내리는 것은.. 그게 바로 인본주의라는 것이죠.


그런데 자꾸 그런 쪽으로 희망을 가지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관점을 갖고 있으니까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지만

기독교는, 그렇게 대처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욥에게 친구들은 찾아와 가지고 자꾸 얘기해요.

욥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겁니다.

'너 회개하라. 너의 죄를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회개하면

이 모든 상황이 극복되는 희망적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욥이 ‘값싼 희망’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위에서 읽은 본문처럼

'무덤이 내 아버지다. 구더기가 내 어머니요 내 자매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해선 내 계획은 끊어졌고, 내 경영은 끊어졌고

내 바라는 바가 다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습니다.


그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처한 어려운 환경과, 자식이 없어지고, 병에 걸리고, 재산이 없어지고,

정말 자존심으로 버틸래야 버틸 수도 없을 만큼

사회적으로 굴욕적인 상황에 처해져 있는 이 상황에 대해서

욥이 그걸 그대로 수용해 버리고

점점 더 욥의 마음은 현세의 경계를 넘어가서

하나님 쪽으로 시선이 연장되어 갑니다.


▲나를 보증해 주실 분은 하나님뿐!


v3.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나를 증명해 줄자가 이제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보증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이제 돈이 많기 때문도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부자로 인정해 주기 때문도 아니고,

자식들 잘 기른 훌륭한 아버지로서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세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나를 훌륭하게 인정해 줄 것이 없고


내가 나 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나에 대해서 보증을 서 주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라고 말하면서

현세 경계 안쪽으로는 모든 희망이 다 끊어진 상태에서

시선이 현세의 경계를 넘어서 하나님께로 갑니다.


욥은, 현실과 현세적 가치에 대해.. 철절히 절망하고 있습니다.

절망(切望 끊을 절, 바랄 망)이란 한자 그대로, 바라는 바가 다 끊어졌습니다.

그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는 신앙으로 옮겨가니... 이게 참된 희망의 시작인 것입니다.

 

전에는 욥이 그래도 부자요, 자식도 훌륭하고... 뭐 그런 것들로 스스로 만족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세상적 자랑을 모두 깡그리 버리고, 그것들에 완전히 절망해 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자기에게 희망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해도, 도저히 잡을 게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뿐입니다.

(야곱의 얍복강 사건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헛된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 무조건 상황만 호전되기 바랍니다.

지금 돈이 없는 상황에서.. 마음으로 돈이 많아지는 상황을 바라봅니다.

이게 헛된 희망인 것입니다.


경제위기를 당하면,

먼저 세상을 버리고, 세상에 철저히 절망하고,

욥처럼, 오직 하나님만 자기 보증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런 과정 하나 없이

무조건 돈이 다시 많아지는 상황만 희망을 갖고 바라보는데요...


그렇게 해서는, 경제위기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환란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죠.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환란을 당할 때  - 세상에 대해 죽고, 영적 회복을 바랍니다.

자식에 대한 희망, 건강에 대한 희망.. 모두 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헛된 희망을 갖기 보다는 (욥의 친구들 입장)

차라리 아예 철저히 절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욥의 입장)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건강 문제.. 욥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무덤에 자리를 펴리라’고 당차게 나갑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의 보증, 자기 희망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고 고백할 때


그 시련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영적 회복. 믿음 증진)이 달성되면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게 됩니다.

가장 큰 해결은... 믿음의 성장입니다. 세상에 대해 자기가 죽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돈 없는 상황에서.. 막연히 돈 많이 버는 것을 바라는 것 대신에 하나님 만나기를 바라고,

자식이 속 썩이는 상황에서.. 자식이 훌륭한 자식으로 커가기를 바라는 것 앞서

이런 일을 계기로, 자기가 자식에 대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를 바라는 것.. 이게 올바른 믿음이며, 욥이 지금 그 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뭐냐? 세상적 바람(희망)이 끊어진 것이에요.

이 현실 안에서, 이 세상 안에서, 무슨 세상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에요.

바라는 바가 욥처럼 다 끊어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철저한 절망,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으니까 절망 아닙니까?

그러나 그 절망이.. 신앙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 희망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만 뚜렷이 보게 되죠.

이제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돈, 자녀 아무 것도..


똑같은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은, 철저한 절망, 아무 것도 안 보이고

하나님마저도 안 보이니까, 자살을 택하게 되는 거죠.  


‘세상에서 철저한 절망’ 어쩌면 굉장히 ‘좋은 단계’(?)에 간 것입니다.

교회 수 십 년 다니고도, 그 상황에 못 가는 교인들이 많고,

그래서 욥과 같은 믿음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절호의 단계’에서, 세상 사람들은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깝죠.

 

그러나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에스더, 다니엘, 에스겔, 예레미야 등

신앙의 모든 인물들은, 욥처럼, 그 절망/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경험이 있습니다.

거기서 오직 하나님의 손만 붙잡는, 돈독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마치는 말, 2009년 새해가 되었어요. 여러분, 뭘 희망하세요?

올해는 경제적으로는 어떻게 잘 풀리고,

자식은 어떻게 잘 되고, 올해도 건강하고... 이런 걸 바라고 계십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헛된 희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욥처럼, 철저한 절망을 통과하지 않고 뭘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이고)

세상 것 다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는, (내 정욕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여러분의 삶에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헛된) 희망은.. 차라리 절망적입니다.

전혀 믿음의 진보가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진전이 없고,

하나님의 뜻이 그런 사람의 삶을 통해 전혀 실현되지 못하니

하나님 나라의 변방에 있는 사람이요, 그런 의미에서 절망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두에서

깊이 절망하고 있는데.. 그게 사실은 내용적으로 보면 아주 희망찬 상황이고

뭘 잔뜩 희망하고 있는데.. 그것을 희망함으로써 더 절망적이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절망함으로써 더 희망적이 될 수 있고

희망함으로써 더 절망적이 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절망해야, 비로소 하나님이 희망이 됩니다.

욥과 같은 절망 없이, 욥과 같은 간절히 하나님 한 분만 붙잡음 없이

그저 ‘돈 잘 벌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그냥 일반적으로 말하는 종교의 신을 말하는 것이지

기독교의 예수님, 아버지 하나님은 아니란 말입니다.


기독교의 예수님, 아버지 하나님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절.망. 切.望.

완전히 끊어진 상태가 되지 않으면.. 그 하나님은 만나지지가 않습니다.


내가 자녀가 어떻게 되기를 희망한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사랑하며 희망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값싼 희망을 갖는 것은, 신앙적으로 보면 더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내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욥처럼 이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은 자로

음부에 침상을 깔아놓고 구더기가 나의 어머니요 자매라고 할 만큼

나의 죽음을 선언하고, 이 세상에 대한 자기 희망의 죽음을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그 절망이.. (하나님 편에서 태로 살아나는) 기가 막힌 희망이 됩니다.


그러면, 하늘의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고

그 아버지가 소유되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세상의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자의 삶이 전개되어져 가는 것이에요...


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도 순간순간 주님의 십자가와 나를 동일시하면서

이 세상에 대하여 절망하며

우리의 희망의 시선이 현세의 경계를 넘어

보좌에 앉아계신 아버지께 도달할 수 있는

참된 희망의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무조건 이 땅에서 주어진 현재의 위기와 장애와 어려움을 극복하겠다는 희망은

헛된 희망뿐인 것을 깨달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009년 1월, 설교 스크랩, 정리   *원제목 : 절망보다 더 절망적인 희망                   ▣ 십자가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