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과 그 해결 행6:1~7 설교 스크랩
▲「무너지는 장벽」이란 책이 있습니다. 데이브와 수스, 홍성사
‘무너질 북한을 위한 긴박한 부르심’ 이라는 부제목이 붙어있는 책인데,
내용은, 북한이 무너졌다는 뉴스를 갑자기 들을 것이니
북한 선교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북한의 문이 열리는 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입니다.
복음이 아니고는 남과 북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 될 수 없는 상황까지 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너무 준비가 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통일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지만, 막상 북한 정권이 무너졌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준비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 가장 악한 영이 사로잡고 있는 나라, 우상숭배의 극치인 나라가 북한입니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 남한은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독교의 부흥이 있습니다.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교회들이 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한에 엄청난 영적 장벽을 만들어 북한을 막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것은 북한이 무너졌을 때, 남한 교회의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통일교가 이미 깊이 들어가 있고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화자동차 공장을 가지고 있고 종교센터를 평양 큰 거리에 세우고 있고.
남한 교회가 정신 차리고 준비하지 않으면
땅을 치고 후회하고 통곡할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한 교회는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여러 가지 선교전략이 필요하지만 그 중심은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복음에 분명히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말씀이
북한을 위하여 기도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알았습니다.
◑구제의 불평등 시행으로 인한 <원망> -중략- 보시려면 여기 클릭
◑북한의 원망
▲도와주다 지친 남한
지금 북한은 남한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온갖 위협과 협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북한을 보면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동안 도와주다가
당신들이 안 변하면 안 도와주겠다고 하니까
이제는 미사일을 쏜다, 대포를 쏜다며 난리도 아닙니다.
그런 북한을 보면서 “돕지 말자! 도와서 뭐해! 오히려 전쟁을 하자는 것이잖아!
도와줄 필요도 없다!”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북한을 도와줘야 한다는데 일관 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는 것 보니까 진짜 도와줘야 될 것인지 회의가 듭니다.
이번에 미사일을 발사한다, 대포를 쏜다고 위협을 할 때
솔직히 그런 기도가 나옵니다.
지난 주일까지만 해도
“주여, 아예 망하게 하소서! 이젠 도와달라고 해도 도와주면 안돼.
저러다가 원조 다 끊기고, 굶어죽으면 후회하겠지! 내부에서 폭동이 일어나야 돼!“
지금 우리나라 정부도 갖고 있는 기본 생각이고
온 국민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 북한에 대하여 치를 떨고 모든 도움을 중단하자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북한은 우리에게 부담스런 존재, 증오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보게 하시면서 깨달았습니다.
원망을 듣고 같이 원망하는 것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원망 소리를 들을 때, 같이 원망하고
극단적인 거부감으로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마귀에게 휘둘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한 교회를 부흥시키시고 북한을 위해 준비시키신 것은
단순히 물질만이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십자가 복음 안에 서있는 그 마음 중심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원망에 대한 사도들의 대처
아래 내용이 ‘북한 돕기’에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원망들을 때, 달랐습니다.
말도 안 되는 원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인데도
사도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원망할 때
“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불평 불만이 나오는 것 보니 말씀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교회 모든 일을 우리가 다 하려고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대단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도들이 정말 성령충만한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정말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사도들은 십자가의 사람이었기에
교회의 시험 중에 오히려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잘 섬겼는데 나는 마음으로 도와준다고 했는데
불평이 나오고 원망이 나오면,
그 사람의 잘못이 더 크게 보이지, 내 잘못이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정말 십자가에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로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아, 그렇구나, 이것이 무슨 문제 때문에 생긴 것이구나!’
하는 것이 깨달아진 것입니다.
▲기도가 줄어든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구제할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교회 같으면 부흥 된 것인데 일이 많다보니 기도가 우선순위에서 슬쩍 빠졌습니다.
결국 시험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바빠도 기도를 쉬면 안 됩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기도를 쉬면 안 되는 것을 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다가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실 때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들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도 쉬지 아니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그리고 우리 교회 일 다 나누어 주도록 하겠습니다.
▲도와주면서도 주도권을 양보했습니다.
여러분, 교회 일도 다 헌신이고 수고지만
내가 어떤 일을 맡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라고 하면 그렇게 섭섭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것이 아무 문제가 안됐습니다.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을 위해서 우리가 다른 사역은 다 나누어줍시다.”
그 구제 사역이 재정을 맡고 있는 사역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여보, 내가 기도하지 못해서 그래. 미안해! 집사님, 제가 기도 못해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남의 잘못만 보이고 섭섭하고 화가 나서 자기 문제를 보지 못합니다.
원망 시험이 결코 저절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험입니다.
그러나 예수로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과감히 자신들이 맡았던 구제사역을 교인들에게 맡겼습니다.
사도들은 빠지고 교인들이 의논하여 일곱 사람을 세우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또 놀라운 감동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구제 사역을 대신 맡을 사람을 뽑지 않고
교인들이 뽑아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의논해서 성령충만한 사람 일곱 사람만 뽑아오십시오.”
교인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고 사람을 뽑아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곱 집사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7집사를 헬라파 유대인들로 구성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5
일곱 사람의 이름이 공통점이 있는데, 다 헬라식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교회가 있을까요?
지금 교회에서 헬라파 사람들로 인하여 시험이 생겼습니다.
헬라파 과부들을 소홀히 여긴다고 불평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 일을 하던 사도들이 뒤로 물러가기로 했어요.
교회 안에 이런 일이 실상 벌어지면 쉽지 않은 일이 생긴 것입니다.
“담임 목사님 손 떼세요!” 이렇게 된 것입니다.
교인들이 모여서 의논했습니다. 사도들이 아니고 교인들입니다.
“헬라파 교인들 안에 이런 불평이 생겼는데 그러면 헬라파 교인들을 세웁시다.
그러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까?
오해다 아니다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아, 그것 정말 지혜로운 생각이네요. 히브리파 교인들이 다 물러서고
헬라파 교인들이 주관해서 재정을 맡아서 하십시다.”
의논한 결과 일곱 명을 뽑아 양식 나누는 일을 다 맡겼는데,
모두 헬라파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분위기였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것 못해냅니다. 정말 감동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정말 멋있습니다.
▲전화위복
이렇게 하니 교회가 갈라질 시험을 만나고도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6:7
많은 제사장들도 예수 믿었다면 단순히 전도해서 되었겠습니까?
그들이 얼마나 감동받았으면 그리했겠습니까?
바닷가에 가보면 파도는 끊임없이 강한 힘으로 밀려왔다가 밀려갑니다.
겉보기에는 스스로 움직이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멀리 있는 달의 인력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닷가의 파도가 달의 인력 때문에 밀려왔다/가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이
우리가 예수로 살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이고 또 하나는 성령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겉보기에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으나
영적인 힘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육신이냐 예수님이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원망도 이길 힘을 갖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북한에 대한 비전
▲북한 성도들이 장차 선교사들이 될 것입니다.
「무너지는 장벽」에서 북한 사람들이
마지막 때 선교사로 쓰임받을 것이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이
오히려 세계 어떤 사람도 들어가기 어려운 선교 현장에 그들을 쓰실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남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기 나름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준비할 것이 무엇입니까?
남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원망도 극복하게 되는 십자가를 붙잡고 있습니까?
▲북한 성도들에게, 참된 십자가 복음을 전달해 주는 것이.. 지금 남한이 준비할 사명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우리는 비난하기를 멈출 것입니까?
언제 우리는 자기 연민을 중단할 것입니까?
언제 우리는 미워하기를 그칠 것입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푸념을 늘어놓을 것입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운이 없다고 하소연할 것입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 이유를 나열할 것입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행복하지 않는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언제부터 우리는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까?
언제부터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언제부터 우리는 행복을 만들어 갈 것입니까?.
언제부터 우리는 천국을 경험하며 살아갈 것입니까?
이미 하나님이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만 붙잡으면 됩니다.
우리가 참된 십자가 복음을 깨닫고, 그대로 살고,
그것을 통일 후 북한에 전달해 준다면
북한 성도들이, 놀라운 남은 지역 선교사들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원망>부터
십자가에서 해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09.03.01. 인터넷설교 스크랩 *원제목 : 십자가만 분명하면 시험도 유익이 된다 ▣ 시사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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