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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친구 되기 1821

LNCK 2009. 4. 1. 14:37
 

◈하나님의 친구 되기                 출33:7~15           09.03.01. 설교녹취



◑진정한 친구를 그리워하며 사는 사람들


벗 하나 있었으면 /도종환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냥 알고 지내는 친구 말고,

진정한 친구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 시는 노래하고 있다.


▲영화 <친구>가 방화 사상 최초로 관객 8백만 동원하며 히트친 이유

어려서는 서로 허물없는 친구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이해관계가 얽히는 가운데, 친구를 배반하고

결국 친구를 죽이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왜 이토록 한국 사람들이 이 영화에 열광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처럼 살벌하고 적자생존의 사회 속에서

역으로 진정한 친구를 찾아보기가 그만큼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영화에 관심을 주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친구에 대한 기대를 아예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친구와 함께 라면,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길을 떠날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내가 지치고 넘어지고 망연자실 할 때,

언제나 달빛처럼 따뜻하게 내 등 뒤로 다가와 나를 품어주는

이런 벗이 과연 이 땅위에 있겠는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 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게 되면서, 인간의 연약성을 깨닫게 된다.

나도 참 약한 존재임은 물론이고,

내가 믿고 의지했던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참 나약한 인간임을 깨달아 가면서

친구에 대한 기대는 물론/모든 인간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차츰 버리며 살게 된다.


▲진정한 친구는 세상에 없다.(물론 예외 있음) 그러나 주님을 진정한 친구 삼으시면 된다.

도종환 씨가 노래하는 ‘진정한 친구’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니 친구를 포함한 내 주위에 모든 사람들 중에,

정말 따뜻하고 품어주는 사람을, 만약 내가 찾을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까?


(물론 내가 그런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어야 하는 사명감을 갖고 살아야 하지만

지금 그런 주제를 논하는 자리는 아니고)


이 설교의 주제는,

우리가 정말 진정한 친구/도종환 씨가 노래하는 그런 참된 친구를 만날 수 있는데,

그분은 바로 주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그 친구이신 주님의 임재를 늘 느끼고,

그 친구이신 그분과 교제/대화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어제도 넘어지고, 오늘도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데,

달빛처럼 다가와서 내 등을 쓰다듬어 주는 이런 친구,

칠흑같이 어둠 속에서도, 그와 함께라면 다시 먼 길을 출발할 수 있는 친구,

그 분은 언제나 내가 넘어져도 일으켜 세워주시고, 

내가 낙심하고 있어도, 다시 새 출발 하게 하시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런 예를,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던 모세를 통해, 한 번 살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벗, 모세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출33:11


▲하나님이 사람을 <벗>이라고 부른 경우가, 구약에 2번 나온다.

한 번은 아브라함이다.

야곱을 향해서는 종종 ‘나의 종’으로 부르셨지만,

아브라함을 향해서는 ‘나의 벗’이라고 부르셨다.  사41:8


또 한 번은 본문의 모세이다. 출33:11


여러분, 상상이 되시는가?

천지 창조하시고, 우주와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

어떻게 낮고 천한 인간과 더불어, 친구처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신다는 것인가?

(신성모독이 될 수도 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실 때

환상을 통해서/꿈을 통해서/또는 직접 음성으로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직접 얼굴을 맞대고 face to face 이야기 하신 적은.. 모세뿐이다.

아주 친밀한 친구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벗, 모세의 권위를 세워주시다.

민12장에, 모세의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모세를 사정없이 비난한다.

왜냐면 모세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이다.

(아마 미리암이 일찍 죽었던 모양이다.)


그 때 아론이 이렇게 말한다.

‘아니 언제 하나님이 모세하고만 이야기 하셨더냐?

우리하고도 하나님이 말씀하지 아니하셨더냐?’


하나님은 그 말씀을 들으시고, 갑자기 세 사람을 모두 회막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여러 선지자들에게, 말을 할 때에는

꿈으로도 말하고, 환상으로도 말하였거니와

내 친구 모세에게는 그렇지 아니하니, 내가 모세에게 말 할 때에는 

은밀히 말하지 않고, 명백히 대면하여 말 하느니라.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이 모세를 비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민12:6~8


이렇게 하나님이 호통을 치셨다. 진노하셨다.

바로 이어서 미리암이 온 몸에 문둥병이 걸리는, 징계를 받았다.


그만큼 하나님은, 자기 벗을 우대하시고 존귀하게 대우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벗, 하나님이 세우시는 영적지도자는.. 반드시 그런 권위가 있다.

하나님이 부여해 주시는 권위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이렇게 하나님과의 대화/교제를 <신비적으로> 가지려해서는 된다.

하나님의 벗/교제/대화를.. 제가 지금 신비적인 방법으로 가지라고 설교하는 것은 아니다.


신비적인 사람들은 무턱 대놓고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고 말하기 좋아한다.


성경에 보면, 선지자들이 대언할 때, 서두에 꼭 이 전제가 붙어있다.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런 것을 본 따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나,

어쨌든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처럼.. 자신 있게 말한다.


가만히 보면,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서,

결국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 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런 말씀/저런 말씀을 주셨다고 호언장담하면서

그 권위를 내세워서, 자기 주변의 신앙인들을 자기 마음대로 컨트롤 하려 한다.


그런 경우는, 거의 대부분이 자기의 상상/느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런데 가장 많이 기만을 당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부터가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맨 하단, 더 읽으실 글 참조)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친 음성/마음의 내적음성/꿈과 환상을 통해

내적음성/진짜음성/꿈/환상 등

어떤 방식으로 듣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핵심은, 형식이 아니라 그 속 내용이다. 

모세가 하나님과 이야기를 하는데

그만큼 하나님과 친밀했다는/거리감이 없었다는 것이다.


▲욥이 극심한 고난을 겪은 후에, 그가 받은 축복/영적 성장의 은혜는

<하나님을 눈으로 뵙게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막 대화하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서 느끼는 것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42:5

과거에는 멀리서 귀로, 소문만 들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눈으로 뵙는 다는 것은, 모세처럼 가까이서 대면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했다.

그래서 주님의 임재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가까이 갈수록 더 회개하니까! 

즉, 성도는 욥과 같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모세도, 아마 고난 때문에 하나님과 깊은/친밀한/대면하는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대화/교제란... 상대방의 존재가 의식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아무리 두 사람이 같이 있어서 서로 말을 나누어도

상대방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 혼자 떠드는 것은... 대화가 아니다.


하나님과 대화/교제했다는 것은

‘자기 앞에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이 지금 먼 하늘에 계시더라도

귀를 기울여서 자기 기도를 귀담아 듣고 계신다는 의식이 있을 때..

그게 하나님과 대화/교제이다.


윗 단락에서, 내적음성/친 음성/꿈과 환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거리/친밀함인데,

그것은 자기 앞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자기 기도를 하나님이 허트러 듣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기도를 매일 하지만

적어도 한 달에, 아니면 두 달에 한 번이라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그런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게 ‘지혜의 말씀/지식의 말씀/레마의 말씀/친 음성/강한 믿음’ 등 뭣이든지

그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강하게 확신을 주시는 말씀이 반드시 있다.


비록 지극히 주관적이긴 하나, 그게 바로 <하나님과의 대화/교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늘 조심해야 한다.)

혹자는 이것을 두고 ‘하나님의 임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젖과 꿀의 땅인가/ 하나님의 임재인가?


▲금송아지 숭배로 인한 진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에 도달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백성들이 지켜나가야 할 율법을 주시면서

모세 혼자만 빽빽한 시내 산의 구름 속으로 올라오라고 하셨다.

그 때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낮, 40밤을 하나님 곁에 머무른다.

 

이 기간에, 산 아래 백성들은, 모세가 오래 돌아오지 않자

불안한 나머지, 자기들끼리 금을 모아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다.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어놀며 야단법석을 떤다.

금송아지를 두고서 ‘이는 이스라엘을 인도해 낸 너희의 신이라’고까지 말한다.


하나님은 대단히 진노하셔서, 레위지파를 시켜서

회중 중에 3천명을 도륙하게 하신다.

연이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시겠다는 선언


너희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내 사자(천사)를 네 앞서 보낼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7지파를 다 멸절시킬 것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너희로 이르게 하려니와... 출33:1~2


너희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겨서 나의 노를 격발시켰지만

가나안 땅은 너희 조상에게 약속한 것이니까 내가 약속대로 주겠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하다.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아니하겠다...출33:3


다시 요약해서 말하면, 이런 뜻이다.

‘너희 원하는 대로 다 해 주겠다.

너희들이 그토록 사모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너희에게 다 주겠다.

그러나 내 임재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겠다.’


▲젖과 꿀의 땅인가/ 하나님의 임재인가?

둘 다 가지면 참 좋겠는데,

하나님은 전자는 주겠지만(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했으니까),

후자는 주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금송아지 우상숭배 하는 백성들에게 진노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범죄한 백성과 절대 함께 가실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이 백성을 치신다.


이때 모세는, 한 가지만 주시려면 차라리 후자(임재)를 달라고 간청한다.

그 임재가 없으면, 그 땅으로 들여보내지 마시라고.. 기도한다. (정답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임재’는 따 놓은 당상이라 생각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목을 매지 않는가?

여기서부터 우리 신앙의 단추가 잘못 꿰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정말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인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임재’이신가?


▲가나안 땅보다, 임재를 택한 모세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가나안으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출33:15


아무리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가나안 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가 더 소중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 계신 젖과 꿀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양손에 가득 거머쥐어도,

내게 하나님의 임재가 빠져 있다면..

하나님과 가까이 대화/교제하는 경험이 일상에 없다면..

그것은 맹탕이다. 모래성이다. 빈껍데기다.


그래서 우리도, 모세처럼 기도해야 한다.

주님이 친히 저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거든, 차라리 저를 이 광야에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여기서 죽도록 그냥 내버려 두세요!


이것이 모세의 하소연이었다.

그만큼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죽고 사는 문제처럼 중요했다.

 

▲이게 있으면, 하나님 백성의 신앙이 산다.

이게 없으면 젖과 꿀이 아니라, 더 대단한 것을 먹고/마시고/누린다 할지라도

영적 능력/파워/권세/만족이 없다.


여러분, 병이나 컵 속에 촛불을 켜 놓고, 마개를 막아 놓으면

촛불은 한 동안 타다가.. 산소 부족으로 결국 꺼져 버리고 만다.

마개가 막힌 상태에서도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 상태에서도)

촛불은 한동안 계속 타게 된다. 병 속에 산소가 조금 남아 있으니까. 

그래서 마개가 막힌 것을 쉽게 구별해 내지 못한다.


우리 신앙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교제/친밀함이 막혀진 가운데서도

촛불은 한동안 계속 타오른다. 과거에 받은 은혜의 산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과 교제가 막히고/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즉시 깨닫지 못하는데

큰 위기가 있다.


그런데 위기이면서도, 여전히 그 위기를 못 느낀다는 것이다.

촛불이 계속 타니까.., 곧 꺼져버릴 촛불인데도...


▲마치는 말

내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직분을 오래 맡아도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지 못한다면.. 맹탕일 수 있다.


그래서 모세는 젖과 꿀의 땅을 포기하더라도

하나님 자신/임재를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떼를 쓴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과 내 인격이 만나는 그 교제를.. 절대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임재를.. 절대적인 필요성으로 구하고 있다.


신학자가 신학적 지식을 많이 쌓을 수 있다.

열심히 봉사하는 일꾼이 많은 봉사로 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임재’를 모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모르면

어쩌면 헛수고이다.

그 지식과 그 봉사가.. 나아가 ‘임재’와 연계되지 않는다면.. 인간적 수고일 뿐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늘 감사가 넘친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시는 세밀한 것들을.. 늘 감사하게 된다.

그 대화/교제의 주된 내용이 ‘다투는 것’이겠는가? 아니다 ‘감사의 언어’들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있다.

정말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두르심을 체험한다. -관련글 클릭-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복음의 역사/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금방 금송아지를 만든다.

그 우상들을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섬긴다.


하나님을 머릿속으로만 알고, 한 번도 인격적으로 대면해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은 뒷전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현세 축복)만 사모하는 기복신앙으로 전락한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일어나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출33:7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은,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일어나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편히 앉아서 하나님의 임재를, 내가 원하는 때에, 언제든지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간절히 사모하는 열심’이 필요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있사오며

이 땅에서는 주 밖에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73:25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73:28


하나님의 축복보다는, 하나님의 임재만을 간절히 사모한

시편 기자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도종환 시인이 말한 ‘진정한 벗’에 갈급한 현대인들이여,

하나님도 같은 마음이시다. 모세처럼 ‘진정한 벗’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해서 친밀한 교제/대화/임재를 체험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자.



....................................... 더 읽으실 분 ...........................................


▲하나님의 음성 듣고서 교만해진 여집사님 (임재를 사모하다가 잘못된 경우)

어느 여집사님이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셨고, 여전도회 회장까지 하셨다.

이 분이 하나님과 좀 더 가까워지려고 애를 쓰다가

어느 날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짜로 들었는지 확실히 모르나, 이후부터는 잘못된 음성을 듣기 십상이다.

특히 그런 신비적 체험에 빠져버릴/몰두할 때 그렇게 된다.)


여집사는 어느 권사를 찾아가서 ‘권사님 집안에 요즘 이런 문제 있죠?’

‘있는데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이것 저것 잘못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회개하세요!’


장로를 찾아가서도 ‘장로님, 요즘 사업장에 이런 문제 있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민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이 이것 이것 구체적으로 지적하세요.

그것을 고치시고 회개하세요!’


나중에는 교인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으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해 지고, 영적지도자 말도 듣지 않았다.

결국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자기를 권면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아직 영적 체험이 부족해서/몰라서 그렇다’고

말했다.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대화하다가 교만해 질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박아놓으셨다.


바울이 죽기/살기로 3번이나 이 가시를 빼 달라고 간절히 간구해도

그 간절한 기도는 기각되었다.


‘네가 받은 계시가 너무 크므로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네 육체에 하나님이 사자, 곧 ‘가시’를 주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09.03.01. 인터넷설교 녹취       *원제목 : 하나님의 친구            ▣ 그리스도의 임재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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