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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중에 낳은 자녀

LNCK 2009. 4. 7. 01:09

 

◈고난 중에 낳은 자녀     룻1:14-22        09.03.15.설교 편집

   

◑나오미, 고난 중에 룻을 해산하다

 

▲본문 개요

룻기는 평범한 가정이 극심한 고난 가운데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보여주는 책으로서

요즘 같은 어려운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다.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임한 어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한 상황이다.

본토가 아닌 이방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당시 나이 든 여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앞이 캄캄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고향의 친족중 하나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데리고 있는 것이 당연한 권리였으나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부모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면하며

친절을 베풀고 있다.

 

이에 오르바는 고향에 남고,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와 같이 갈 것을 고백한다.

오늘은 이 말씀을 통해 <나오미의 믿음>을 보려고 한다.

 

▲며느리 룻의 신앙고백을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나오미가 역경 가운데서 어떻게 믿음을 지켰는지

성경 본문에 겉으로는 잘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빙산이 물위에 나와 있는 1/8을, 물 밑의 7/8이 지탱해주듯,

처음에는 나오미의 믿음이 잘 보이지 않지만

며느리 룻의 고백을 통해 볼 때, 그 시어머니의 믿음의 진수를 발견할 수 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1:16~17

 

룻이, 홀로 된 시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고향을 떠나

먼 이국 땅 베들레헴으로 가서 살겠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을 한 것을 보면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도리만이 아닌 그 무엇이 있음을 알게 된다.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을 좇겠다고 하는 것은

그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서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 모압에서, 어려움을 통과할 때 보여주었던 나오미의 인품을 보면서

그 인품을 지탱하는 신앙과 어려울 때 부르던 찬양을 들으며

롯은 자신의 운명을 그 신에게 걸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룻은 나오미를 통해서만 그 신앙을 배울 수 있었다.

1:17절에서 룻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

대강 믿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하나님 여호와를 직접 부르고 있다.

 

▲해산의 수고를 통해 며느리 룻을 양육하다

나오미의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며느리 룻이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녀를 축복하셨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서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루셨다.

 

이 모든 것은 어려움 중에서도

어머니 나오미가 굳건한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오미는 힘든 상황에 있었지만 이 때 보여준 믿음이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이 때 부른 찬양을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이다.

 

고난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거기에 숨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하는데,

나오미 가족이 겪은 고난은

믿음의 여인 룻을 해산하기 위한... 해산의 수고였다.

 

▲나오미의 신앙고백

나오미의 믿음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해 살펴보자.

13절,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고 하였고,

20절,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했다고 하였다.

21-22절, 본향 이웃들에게,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다고 고백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 같이 들릴 수 있으나

나오미는 주어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나오미의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빙하의 7/8과 같은 나오미의 신앙이다.

여기서 나오미는 팔자를 탓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님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다.

 

▲때로는 불협화음이 나올 때도 있지만... 전체를 보시라!

지금 내가 처한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전체 계획 가운데 있음을 붙잡아야 한다.

요셉도 보디발의 억울한 종살이와 감옥 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그의 삶에 개입하심을 고백하고 있다.

 

돌이 조각가의 손에 의해서 다루어질 때 몹시 아프지만

조각가가 어떤 분이신가를 안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심포니(교향곡)를 들을 때 가끔 불협화음이 나오더라도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아름다운 것으로 끝내려는 작곡가의 의도를 알기에

그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전체를 보고 계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롬12:2,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시는데

지금 내게 허락된 아픔도 전체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그 손길과 은혜 가운데 허락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겨나갈 수 있는 것이다.

 

 

◑고난 중에 탄생된 믿음의 거장, 욥

 

▲욥기는 고난이 아니라, 믿음에 관한 것

욥기가 거의 모든 부분에서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필립 얀시)가 내린 결론은

욥기가 전혀 고통에 관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난에 대한 세세한 부분들은 이야기의 구성 재료이지만

이 재료로 만들어진 이야기의 중심 주제는 고통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욥기는 믿음에 관한 것이며,

시험을 위해 큰 시련을 겪도록 선택된 한 사람의 이야기다.  <필립 얀시

 

 

◑고난 중에 유대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낳다

 

▲데살로니가 교회, 유대 교회의 고난을 본받다.

 

(데살로니가 교회) 형제들아 너희가 ...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살전2:14

 

위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았는데>

다름 아닌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고난 받는 교회>였다.

 

그렇게 본받은 결과, 데살로니가 교회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라고 증거 한다.

 

즉 데살로니가 교회가 고난을 이기는 교회가 된 것은,

앞서 유대 교회가, 고난을 이기는 본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에서 누구를 보고, 누구를 모델로 삼는가? 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요즘 말로 역할모델 Role Model을 누구로 삼는가에 따라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은

박해받았던 초대 교회들이나 피흘린 교회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대신

크고 유명한 교회, 인기 있는 사람들을 모델로 삼고

그들이 걸었던 길들을 따르려고 한다.

 

그러면, 문제는

진정한 영적인 자녀/제자는 절대로 생산되지 않는다.

왜냐면 극심한 십자가 고난의 길이 올 때, 다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갈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 역시,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다. ↙

여러분은 이것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주심으로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습니다. 벧전2:21

 

오늘 나는 어떻는가?

누구를 본으로, 역할모델로 삼고 쫓아가고 있는가?

내가 올바른 역할모델을 삼고 쫓아갔다면, 반드시 <고난 중에 낳은 자녀, 룻>을 낳게 된다.

예수 믿어서 무슨 세상 득만 보려고 하는데, 거기서 무슨 감동/십자가의 영광이 생기겠는가?

그 결과, 평생 교회에 다녀도, '영적 자녀/제자'를 한 사람도 낳을 수 없다.

 

 

▲고난 중에 나타나는 찬란한 영광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고난이 있지만, 영광도 있다.

초대교회가 당한 고난에는.. 괴로움도 있지만, 반드시 영광이 있다.

 

룻이, 쪽박 찬 것과 다름없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따르기로 한 것은

<고난 중의 영광>을 본 것이 틀림없다.

고난만 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고난만 본 오르바는, 나오미를 따르지 않았다.

 

 

◑이사야가 예언하는 ‘고난 중에 낳은 자녀’

 

▲그 때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  사49:21

 

이사야는 ‘고난의 종’을 노래/예언하는데,

그는 고난을 받아 자녀를 잃고, 사로잡히고, 유리방황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많은 자녀들이 생긴 것을, 놀라며 노래/예언하고 있다.

 

그렇다. 자기가 당하는 극심한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통해,

십자가의 영광이 드러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 자녀들이 탄생된다.

그 사실을 이사야가 노래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이 떠나지 않을 것이고, 

네 입에 둔 나의 말도 떠나지 않을 터인데,

①네 입에서와

②네 후손의 입에서와

③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사59:21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에 받으면,

그것은 내 입에서 뿐만 아니라,

내 후손의 입에서,

또한 후손의 후손, 즉 자녀 대대로 떠나지 않는다. (라고 예언하고 있다)

 

나오미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말씀/계시/영감/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룻이 그것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내 입에 하나님 말씀을 받으면,

내 자녀(제자) 세대에

또 그 자녀의 자녀 세대에 이르기까지

내가 받은 말씀이, 내 입에서 떠나지 않음은 물론이요,

그들의 입에서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영적인 후손/제자’가 생기는 법이다.

그들은, 내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그 똑같은 말씀을 전파할 것이다. 자손 대대로...

 

또한 이것이 중요한 것은, 

그래야 하나님의 영이, 그 백성들 가운데 떠나지 않고 머무시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그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머무신다....

(아래 성경 묵상을 묵상한 내용)

 

This is my covenant with them.

My Spirit will not leave them.

Neither will these words I have given you.

They will be on your lips

& on the lips of your children

& your children's children, forever. Isa. 59:21.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룻1:15~18                  출처보기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을 우리는 흔히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도

‘구원의 주 하나님’이라고도 부르고,

‘공의의 하나님’이라고도 부르며

‘사랑의 하나님’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룻기에서는

‘어머니의 하나님’이라고 나옵니다.      ←설교제목

룻은 나오미에게 "내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고백했던 것입니다.

오늘 그 부분을, 제/설교자의 간증 형식으로 여러분과 나누기 원합니다.

 

1968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만 31년전 2월, 구정이 가까웠던 어느 혹한의 겨울날

저는 더 이상 혼자 걷기 어려울 정도의 중병에 걸렸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사력을 다하여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서울 생활을 정리하여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병이 하도 심하여 제가 주일학교 교사 시절에

아직도 나이 어린 제자들도 매일 같이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일과처럼 저희 집에 달려와서 무릎을 조아리고 앉아서는 이렇게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김선생님은 장차 목사가 될 주의 종이오니,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도록 지금 데려가지 마시고 한 번 더 살려 주십시오."

그렇게 소리 모아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그들의 기도가 전혀 효력이 없기라도 하듯이

병의 차도는 전혀 없는 채, 천사와 목숨을 건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새벽 1시쯤이었습니다.

 

저는 그 날 따라 유난히 귀를 모으게 했던 한 음성인

가냘픈 어머니의 기도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라기보다는 차라리 통렬한 단장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아무런 질서도 없고 아무런 논리도 없이 마구 무질서한 애가 서려있는 탄식이요,

울부짖음이요, 절규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구 정리도 되지 않는 경상도 사투리를 그냥 내뱉으시면서

 

"하나님 아부지예, 이곤이 제발 살리주이소.

저게 그래 하도 목사가 되겠다고 그래싸서 신학교로 보냈는데

이제 신학교도 졸업하고 곧 주의 종이 될라고 카는데, 이게 왠 날벼락인교?

저 자식이 저렇게 죽을 병에 걸리서 저렇게 피를 토하고 있심더.

 

차라리 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를 저 이곤이 대신에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시고

저 이곤이만은 마 살려주시면 안되겠심미꺼?

저게 사내로 태어났는데 장개도 한번 못가보고 죽어가 되겠심미꺼?"

 

기도라는 게, 기도라는 게 말입니다.

그저 이렇게만 소박하고도 절박하게 문지방을 붙들고 두드리며

아들 살려달라고 때를 쓰는 울부짖음의 호소로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저 놈의 불효한 아들보다는

어머니 당신을 차라리 하늘나라로 데려가 달라시는 기도,

또 어느 멀쩡한 처녀 하나 신세 망쳐놓으시겠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래도 다 장성한 아들이 장가도 한번 못가보고 죽는 것이 안쓰러워서

장가라도 한번 가보고 죽게 해달라고 목메어 부르짖는 어머니의 저 단장의 호소.

 

실로 나는 기독교 교리가 가르쳐온 그 하나님이

바로 저 어머니의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도 무력하게 보이는

예전엔 미처 보지 못하였습니다.

 

실로 감히 나는 저 룻처럼 어머니의 하나님이야말로 참 하나님이며

그 어머니의 하나님이 제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이 평범한 진리를

비로소 여기서 바르게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치려는 핵심은 어머니의 사랑의 삶을 통하여 계시되고 있는 그 하나님,

민족이라고 하는 울타리를 넘고, 종교라고 하는 울타리도 넘으며

교리주의라고 하는 담도 넘는

오직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심볼인 어머니라고 하는 분,

 

진통하면서 우리를 낳아 주시고

자신의 온 진액을 다 짜서 우리를 길러주시는 그 어머니의 사랑의 속성과

그의 그 십자가의 사랑과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지시고 계시되시는 그 하나님만이,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 하나님만이 그 분 그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하는데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저 사랑의 화신이신 하나님,

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아니 그 자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비로소 참 하나님을 만납니다.

 

실로 룻의 이러한 신앙적 각성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종류의 관념적 신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 위대한 혁명적 깨달음이었습니다.

진실로 이 설교자 자신도 이 신앙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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