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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를 세운 무명의 성도들 1839

LNCK 2009. 4. 13. 13:20
 

◈안디옥 교회를 세운 무명의 성도들        행11:19~26        09.03.08.설교녹취



◑안디옥에 교회를 세웠던 - 용기 있는 성도들


▲교회 역사에 획을 그은 안디옥 교회의 출현

안디옥 교회는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이방교회다.

또 위대한 교회사의 영웅 사도바울을 배출한 걸출한 교회다.


또한 안디옥 교회는 최초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았다.

이런 이유에서, 안디옥 교회의 출현은, 교회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안디옥 교회의 출현은, 베드로의 고넬료 전도의 여파

이렇게 유명한 안디옥 교회가 시작하게 된 것은

앞서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과의 교제를 엄금하는 유대교의 관례를 깨고

용감하게 이방인 고넬료에게 전도하고, 세례를 베풀었고,


처음에 그런 그의 이방인 전도를 비난하던 유대인 성도들이

베드로의 설명을 차근히 들은 후에

결국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며

<이방인 선교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그러던 차에, 스데반의 순교가 일어났고,

그 일로 인해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흩어지게 되는데,

 

그 흩어진 성도들이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이방인에게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 사도가, 앞서 고넬료 전도를 통해, 이방인 전도가 합법적인 것임을

이미 길을 닦아 놓았기 때문이었다.  註1)


▲모든 성도가 용기 있는 것은 아니었고, 일부만 용기 있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행11:19  


그러나 안디옥에, 누구보다도 먼저 이르렀던 위 본문의 유대 크리스천들은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용기 있는 크리스천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혹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했다가

베드로처럼, 구설수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여튼 그들은, 안디옥에 피신 와서

자신들과 동일한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용기 있는 크리스천>들이 안디옥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먼저 온 크리스천과 달리

안디옥에서, 이방인/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행11:20

 

▲그렇다. 참 믿음은 다른 말로 <용기>다.

역사에 획을 긋는 안디옥 교회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은

이방인들에게도 용기/소신있게 복음을 전한 몇몇 성도들 때문이었으며

역사는 이렇게 '용기있는 크리스천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간다.

 

베드로도 용기 있게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아브라함도 용기있게 갈대아 우르를 떠났으며,

마리아도 용기있게, 성령의 잉태를 순종하며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외도 무수히 많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믿음의 역사는 <용기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데는, 반드시 용기(희생, 십자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가는 사람들은.. 글쎄올시다.

 


◑안디옥에 교회를 세웠던 - 무명의 성도들


▲누가 안디옥 교회를 세웠는지... 우리는 모른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의 큰 획을 긋는

그 중요한 안디옥 교회라면,

그 교회를 세운 설립자들의 이름이 반드시 기록되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의 이름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고,

그저 ‘몇 사람’ 이라고만 성경에 나와 있다. 행11:20

 

▲하나님의 상 주심을 믿는 사람은... 세상의 인정/칭찬에 크게 신경 안 쓴다.

안디옥 교회 설립자들이, 역사상 그토록 위대한 일을 이루고도,

전혀 자기 이름을 안 드러낸 것을 보면,

그들은 최후심판 때 주어질 오직 하나님의 상급만 바란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25장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성도에게도, 하나님의 셈account하심의 심판이 반드시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모든 자산들을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해/누구를 위해 사용했는지,

그 날이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 각자와 셈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셈하심은, 그 목적이.. 상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주님을 믿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도리어 상 받는 기회가 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6


▲그런데도 많은 성도들은, <최후 심판>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결국 참된 신앙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상 주심을 믿는 사람만

이 세상에서 살 동안에,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용기 있게 자신을 부인하는 성화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상 주신다는 이 사실을 믿지 못할 때는

어느 성도라도, 성화의 삶을 살기는 힘들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너무 현세적인 삶에 치우쳐 살면서

상 주시는 하나님/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아예 망각하며 살고 있다.

오직 현세적 부귀영화만 탐하며 살아가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삶은, 결국 성도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받을 상을 기대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뜻이 된다.


▲세상에서 상 받는 것을 주의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하나님의 상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상에 대해 12번이나 언급하셨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상에 대해 언급하실 때, 언제나 강조하시는 내용이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1~2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상을 세상의 상과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박수갈채를.. 하나님의 상으로 착각하지 말라신다.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상이 되지도 못할뿐더러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은, 인간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으로써

당사자에 대한 포상은 땅에서 이미 끝나버릴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상급이 주어질 리 없다.


▲인간의 박수갈채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순간의 공기의 진동(짝짝짝짝)에 지나지 않는다.

혹 인간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아보신 적이 있으신가?

그 감격이 얼마나 오래도록 지속되시던가?


박수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박수갈채의 크기만큼의 허무감이 엄습하지 않는가?

인간의 박수갈채는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도 없는 인간의 박수갈채를 탐하느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상을 상실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모르겠거니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


▲자신의 공적을 스스로 가린 안디옥 사람들

하나님의 상을 믿고 사모하는 사람은,

그래서 자신의 왼손이 하는 일을 자신의 오른 손이 모를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가린다.


세상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가리면 가릴수록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이 더 커짐을.. 그는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셈하심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상 주심을 믿는 사람만

이 세상에서 더욱 겸손한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을 위해 누구보다 더 헌신하면서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가릴 줄 아는 그 사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역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안디옥 교회를 세웠던 ‘그 몇 사람’이

왜 특별히 더 복된 사람인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 대신에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상을 받는 성도들이었다.


이처럼 그들은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안디옥 교회를 세우면서도

자신들을 전혀 드러내려 하지 않았기에

그들에 의해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명실상부한 주님의 몸된 교회로 쓰임 받았다.


만약 그들이 자기 공적을 드러내는 자기 공명심에 빠져있었던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에 의해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2천년 전에 있었던 ‘인간의 조직’으로 잠시 존재하다가

흔적도 없이 역사 속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 - 심판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보면, 곳곳에 최후의 <심판>을 전하고 있다.

일례로, 그가 벨릭스 총독에게 전한 복음도 '의와 절제와 심판'이었다.

그의 서신서 곳곳은,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심판을 빼 버린/망각해 버린 복음을 전하거나/들으면 안 된다.

기독교가 자꾸 현세적으로 치우치는 것은, '현실 생활에 유용한 복음'이라는 장점도 있지만

내세와 심판을 망각하는 복음이란 위험성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중략) 바울이 강론한 의, 절제, 심판  -클릭-

 

 

▲마치는 말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용기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늘 당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당신의 용기에 달려있다.

  

다음으로, 안디옥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지 않고 묵묵히 봉사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이에 반해 오늘날 우리들중 다수는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셈하심을 통한 하나님의 상주심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렇기에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인간들의 이름만 난무할 뿐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부족하다.

그렇게 인간의 이름만 난무하는 곳에서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려는 인간들로 인한 대립/분열/갈등/다툼만 있을 뿐이다.


노아의 홍수 이후 인간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세우기 위해.. 바벨탑을 건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결국 무위로 끝나고,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한다.


패역한 사울 왕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

패륜아 압살롬도, 자신의 이름을 과시하기 이해 기념비를 세웠다.

이 두 사람의 인생은 모두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다.


오늘날 너무 자기 기념비를 세우려 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셈하심을 통한 하나님이 상주심을 실감나게 믿지 못하니까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라도 받고 싶어 하는 심정인 것이다.

그렇게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 하는 중에,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지게 된다.

그 결과 그의 삶은 공허/무기력/무의미하게 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그래서 자기를 감출 줄 아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주여 도와주소서!

이렇게 할 때, 오늘 우리 공동체도,

자기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안디옥 교회처럼 될 것이다.




註1)

이렇게 유명한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성경은 이렇게 밝힌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행11:19

 

개역성경에는 접속사가 ‘그 때에’라고 나와 있지만,

그 헬라어 ‘맨후’를 그러므로/그 결과 라는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즉, 18절과 19절을 인과관계로 해석해야 한다. 그럼 18절을 보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11:18


18절은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과의 교제를 엄금하는 유대교의 관례를 깨고

용감하게 이방인에게 전도하고, 세례를 베풀었고,

처음에 그를 비난하던 유대인 성도들이

결국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며

<이방인 선교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그러던 차에, 스데반의 순교가 일어났고,

그 일로 인해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흩어졌는데,

그들이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곳의 이방인에게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 전도를 통해, 이미 길을 닦아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에’ (맨후 11:19) 라는 전치사를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뜻으로 해석할 때.. 그렇다.     ▣ 종말, 내세,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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