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0~2001 그 이전

장애우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다 1847

LNCK 2009. 4. 17. 15:42
LONG %EA%B8%80%EC%9D%98%20%EB%82%98%EB%A8%B8%EC%A7%80%20%EB%B6%80%EB%B6%84%EC%9D%84%20%EC%93%B0%EC%8B%9C%EB%A9%B4%20%EB%90%A9%EB%8B%88%EB%8B%A4. ARTICLE  

◈장애우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다         요9:1~7           설교 스크랩

                                                                                     *원제목:장애우를 귀히 여깁시다


◑1. 장애우를 돕는 일은.., 사실은 나를 돕는 일입니다.


헨리 나우웬의「아담」

헨리 나우웬이 장애우 공동체 ‘데이 브레이크’에서

아담 아네트 라는 태어날 때부터 육체적인 장애와 정서적 장애를 안고 있었던,

한 사람의 생애를 지켜보고 돌보고 섬기다가

그가 죽은 후에 그를 주제로 책을 하나 쓴 것이「아담」이라는 책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처음에 아담을 돌보기 위해서 이 곳에 왔지만

그러나 오히려 아담이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아담이 나에게 축복이 되었다. 나는 아담을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했다.


아담의 연약한 부분을 통해서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했고,

아담의 그 투병 과정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광야 생활을 볼 수 있었다.

아담의 그 말할 수 없는 고난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고난을 보았고,

아담의 죽음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소망을 발견했다.

아담은 아무것도 안 하고 거기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나를 가르쳤다.


그러면서 이 책의 서론에 밝히기를,

아담은 내 생애 최고의 스승이었고, 안내자였고, 그리고 나의 소중한 친구였다.

그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쳤고, 더 많은 것을 깨우쳐 주었다.

나는 그를 돌보러 왔지만, 그가 나를 변화 시켰다.

이러한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의 60페이지에 보면 이런 글이 있어요.

그의 진짜 선물은, 내가 그것을 환영할 때.. 비로소 나에게 선물이 될 수가 있었다.

아담을 돌보는 일이란

‘우리가 그를 돌볼 때, 그로 하여금 우리로 돌보도록 허락’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아담과 그를 돌보는 사람은

상호관계와 풍요로움 가운데 자라날 수가 있었다.


이 깨달음을 갖고 나서야 비로소 아담을 돌보는 일이

부담이 아니라 특권임을 알았다.

아담이 우리를 돌보게 함으로써

나는 우리(나)의 삶의 열매가 맺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이 책의 맨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아담이 죽고 나서 장례를 치루고 나서

저자는 책을 쓰면서 마지막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데이 브레이크(장애우 공동체)가 나의 안식처가 된 것은 바로 아담 때문이었다.

나의 팔로 아담을 붙들고 완전히 순수하고 자유롭게

그를 다가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내게 소속감을 주었다.

그는 육체적 존재라는 진실에 뿌리를 내리게 해주었고

공동체에 닻을 내리도록 해주었으며

함께 하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깊이 경험하게 해주었다.


아담과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 내가 어디에 서 있을지 모른다.

이 공동체에서의 첫 14개월 동안 아담을 씻기고 먹이고 옆에 있으면서

나는 그토록 갈망하던 안식처를 얻었다.


그것은 단순히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안식처가 아니라

나의 몸, 나의 공동체의 몸, 교회의 몸, 하나님의 몸 안에 있는 안식처였다.


나는 예수님의 삶에 대해 듣고 읽었지만

그 분에게 손을 대거나, 그 분을 볼 수 없었다.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리라.

아담에게 손을 댄 모든 사람들은 각각 어딘가가 온전해졌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축복된 경험이었다.


장애우 섬김은.. 동정심이 아니라, 내게 큰 축복이 됩니다.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그가 받을 수 있었던 풍성한 축복의 경험.

그들은 우리의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니어요.

동정심의 시각을 가지고는 장애우에게 다가설 수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축복이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그와 섬김을 통해서, 그가 내 생애 오히려 내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가 있다

는 사실을 갖고 접근할 때

장애우와의 교제는 더 풍성한 교제가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는 오히려 축복의 도구가 될 수가 있다고 그는 가르칩니다.


(너무 길면.. 아예 읽는 것을 전부 포기하기 때문에, 편집자 판단에 가장 중요한 내용만 위로 배치합니다.)

 

 


............................................ 더 읽으실 분 ............................................


예수님은 장애우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속의 발자취를 보면

그 분과 장애우의 접촉이 그의 생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장애우들은 삶의 소중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장애우를 보셨는가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우리는 몇 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2. 우리들의 신학적 문화적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편견 혹은 문화적인 편견을

먼저 극복하는 데서부터 우리 장애우 선교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9:2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길을 지나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9: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9:3


먼저 여기서 우리가 언어 그 자체를 조심해서 보실 필요가 있는데

예수님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일부러 ‘소경’ 이란 단어를 피해서 쓰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3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 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장애우에게 붙여진 그 타이틀,

그 편견의 타이틀을 우리가 먼저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람들이 장애우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깊은 편견은

먼저 언어 자체에 대한 여과 없는 전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는 사상적인 편견,

이데올로기의 편견, 우리 마음 속에 어떤 신학적인 편견이 있어요.

그 편견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매우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여기 예수님의 제자들도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면서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죄 때문이다.


자기 죄때문이거나 아니면 이 사람의 조상의 죄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모든 불행과 모든 질병의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원인이

죄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이 사람의 케이스에 있어서 특별히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이

이 사람의 특별한 죄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강경하게 부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사람의 원죄에서 왔다 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어요.

그것은 사실이예요.


그러나 이 사람의 날 때부터 소경된 케이스가

이 사람만의 혹은 이 사람의 조상만의 특별한 어떤 범죄 때문에 기인했다고

굳이 주장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3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9:3


특별히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 장애우의 문제에 관해서

구약적인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약성경만 보게 되면 상당히 인간의 불행이나 장애의 원인이

죄하고 관련시킬 수밖에 없다는 어떤 인상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참 많습니다.


특별히 레위기서, 신명기, 민수기 이런 데 보면

죄와 관련된 인간의 불행의 문제들이 많이 언급되어 있고

또 이런 사람들을 성경은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정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환자들을 동네 바깥으로 쫓아내는 그런 경우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것을 기록할 때 왜 그러한 기록이 필요했는가 라는 상황을

철저하게 면밀하게 연구해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 당시의 이런 상황이 특별히 200만 명에 가까운 수많은 집단이

집단으로 광야에서 이동하고 있었던 상황 속에서 이 교훈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먼저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장애를 발생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거할 목적이지

사실은 그 사람 자신을 제거할 목적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군집된 공동생활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

그것이 어떤 전염병으로 발전할 우려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일시적으로 격리하는 어떤 제도를 만든 것이지

사람 자체를 제거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으로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을 두면서도

그러나 이런 사람에 관한 편견을 구약성경이 여전히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균형 있게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레위기 19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19장9절 이하의 말씀은 광야 생활과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종의 사회정의의 규례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가나한 자들에 관해서 연약한 자들에 관해서, 장애우들에 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접근해야 하겠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주목할 만한 말씀들입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레19:9


추수를 할 때 반드시 넉넉하도록 추수의 이삭들을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기 위해서 항상 그것을 남겨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19:10


여기 하나님이 얼마나 가난한 사람, 또 나그네,

외국인은 자연히 편견 속에서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애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나그네, 장애우 이런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매우 균형 있게 연구하던 성경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의 이런 사람들에 관해 편애를 갖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슴이고 심정이예요. 11절 이하에서는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19:11


그 다음에 제가 정말 함께 주목하고 싶은 말씀은 사실은 14절입니다.

레위기 19장14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우리가 장애우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구약성경 안에서도 이미 밝혀 놓았습니다.

구약성경에 보였던 격리의 일시적인 현상은

그 죄를 초래하는 원인을 격리시키려는 하나님의 마음이지,

사람 그 자체를 격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장애우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을 넘어서야 됩니다.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편견을 넘어설 때

우리는 좀 더 자유롭게 당당하게 장애우 이웃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3. 장애우의 선교는 예수님의 선교의 본질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9: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 사람의 케이스는 자기들 자신의 어떤 죄와 관련된 것이라고 보기 보다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것이 하나님의 미션의 계획 속에 있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고 하십니다.


▶9:4절을 계속해서 읽어 보세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거기서 특별히 예수님이 ‘우리가’ 라는 복수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인 자신이 바로 이런 사람을 위해서 장애우를 위해서 오셨고

그의 치유를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선포하시고


또 9:5절에 보시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바로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주기 위해서 오셨다 라는 사실을

주께서 선포하십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예수님만의 사명이 아니라 이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더불어 함께 해야 할 일이란 것을

간접적으로 제자들에게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조상 탓입니까?

이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신학적 토론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런 신학적 토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이다. 선교의 본질이다. 선교의 사명이다

라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생애를 이런 관점에서 가장 자세하게 관찰 있었던 사람은

저는 누가 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이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인간의 신체를 관찰하는 일에 있어서

더 정확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생애의 미션을

어떤 점에서 관찰하고 있는지 몇 개의 중요한 구절들을 같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4장18절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선교의 시작의 부분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장애우를 돌보는 사역이 바로 주님의 사역에 매우 중요한 한 본질이었음을

그의 생애의 초창기에서 먼저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7:20절부터 보시면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침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요한에게 사람들이 물은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가 정말 메시야인가 아닌가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이 질문이 던져졌던 것입니다.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21


그 다음에 예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요한에게 가서 이렇게 대답하라고.

2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러니까 아직도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마 요한도 왔다 갔다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 했을 때, 예수께서 내가 메시야라는 증거가 있다.

그 증거가 나를 통해서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고 있다.

그의 바로 사역이 그가 메시야 되심을 증명한다 라는 사실로 답변하셨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실 속에서도 예수님의 메시야됨의 그 본질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치유사역 속에 있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 누가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시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어디 있는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대한 교훈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시면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다 16절에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청하였더니...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누가 초대되었느냐?

여러분, 이것은 그 당시 소위 유태인의 관념, 그 당시의 세계가 가지고 있었던

장애우에 대한 깊은 편견에 비추어서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아주 파격적이고 거의 혁명적인 교훈이었다고 생각을 해요. 21절을 보세요.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중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하나님 나라의 잔치의 게스트는 누구냐?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의 게스트다.

이것은 오랜 인류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들을 소외시키고 제외시키는 그 사회에

이것은 거의 혁명적인 말씀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장애우가 있었어요.

삶의 소중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선교의 본질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4. 장애우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네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장애우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도움이 되고자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판단한 내 방법으로 도움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도움이 될 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중에 더러 장애우 선교에 관심을 갖고 이런 일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본위입니다.

그런데 자기 본위의 관심을 베풀고 있는 한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도움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치유할 때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치유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여러 가지 유형의 병자들을 만나시는데

결코 예수님의 방법이 꼭 같지가 않아요. 다 달라요. 그 때 그 때마다 달라요.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방법으로 다가섰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만 하세요.

어떤 사람은 손을 얹어서 안수하세요.

어떤 사람에게는 명령을 하세요.

어떤 사람에게는 야단을 치세요. 다 달라요.

예수님의 방법은 달라요.


본문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한 번도 빛을 본 일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했습니까?

침을 뱉었다고 그랬는데 저는 이 번역이 참 싫어요. 침을 발랐다고 해야 합니다.

침을 바르시고 이것이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진흙을 발랐습니다.

그랬을 때 이 사람은 뭔가를 느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아! 내 눈에 무슨 일이 일어날 모양이다.

침을 바르시고 진흙을 바르시고 그 다음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보라.

그래서 뭔가 자기 눈에 발라지고 물이 자기 눈을 씻기 시작했을 때

거기서 그는 어떤 하나님의 구체적인 임재와 손길을 경험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 한 마디만 하면 고칠 수 있는 주님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꼭 필요한 방법으로 주님이 다가설 수가 있었다는 사실,

이것이 참 중요해요.


통합적 선교 방식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렇게 우리 주변의 장애우들을 접근할 때

그들을 우리 중의 한 사람으로 수용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장애우 선교에 있어서는 통합적 선교라고 말합니다.


즉 그들을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우리와 격리시켜놓고 도움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 되게 하는 일이예요.

그래서 같이(↔격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불어 나눕니다.


그런데 일부 한국 사회는, 장애우 시설을 어디다 지으려고 하면

혐오시설이라고 생각해서 나가서 뻔뻔하게 데모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어요.

그는 사람도 아닙니다.


장애우들이 느끼는 불편

어떤 장애우 문제 연구소를 보니까 장애우들이 제일 크게 느끼는 불편이 뭐냐 하면

세 가지 제일 큰 불편 가운데 육체적인 불편은 맨 마지막이예요.


①첫째 불편이 경제적 빈곤이예요.

장애우가 되면 동시에 경제적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돼요.

저는 정의로운 사회는 약자가 보호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우의 발생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예요. 상당히 사회적 책임이 커요.


우리 사회가 이런 산업재해를 발생시켜서 장애우가 생겼다면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돼요. 교회도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②두 번째가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소외감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된다는 소외감.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

그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중의 한 사람,

식구 중의 한 사람, 우리 지체 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


주님은 교회를 설명할 때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 부분의 지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지체 주에 약한 부분을 더 돌아보고 더 잘 입혀주지 아니 하느냐?

내 몸의 지체 중에 아픈 부분이 있으면, 온 몸이 관심을 갖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의 지체들 가운데 약한 사람들을 더 돌아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삶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

그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다가서서

그를 우리의 자연스러운 지체 중의 하나가 되게 하려는 노력,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가장 중요한 모본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③육체적 불편

(다 아시는 내용이니 설명 필요 없습니다.)



◑5. 장애우들의 영적 회복 돕기


장애우에게 가장 보여야할 가장 본질적인 관심입니다.

바로 장애우에게 영적 회복을 돕는 일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9장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치유를 받았어요.

그것은 육체적이 치료죠.

그러나 예수님이 육체적인 치료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요한복음 9장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35절부터 보겠어요.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내었다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사람들에게 쫓김을 받은 그 사람을 찾아가서 예수님이 물으셨어요.

네가 인자를 믿느냐 너를 치료해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내가 인자다.


내가 메시야다. 유대 민중이 기다려왔던 메시야.

사람의 모습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내가 바로 메시야다.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바로 그에게 보여주었어요.


그랬더니 38절에 이 사람이 드디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눈 뜬 것보다 더 커다란 기적이예요.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38절에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드디어 신앙의 고백이 이루어졌어요.


어떤 통계에 보면, 한국의 장애우들 가운데 크리스천은 5% 미만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약 20%인데

장애우 가운데 교회 다니는 사람은 5% 미만이라 말이죠. 못 나오고 있는 거예요.

부끄러워서 여러 가지 이유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책임이죠. 우리들이 그들에게 무엇보다 할 수 있는 일,

그들의 영의 눈이 뜰 수 있도록 그래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일

왜냐하면 더 무서운 장애, 인간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장애는 ‘영적인 장애’예요.


만약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가 있다면 예수님을 볼 수가 있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있다면

더 이상 이 사람은 장애우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장애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장애, 가장 무서운 장애는 영적인 장애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장애예요.


본문의 마지막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40절에 보시면

바리새 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라며 비꼬았습니다.


그때 예수님 말씀이 뭔 줄 아세요? 마지막 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

네가 더 소경이다. 네가 더 무서운 장애자다... 이런 지적이었습니다.

 

<설교 스크랩. 출처 너무 복잡해서 생략                                       ▣ 부활, 추수, 성탄, 성찬, 장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