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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머니라 1901

LNCK 2009. 5. 21. 14:06
 

◈네 어머니라                         요19:23~30                97.06.15. 설교스크랩, 정리  



◑작가 조연경 씨의 작품 중에 <효도별곡>이란 콩트가 있습니다.

 

서울에서 만두집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부는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만 되면 어김없이 만두가게에 나타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만두집 부부는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주 수요일 3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따로따로 만두집으로 들어선다든가,

식탁에 마주앉아 서로 쳐다보는 표정 등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개는 할아버지가 먼저 오는 편이었지만,

비나 눈이 온다거나 날씨가 궂은 날이면,

할머니가 먼저 와서 구석자리에 앉아 출입문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할아버지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만두를 시킨 뒤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먹을 생각도 않고,

마치 이별을 앞둔 젊은 연인들처럼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로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상대에게 황급히 만두를 권하다가

다시 눈이 마주치면,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하였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부지간 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만약 부부라면, 매번 만두집에 따로 나타날 리도 없고,

만날 때마다 그처럼 서로 애절하게 쳐다보다가 헤어질 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관계를

‘옛날 첫사랑’의 관계로 잠정 결론을 내렸습니다.

몸은 늙어도 사랑은 늙지 않는 법이기에

나이 들어 우연히 재회한 첫사랑의 연인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젊은 시절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의 아쉬움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그날따라 할머니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만두 하나를 집어 할머니에게 권했지만

할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따라 할머니는 눈물을 자주 닦으며 어깨를 들썩거리곤 했습니다.

한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만두 값을 치룬 할아버지는,

그날만큼은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만두집을 나섰습니다.


곧 쓰러질 듯이 휘청거리며 걷는 할머니를

어미 닭이 마치 병아리를 감싸듯 감싸 안고 가는 할아버지

―그 두 노인의 뒷모습이 왠지 가슴 아프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수요일도, 또 그 다음 수요일에도 두 노인은 영영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어느 수요일 정각 오후 3시에,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만두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부부는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얼굴은 예전과는 달리 몹시 초췌해 보였고,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부부를 향해 할아버지가 답례로 보인 웃음은

울음보다 더 슬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만두집 여자가 물었습니다. "할머니도 곧 오시겠지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습니다.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만두집 부부는 들고 있던 접시를 떨어뜨릴 만큼 놀랐습니다.

그리고 마치 독백하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의 사연을 듣고서는,

부부는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첫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어엿한 부부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수원에 있는 큰 아들의 집에서,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둘째 아들의 집에서 각각 떨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두 분의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식들이 싸운 결과였습니다.

큰 며느리가, 다 같은 며느리인데 자기 혼자만 시부모를 모두 모실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서는 바람에, 아들들이 공평하게 한 분씩을 모시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서울과 수원으로 생이별을 하게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주 수요일 세시만 되면 마치 견우직녀처럼 그 만두집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온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제 나만 죽으면 돼, 천국에서는 같이 살 수 있을거야."

 

◑효도란.. 부모님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 것

 

▶연로한 부모님을 생이별시켰던 그 자식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자식들에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피치 못할 절박한 사정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자식들이 부모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있었더라면,

부모로 인해 이 땅에 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었고,

부모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음에 대한 긍지가 있었다면,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하다못해 달동네 사글세방이라도 얻어 함께 기거토록 해 드릴지언정,

그 어느 때보다도 삶의 반려자가 필요한 노부모를 생이별시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가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십계명 중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공경하라’는 히브리어로 ‘무겁다’는 뜻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즉, 공경한다는 것은 ‘무게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신 부모님께는

우리가 도저히 흉내 내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경륜의 무게,

인식의 무게가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 무게를 인정하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무게를 인정하면 귀히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무게’란 ‘긍지’와 동의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 인생의 무게를 존중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요,

만약 이 긍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부모님의 무게를 인정하기는커녕

깃털보다 더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도란 함께 모시고 사느냐 아니냐, 용돈을 얼마나 드리느냐,

얼마나 호강을 시켜 드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참된 효도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에 대한 긍지 여부에 따라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벌써 15 년 전의 일입니다. 일본 홋가이도의 삿뽀로에서

돈을 많이 번 재일교포 한 분이,

형편이 어려운 재일교포 노인들을 위한 최신 시설의 양로원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지를 직접 답사했던 적이 있습니다.


과연 소문대로 양로원은 호텔과 같은 수준의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많은 노인들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영양사와 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재일교포 노인을 위해 지어진 그 양로원에 재일교포 노인은 막상 1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막상 시설 좋은 양로원에 재일교포 노인들이 들어가고 싶어 해도,

자식들이 혹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까 두려워 반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효자이어서 노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불효자라는 욕을 듣지 않기 위하여, 실제로는 전혀 효도를 하지 않으면서도

부모님을 단지 자기 집에 가두어 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낳아 주신 부모님이 단지 귀찮아서,

혹은 남의 손을 빌어 형식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양로원에 보내는 것은

물론 천륜을 어기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살아가는 자식이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부모님께서 노인들을 위해 특수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양로원에서

같은 또래의 노인들과 함께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시기에

양로원에 모셔다 드리고 정기적으로 찾아뵙는다면,

그것은 결코 불효가 아닙니다. 도리어 참된 효도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한 집에 모시고 살면서도

함께 사는 애완용 강아지만도 못하게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씻을 수 없는 불효입니다.

 

따라서 내 부모님의 재산이 얼마냐, 내 부모님이 얼마나 출세한 분이냐,

얼마나 배운 분이냐에 상관없이,

그 분의 자식으로 태어난 데 대한 긍지가 참된 효도의 필수조건이 됩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도 존중도 섬김도 오직 이 긍지로부터만 비롯되는 까닭입니다.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효자 예수님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19:26

 

예수님께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신 것은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을 일컫는 것으로 봅니다.

(보소서, 이제부터 요한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본문 26절에, 예수님의 모친 곁에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즉 사도요한이 서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7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렇게 26~27절 정황으로 볼 때,

‘아들을 예수님 자신이 아닌 요한으로 보는 해석’이 옳습니다.


제자 요한과 예수님은 친형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제자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자기 친 어머니처럼 모셔 줄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표준 새 번역 성경은 아예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어머니를 보시고,

또 그 곁에 자기가 사랑하는 제자가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자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19:26~27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운명의 순간까지도

그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으셨던

효도의 모범인 생을 사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 긍지를 가졌던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가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동정녀 처녀의 몸으로 당신을 잉태하고, 당신을 낳고, 당신을 키워 주었기에,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땅에 오시어 그리스도로서 구원 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다는,

어머니에 대해, 주님은 긍지를 갖고 사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 어머니에 대한 긍지/사랑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 한 마디로 인해,

처녀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으므로 마리아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겪어야만 했던

온갖 고초와 고난의 고통이 어쩌면 눈 녹듯 사라졌을 것입니다.


▶마치는 말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주셨던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찾으십시오.


비천한 달동네 나사렛 출신의 마리아가

단지 주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의 긍지가 되듯이,

우리의 부모님이 아무리 늙고 병들고 볼품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에 의해 우리 부모님이 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긍지가 될 충분한 자격을 이미 갖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해 이 긍지를 갖고 있는 한,

'설령 남에게 불효처럼 보이는 행동'도 그 본질은 실은 효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양로원에 모시는 일)


그러나 이 긍지를 갖지 못한 자식이라면,

그가 부모에게 행하는 것들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집에 가두는 일)

그것은 또 다른 불효의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 행복한 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