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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양’의 목자시니... 1848

LNCK 2009. 4. 17. 20:20


◈여호와는 ‘양’의 목자시니...                       시23:1-6           -09.03.27.설교스크랩, 축약-

                                                                                                           *원제목: 늑대와 이리의 목자


◑내가 양이 되지 않아서 그렇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지금 이 상태, 이 현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과 지혜로, 목자의 신분으로서

하여간 ‘나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허락하신 현실입니다.


내가 신실하게 주님을 섬길 때,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은

그 능력과 그 지혜와 모든 걸 동원해서 허락하신 현실이에요.


그런데 왜 나는 부족함이 느껴집니까?

내가 양이 아니라서 그런 것이에요.

내가 늑대요, 내가 이리요, 내가 곰이요, 내가 사자요... 그래서 불만이 많은 것입니다.


저는 이 시편 23편으로 기도를 할 때

이 점만 생각을 하면 너무너무 은혜가 되는 거예요.


그저 선교회문제가 있다고 느껴지고,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내 자식의 부족함이 느껴지고

집안에서 부족함이 느껴지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할 때마다

 

또 내 몸이 좀 불편하고 할 때마다

주변의 사람들 때문에 힘들 때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외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나는, 왜 나는 부족함을 느낄까요?

‘아, 목자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양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구나.’


그렇잖아요? 여러분.

어느 늑대가 어느 이리가.. 고작 ‘푸른 초장’으로 만족해 하겠습니까?

어느 사자와 어느 호랑이가.. 도대체 ‘푸른 초장’을 만족해하며

거기서 되새김질하며 놀고 있겠습니까?

오직 양만 ‘푸른 초장’에서 만족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셨어요.

그런데 내가 도무지 만족이 됩니다.

그러면 역설적으로 말하면, 내가 이 아니라, 사자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이 제 삶에 불만족을 생각할 때마다

‘아, 내가 지금 양이 아니라 이리거나 늑대이거나 사자거나

뭔가 다른 동물로 변해있구나. 내 마음이...’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신 이 ‘푸른 초장’이

‘푸른 초장’으로 느껴지지를 않고, 만족하지를 않는 거예요.


늑대는.. 푸른 초장에서 할 일이 없어요.

어떡하든지 지금 주어진 상황을 뛰쳐나가고 싶어만 합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하면서, 뛰쳐나가려고만 합니다. 늑대의 본성으로!

 

감사라는 게 있을 수가 없지요. 늑대가 푸른 초장에서 뭘로 감사를 해요?

늑대가 풀을 뜯어 먹고 감사를 하겠습니까?

늑대가 어떻게 거기서 살겠습니까? 못 살아요.

푸른 초장은 늑대에게 감옥이에요. 감옥. 말이 좋아 푸른 초장이지...


사람도 그래요. 사람이 푸른 초장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근사한 집을 지어놓아야 좋은 거지...


우리가 아직 ‘양’이 안 되어있는 거예요. 양이 안 되어있어요.


그리고 맨 날 우리는, 목자에게만 불만을 토로하는 거예요.

‘하나님, 주세요. 제발 주세요.’


뭘 안 줬다고 더 줘요?

목숨주고 생명주고 다 줬는데...

공기주고 물주고. 지금도 살려주고. 다 줬잖아요?


내가 양만 되기만 하면, 당장에 푸른 초장으로 변할 텐데.

맨 날 목자가, 줄 걸 안 줬대요.


그러니까 강청하래요.

그것도 맨 날 졸고 있는 목자니까, 주여 합창해서 깨우라는 거예요.

보좌를 흔들어야 된답니다.


아닙니다. 양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늑대의 마음에서 양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개념을 가지고 시편 23편으로 기도하면.. 은혜가 되요

그러니까 기도하기 어렵다, 어렵다, 하지 마시고

주기도문과 시편 23편을 이어서 기도 한번 해보세요.

기가 막혀요. 기가 막혀요.


오늘도 내게 자꾸 부족함이 있다면,

‘아, 주님 내가 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생각하시고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양이 될까요?


주님의 십자가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거예요.

주님 내가 원죄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지은 죄 때문에

내가 양이 번제로 드려져 불타죽는 것처럼... 자기가 죽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죽어야 할 것을.. 주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군요.

그런 생각으로 마치 상번제처럼, 매일 아침 기도를 드리는 거예요.

십자가를 보면서.

그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거예요.


머리에 가시면류관...

내가 이제는 머리를 쓰지 말아야지.

내가 내 마음대로 머리 쓴 것이 모두 죄였습니다.


손에 못 박혔어요.

내가 손으로 만진 모든 것, 자식이고/남편이고/아내고/사업이고

다 이게 죄악에 물드는 거예요. 내가 손대지 말아야지, 이제.


내가 발에 못 박혔어요.

내가 걸어 다니면서 했던 모든 일들

신발을 신고 걸어 다녔던 모든 일들,

앞으로 내 맘대로 다니지 말고

하나님이 띠 띠우시고 이끄시는 대로 가야지.


그 십자가를 묵상하며, 십자가를 계속 내 마음에 물붓듯 퍼붓습니다.

그렇게 붓다 보면, 내 마음이

마치 주조할 때 그 틀에 녹인 쇳물을 부으면 모양이 나오는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 모양이 형성되는 거예요, 비유로 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께 마음을 두고 계속 기도를 하다보면

내 마음이 마치 녹은 쇠처럼 되가지고

어린양 되시는 주님의 모습으로 내 마음이 바뀌어간다는 겁니다.

바뀌어간다는 거예요. 비유로 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진정으로 우리가 양이 될 수가 있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에다 마음을 부을 때 우리 마음이 양의 마음이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너끈히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가실 수 있는 양들로 바뀐다는 거예요.


진짜 여러분 이건 괜히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너무너무 부족함이 없어요.

주님의 십자가에 마음을 계속 부어요. 그러니까 같이 죽어요. 주님과 함께.


그러면 양으로 마음이 바뀌면서 부족함이 없어요.

부족함이 없는 게 신경질 나는 거예요. 이제.

‘아, 왜 이렇게 부족함이 없냐 말이야? 부족함이 좀 있어야지...’


왜 이렇게 부족함이 없을까요?

보세요. 머리도 빠지지요. 얼굴도 이젠 쭈글쭈글해지지요.

뭐 선교회는 요 하꼬방만한 데서 시작했는데 지금 3년째 접어들었는데

뭐 어디 딴 데로 갈 기미는 안 보이지요.

사람은 60개 좌석 놓고 있는데, 맨 날 그 모양 그 타령이죠.


아침마다 카메라만 보고 떠들고 있죠.

뭐 세상적으로 보면 이게 웃기는 장난이고, 정말 웃기는 짬뽕이지 이게 뭡니까?


그러나 어떻게 해요.

제 문제는 부족함이 없는 게 문제에요.

아, 신경질 나 죽겠어요. 부족함이 너무 없어서...


진시황보다 제가 나아요.

그 사람은 날마다 부족했어요. 그런데 저는 날마다 부족함이 없다 그러니까!


여러분, ‘목적이 이끄는 삶’도 주의해야 합니다.

‘목자가 이끄는 삶’을 도외시하고, ‘목적’만 추구하다가는

잘 못 되기 십상입니다.


어느 양이 자기 생애에 대한 목적의식을 갖고 사는 양이 있습니까?

양의 과제는 날다마 옆에 목자만 보는 거예요.

내 양으로서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의식하는 게 아니라.

목자만 보는 게, 양입니다. 목자가 어디로 이끌지 잘 몰라요.

날마다 그냥 따라가는 겁니다. 목적이 이끄는 게 아니에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 대한 <비전>도,

양이 갖는 게 아니에요. 목자가 갖는 거예요.


비전이 뭐예요? 본다는 거 아닙니까?

누구를 봐요?

양이 자기 인생의 비전을 향해서 목자를 고용해갖고 갑니까?

목자가 비전입니다.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는 얘기가 나와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현실은

일차적으로 목자의 현실이지, 양의 현실이 아니었어요.


양의 현실은 뭐게요?

여러분 양의 현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갔을 때 양의 현실은 뭐게요?

목자가 양의 현실이에요. 목자가.


예를 들면, 돈이 없습니다. 자식이 문제가 됩니다. 병이 났습니다.

난리가 났어요. 지금 온 나라 안에 경제가 문제라 그래요.

그러나 그게 내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내 현실은..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원수가 나를 둘러쳤어요.

그런데 원수가 보는 앞에서 상을 베풀어주시고, 기름을 부어주시고

큰 잔치가 벌어진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원수가 둘러쳐져있는 게 내 현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이 나라의 경제난,

이북이 미사일을 쏘고 어떠니까.. 기도해야 된다고.

이 모든 게 내 현실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님(목자)의 현실입니다.


내 현실은 오직 하나님(목자)뿐입니다.

그 목자는,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어주시는 것이에요.

그저 하나님 안으로 깊이깊이 더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마지막에 뭐라 그래요?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


아니에요. 우리는 이렇게 노래하기 좋아합니다.

‘튼튼한 가정에 내가 영원히 살리라.’

‘내가 80평, 90평 아파트에 영원히 살리라.’

‘내가 외제차 타고 다니면서 영원히 살리라.’


아니에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라.


역사의 주관자 되시고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일이지

왜 내가 나서서 쌩 난리를 치면서

왜 내가 늑대와 이리로 변해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까?   <설교 스크랩, 축약            ▣ 삶의 통찰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