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빠진 부흥 계3:14-22 09.03.22.설교 녹취
*원제목 : 신부의 회개
◑환란/혼란스러울 때 부흥이 일어난다.
▲가장 혼란했던 시기에 일어났던 한국의 평양대부흥 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의 당시 시대적 환경을 보면,
역사적/사회적/정치적/신앙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었다.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가 하면,
(1905년에는 러일전쟁도 있었다.)
1907년에는 ‘한.일 신협약’으로 행정권을 박탈한다.
이어서 1910년 한일합방(경술국치)을 통해,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당시 한국사회가 얼마나 정치/사회적으로 술렁거린 시기였는지, 잘 알 수 있다. -당시 상황 클릭-
그래서 당시 한국인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기였다.
어려움이 있으니까, 성도들은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게 된다. 무릎을 꿇게 된다.
바로 그 때,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평양대부흥이 한반도에 일어나게 된다.
▲가장 혼란했던 시기에 일어났던 미국의 부흥운동
‘미국에서도 가장 최근의 부흥이 언제였는가?’
교회 역사학자들이 살펴본 결과, 19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에 발생한
Jesus (People) Movement라는데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자료 클릭-
당시 미국사회는 매우 험난했다.
특히 1960년대 초에 발생한 히피 문화는, 미국 청년층을 강타했다.
정치적으로는 반전운동 등 데모가 많았다.
그런 정치/사회적 위기상황에서, 성도들이 너도 나도 기도하기 시작했고
이 운동을 통해서,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히피에서) 주께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그 때 예수님을 믿었던 수많은 영혼들이 1980년대~90년대에
미국의 주요 교회의 지도자들이 된다...
그 외에도 오늘날 현대크리스천음악ccm의 기원도, 바로 이 운동에서 기인한다.
그 현대음악ccm이 아니었다면, 아마 더 많은 청소년들을 마귀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한국도 2008년 후반부터 밀어닥친 경제 한파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마찬가지로 미국의 이민사회도, 비슷한 시기의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 때부터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교포들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하고 있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일수록,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게 되고,
기도할 때 항상 위대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래서 개인적으로나/공동체적으로나 닥치는 어려운 환경은
오히려 하나님이 허락해주시는 부흥의 기회가 된다고 믿는다.
▲부흥을 준비하려면, 첫 단추로 성도가 참다운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의 참다운 신부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항상 무너진 곳을 고치시려 할 때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대하7:14
여기서 중요한 첫걸음, 첫 단추는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하나님의 교회이다.
이 경제적/영적/사회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첫 단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이키고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흥의 바람, 회복의 바람을 주시려고 하실 때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다.
<성도들이 먼저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신부들이 주님의 신부로서 제대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오늘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권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너무 안타까운 말씀을 듣고 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3:16
구역질이 난다고 말씀하신다.
더 이상 이대로는 봐 줄 수 없어서, 토해 버리시겠다고 하신다.
여러분 교회는,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신부인데,
주님의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모욕적인 말씀을 들어야 했을까?
어찌된 모습이기에, 이러한 엄청난 예수님의 저주가 섞인 말씀을 들어야 했을까?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의 자원을 의존/자랑하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 없이도, 자신의 힘과 자원으로
스스로 충분히 설 수 있다고 말하는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3:17
사실 당시의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의 중심 은행이 그곳에 있었고,
무역의 중심지였고, 그곳에서 나는 자원은 안약으로 유명해서
온 세상의 안과질환자들은, 이 도시로 눈을 고치러 찾아오고 있었다.
라오디게아는 대도시였고, 부요한 도시였고, 알려진 도시였다.
그랬기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얼마나 부요한 교회였는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교만했던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이 보시는 시각은,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3:17
어떻게 된 것인가?
부요하고, 자족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지적하신다.
‘너희는 눈이 멀고, 벌거벗었고, 빈곤하고, 가련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시각 차이가 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그 교회 안에 주님이 안 계셨기 때문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계3:20
예수님이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not 안에)
즉, 주님이 아예 그 교회로부터 떠나계셨던 것이다.
모든 다른 것은 다 갖추었는데.. 결정적으로 주님이 그 안에 안 계셨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비극이었고,
오늘 현대 한국과 미국 교회의 비극이 아닌가!
모든 것을 다 갖추었는데.., 그 속에 결정적으로 주님의 임재가 사라져 버렸다.
신기한 것은, 예수님의 임재 없이도
교회의 프로그램들이 잘 돌아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임재 없이도, 교회의 여러 사역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찬양대도 마찬가지고, 설교 강단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임재는 없는데도, 아주 실력이 손색없는 찬양 합창이 울려퍼지는가 하면
설교의 언변도 얼마나 뛰어나는지, 사람들이 신나게 즐기면서 듣는다.
예수님은 문 밖에 서 계시는데,
문 안에 교회는 자기들끼리 잘 돌아가고 있다.
예수님 없이, 눈물 없이, 십자가 없이...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적용
▲현대교회의 비극은, 예수님 없이도 부흥하는 것이다.
미국 풀러신학교의 어느 신학교수가 한 말이다.
이것은 얼마나 엄청난 말인가?
(십자가 복음 없이 '긍정의 힘'만 계속 전해도, 미국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고
'값싼 구원'을 외치는 데도, 과거에 한국에 교회성장이 더 잘 되던 시절이 있었다.)
예수님 안 계시면 망해야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이 안 계신데도.. 잘 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라오디게아 교회가 스스로 자랑한 것은.. 잘 되고 있으니까.. 자랑한 것이다.
잘 되지도 않는데, 어떻게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얼핏 보면, 물질적 부요를 자랑한 것 같지만.
이어지는 예수님 말씀을 보면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물질적 부요를 포함해서, 영적인 부요함을 자랑한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놓고도
자기들끼리 영적으로 부요했고/자랑까지 했다는 것이다. 註↓)
▲예수님이 안 계시면 망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이 안 계신데도
부요하다/많이 모인다고 자랑하게 되었는가?
- 저 설교자는 ‘명성’ 때문이라고 본다.
저는 남가주사랑의교회를 섬기면서, 이런 위기를 한 두번 느끼는 것이 아니다.
눈물 없이, 기도 없이도 얼마든지 잘 돌아갈 수 있는
교회 인프라가 훌륭하게 구축되어 있다.
예수님의 임재 없이, 인터넷에서 여러 자료를 얻어다가
사역에 잘 이용할 수 있다. ‘잘’ 하는데, ‘임재’가 없다는 것이다.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랑이 아닌가?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치장하는 것인가? 드레스와 보석인가?
지금 신부된 우리가, 신랑은 잃어버리고,
액세서리/비본질에 너무 빠져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은가?
▲사도바울은 마지막으로 서신서를 쓰면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7
여러분, 바울이 지금, 자기 목회/사역이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한다.
믿음을 지켰다고 말한다.
몇 명을 전도했고, 몇 개를 개척했고, 몇 바퀴 돌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최후로 남길 말은 무엇인가?
‘달려갈 길을 몇 등으로 마쳤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놀라운 확장을 이루었다’가 아니다. 우리는 기업가가 아니다.
그런 것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최후의 유언 같은 말씀을 남길 때
‘성공’이 아니라, ‘충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성공'이 미덕이 되어버린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할 부분이다.
매년 신년계획으로 ‘확장’을 부르짖는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 봐야할 대목이다.
▲영국의 찬양인도자 마크 레드먼이 쓴 찬양으로 the heart of worship이란 곡이 있다.
‘예배의 마음’이란 찬양이다.
I'm coming back to the heart of worship 주님 제가 예배의 마음으로 돌아오겠습니다.
And it's all about you. (x2) 사실 모든 예배의 찬양 등은 주님에 관한 것인데
I'm sorry Lord for the things I have made 주님과 상관없이 부른 것 죄송합니다.
And it's all about you. (x2) 예배의 모든 것은, 주님이 중심이 되셔야 합니다. *찬양가사 -클릭-
찬양사역자 마크 레드먼이 목회하는 교회는, 찬양사역으로 너무 유명했는데,
언제부턴가 찬양이 점점 식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한 순간부터, 주님이 빠져버린 노래가 점점 되어버린 것이다.
찬양은 퍼포먼스처럼 되어갔다.
그는 ‘다음 1년 동안 무대에서 그런 찬양 안 하겠노라’ 선언하고, 1년을 쉬었다.
그리고 1년 후에, 모든 교회 앞에서 바로 위의 찬양을 써서 불렀다.
I'm sorry Lord for the things I have made 주님과 상관없이 부른 것 죄송합니다.
It's all about you. it's all about you 예배의 모든 것은, 주님이 중심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 말씀선포, 찬양, 교회 사역.. 이 모든 것이
주님 없이/기도 없이/눈물 없이
자기 힘으로 퍼포먼스처럼 행해 버렸다는 경고를,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셨다.
신부가, 신랑 없이도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은 지금 우리의 솔직한 모습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신부에게도 소망은 있다.
신랑께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계신다.
주께서 징계하시는 것도, 사랑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3:19
예수님은, 문밖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신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문을 두드리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그러면 무슨 말인가?
문만 열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향해 문을 활짝 열고, 다시 주님을 중심 자리에 모시면 된다.
▲예수님을 가리켜 ‘창조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신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계3:14
‘창조의 근본’이란... 그 주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망가진 우리 제단, 뒤틀린 내 삶/가정 ... 모든 것을 고치실 수 있다는 뜻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황이 아무리 험해도 ... ‘창조의 근본’되신 분께는, 아무 문제없다.
‘문을 열고 예수님을 환영하면..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라는 메시지를 주고 계신다.
▲오늘날 모두가 ‘어렵다’고 아우성인데,
왜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일까?
오늘날 주님이 피값으로 사신 교회와 성도에게, 환란이 주어졌다면
그 상황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주님의 교회가, 다시 한 번 신부의 모습을 회복하라는 싸인이다.
It's all about you... 교회/예배의 모든 것은, 주님이 중심이 되셔야 합니다.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새롭게 하라는 주님의 촉구이시다.
◑마감 예화 : 헬렌 로즈비어 선교사 이야기
헬렌 로즈비어 Helen Roseveare 은 1960년대에 위대한 선교사였다. (1925~생존)
그는 어렸을 때부터, 스코틀랜드의 엄격한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란다.
아버지는, 항상 헬렌에게 이런 교육을 주입시켰다.
‘네가 무엇을 결단하든지/행하든지, 항상 이 질문을 스스로 물어라!’
그것은 ‘Is this worthy? 이것은 가치있는 일인가?’ 라는 질문이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해, 내 삶을 바치는 것이, 내 열심을 드리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인가?’ .. 이런 질문이었다.
헬렌이 대학에 들어갈 때도 곰곰이 생각했다.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인가?’
그래서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단한다.
의대 공부를 다 마치고, ‘이제 의사가 되어 어떻게 가치 있게 살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 번 기도로 물었다.
그래서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된 일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아프리카 오지에 들어가서
자기 청춘을 그 곳에서 보내며
그 오지에 있는 아이들을 위하여 자기 청춘을 바치리라..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아프리카 콩고로 들어간다.
거기서 20년 동안,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1953~1973)
그곳에서 아프리카의 버려진 아이들을 위하여, 그는 청춘을 다 바친다.
1960년대는 아프리카에서 혁명이 많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1964년, 콩고도 식민지로 지배하던 벨기에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동안 쌓인 한을, 모든 유럽인 백인들에게 화풀이하기 시작했다.
선교본부에서는, 헬렌 선교사에게 빨리 철수하고, 피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다시 또 질문했다. ‘지금 피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인가? Is this worthy?’
'남아 있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다' 라고 판단되어, 피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폭도들에게 잡혀서, 5개월간 감금되어 끔찍한 폭행을 당했다.
어느 날 그 폭도의 두목은, 헬렌 선교사가 의료사역을 하면서 꼼꼼히 기록해 둔
모든 저널과 자료들을, 나무에 묶인 헬렌이 보는 앞에서
한 장씩 찢어서 불태워버렸다. 완전한 모욕이었다.
그 때 헬렌 선교사는, 자기 인생 처음으로 하나님께 반항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Is this worthy? 주님, 이것도 가치 있는 일인가요?’
자기가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콩고 오지로 들어와서, 이렇게 헌신을 다했건만
현지인들로부터 돌아오는 대가가.. 과연 이런 것인가?
‘주님, 지난 10년간 제 의료선교사역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이었습니까? (1953~1964)
제가 보기에는, 완전히 실패요, 헛수고 같습니다!
제가 선교사로 오지에서 이렇게 수고했는데, 주님이 주시는 대가가 이런 것입니까?
이런 폭행과 모욕... 이것도 가치 있는 것이라서 주님이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난생 처음으로 반항적인 기도를, 나무에 묶인 채로 폭행을 당하면서, 그가 드렸다고 한다.
그렇게 반항하며 질문할 때, 하나님께서 헬렌 선교사에게 명확한 내적 음성으로 대답해 주셨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너는 지금까지 내게 Is this worthy? 라고 물었는데, 이렇게 생각해보렴,
Am I worthy? 한 거니? (네 모든 수고와 헌신을, 내가 받기에 합당한 거니?)
그 때 헬렌 선교사는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다.
Yes, you are worthy! 예, 주님은 이 모든 헌신/수고/고난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주여, 제가 보기에는, 이 고난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지만,
그렇네요, 주님은 이 모든 고난을 다 받으시기에, 정말 worthy한 분이십니다.
주여, 제가 당하는 이 모든 수고/고난/아픔...
주님은 그 모든 것을 다 받으시기에 합당하신/지당하신/당연하신 분이십니다.
제 모든 고난은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it's all about you!
만 왕의 왕 주님께서 저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모욕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지금 제가 당하는 이 모든 고난은, 주님이 받으시기에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 제게 이러셔도 되는 겁니까?'에서 'You are worthy 당연합니다'로 바뀐 것이다.
(그렇게 감금 5개월 후, 그는 풀려나서 영국에 돌아갔다가, 약 1년 후인 1966년,
다시 콩고로 돌아와 무너진 병원을 재건하면서 총 20년간 콩고에서 사역하고 영국으로 돌아와
그 후에는 세계를 돌며 강연, 집필사역을 했으며, 어바나 선교대회에서도 몇 차례나 강의했다.)
헬렌 로즈비어 선교사 -자료보기 클릭-
註) 어느 형제님이 틈날 때마다 일부러 관심을 갖고 한국의 시골 교회를 방문해 봤는데,
30~80명 사이의 농어촌 교회들은 대부분, 주일예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 교회만 그렇겠지!’ 하다가
여러 교회가 거의 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렇구나!’로
자기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작은 농어촌 교회는, 별로 자랑할 것도 없고, 그래서 스스로 교만할 것도 없다.
그런 겸손한 교회에, 주님의 임재가 예배 시간에 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라서 그런지,
설교의 수준도 도시의 대형교회에 비교해 전혀 밀리지 않고, 대등하다고 한다.
‘설교를 잘 해서 많이 모이게 되었다’는 말은, 이제는 꼭 그런 것은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 교회론
'분류 없음 > 2009'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사장의 마음으로 (0) | 2009.04.27 |
---|---|
어려운 일 당할 때 (0) | 2009.04.27 |
성경은 믿을 만한가? 1858 (0) | 2009.04.24 |
천국과 지옥 1857 (0) | 2009.04.24 |
선으로 악을 이기라 1856 (0) | 2009.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