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일 당할 때 룻2:1~10 09.03.29.설교스크랩
◑양쪽 상황을 모두 섭리적으로 사용하신다.
▲전도자가 깨달은 삶의 통찰력
먼저 전도서 3:1~8의 말씀을 보자.
이 말씀을 보면, 모든 상황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고 있다.
한 쪽은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고/ 다른 한 쪽은 내가 거부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양쪽 상황을 모두 섭리/사용하셔서 나를 인도하신다>
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내 인간적 생각으로는,
태어나는 것은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고/ 죽는 것은 거부하고 싶은 것이다.
웃을 때, 춤출 때, 거둘 때는..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때이지만
울 때, 고통 할 때, 잃을 때는.. 내가 거부하고 싶은 때이다.
그러나 전도서 3 :11을 보자.
하나님이 모든 것(양쪽 모두)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3:11
인생 중에는 이럴 때가 있고/ 저럴 때가 있다.
행복한 때가 있고/ 불행할 때도 있다.
하나님은 좋은 때만 짓는 것이 아니라/ 불행한 때도 지으신다.
양쪽 모두를 지으시되, 전능하신 지혜로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신다.
그리고 그 모든 섭리의 목적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사람의 행복/성공/현세를 위해서가 아니다. ‘영원’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목적을 잘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3:11
▲본문으로 돌아와서, 룻2:1절에 보면, 고난 당한 나오미와 룻에게...
하나님의 인자가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룻과 나오미가 겪는 일들은
‘by chance’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와 주관 속에서 선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물론 사실이지만) 우리 인생의 그림은 전혀 달라진다.
모든 일들이 그저 우연하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단지 주저앉아 있어야 한다.
모압 땅에 갔다가, 최악의 고난을 겪고 돌아온 나오미에게 /냉탕,
하나님은 ‘기회’들을 점점 허락해 주시는 방향으로 섭리하고 계신다. /온탕
▲이렇게 온탕/냉탕을 섞어서 나오미와 룻을 인도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인생의 모든 ‘양 면’을 섭리하시고 그 분이 지휘하신다면,
어려움이 닥쳐오고, 원하지 않는 일이 내게 다가온다 해도.. 해석을 잘 해야 한다.
전3:11절에서 우리가 그 목적을 살펴 보았거니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탕/냉탕을 모두 주시는 이유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려는 구나’ 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시려 하는구나’
‘내 영성과 성품을 upgrade하는 기회’로 알고,
올바르게 인내로 견뎌 나가야 한다.
◑나오미와 룻의 인격적 회복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주시는 주님은, 이제 온탕을 주시기 시작하시는데...
그래서 룻기 2장부터는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의 가문을 슬슬 회복시키신다.
어떤 인격적 변화의 과정들을 통해
나오미와 룻이 회복되는지 살펴보자.
고통이 그들에게 허락된 섭리라면, 그들이 그것을 통해
어떤 인격적/하나님 형상의 회복이 일어났는지 살펴 볼 때,
두 가지를 보고 싶은데.., 그것은 바로 Humility와 kindness이다.
▲1. Humility : 이것은 낮아짐이다.
낮아짐을 통해서 어떤 고난의 상황도 go through/ 견디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룻은 어머니 나오미에게 가서 이삭을 줍겠다고 말한다.
룻기에는 ‘줍다’라는 단어가 12번이나 나온다.
룻기는 이 단어를 강조하는데, 뭘 줍기 위해서는, 허리를 숙이며 낮아져야 한다.
그런 육체적 낮아짐은 물론이요,
남의 밭에 들어가서 날품팔이를 하는 것은 ‘신분적으로 낮아짐’이다.
그들은 보리 추수할 때에 돌아왔다. 1 :22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 때에 줍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은, 우연으로 볼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섭리로 보고 싶다.
하나님이 나오미와 룻에게 주신, 일종의 연단이요, 일종의 살길이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레19 :9~10을 보자.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이미 사회복지제도welfare를 준비하신 것이다.
‘너희들은 추수 때에 모퉁이는 추수하지 말라. 그리고 떨어진 것을 줍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들과
심지어는 야생동물이 먹게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어려움에 처하면, 낮아져야 한다.
나오미와 룻은 이 말씀을 믿고 나아갔다.
과부인 그들이 땅에 있는 것을 줍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그들의 낮아짐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가난함을 공개하며, 모퉁이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자신들을 낮추는 모습이다.
그들은 자기 체면을 보호protect하지 않았다.
체면을 생각했다면,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은,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낮아지라는 것이다.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없으면서 있는 체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규모를 축소 downsizing하면서 낮아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쓰신다.
룻기는 사사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때는 자신들의 소견으로 살았던 때였다.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잘 살 수 있다고 믿던 시대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화되고 깨끗한 가문을 세우고 있다.
처음에 그들은 낮아지는 가문이었고
어려울 때에 겸손히 그 어려움을 받아들일 줄 아는 가문이었다.
그러니 나중에는 그 가문을 통해서 다윗 왕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많이 교만해지고/ 높아진 것 같다.
한국에서 말씀을 전할 때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부흥하는 교회처럼 보였고, 잘 나가는 교회인 듯 했다.
그러나 주님은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셨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가 되었다.
그저 기술만 있는 교회가 되었고, 기도와 눈물 흘림이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우리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고 낮아지며
낮아질 때는 낮아질 줄/ let go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control 할 수 없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낮아짐을 통해서, 우리가 이 사실을 알기 바라는 것이다.
수치와 겸손을 통해 고침 받은 나아만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
엘리사는, 나와서 영접하지도 않고, 요단강에서 7번 목욕하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장군이 갑옷을 벗는다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옷은 감투였고, 지위의 상징이었다. 인간이 옷을 벗으면 모두 똑같아진다.
그가 옷을 벗으니 참으로 누추한 모습이었고
자기의 썩어가는 살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7번이나 그렇게 하였다.
미국 이민 초기를 보시라. 하나님은 수치와 겸비와 겸손을 통해서 우리를 고치신다.
그 때 우리는 얼마나 겸손했던가?
미국에 와서, 한국의 잘 나갔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했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붙잡고 믿음의 야성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와 영성 위에 이민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대단히 어려워졌다. 우리 함께 낮아지고 let go할 것을 let go하자.
본질적 essential하지 않은, 거추장스런 것accessary들을 모두 내려놓고
겸비한 자세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될 것이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5:5
우리가 나오미와 룻과 같이 이삭을 줒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보아스’를 만나게 하실 것이다.
이 어려움을 겸손humility의 자세로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인자함을 얻게 됨
겸손함을 통해서, 룻과 나오미는, 보아스로부터 인자함을 얻게 된다.
룻기의 인자함(헤세드)는 2가지 방향에서 소개되고 있다.
받은 인자함/ 주는 인자함이다.
룻과 나오미는 ‘받는 인자함’으로 소개되고 있고,
보아스는 ‘주는 인자함’을 소개하고 있다.
룻기 서두에, 룻기가 지금 경제 한파를 맞이한 우리에게 ‘지침서가 된다’고 말했는데,
그 지침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고난을 당한 룻과 나오미는.. 겸손히 낮아져야 하고
인자를 베풀 수 있는 보아스는.. 바로 이 때 인자를 베풀어야 한다.
그 때 예수님 조상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구속사가 그들을 통해 오늘 이 시대에도 계속 이루어져 나가게 된다.
보아스는 부자였고 매우 인자한 사람이었다.
그가 일꾼들에게 인사하는 것과, 일꾼들이 보아스에게 인사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의 인격과 인품을 추측할 수 있다.
보아스는 새로 온 소녀인 룻을 보게 된다. 보아스는 룻을 소개 받은 후에
‘딸아 마음껏 주워 가라’라고 한다.
그리고 일꾼들에게 그 소녀를 보호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대다수의 밭주인들은 흘린 것까지 다 가지고 가려고 애쓰지만
보아스는 흘린 곡식을 마음껏 가지고 가리고 허락한 뒤에
그녀를 보호하기까지 하였다. 보아스는 인자 loving kindness가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중에는 낮아져야 할 사람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낮아질 때에 은혜를 주시고,
은혜 받은 사람을 통해서 또 다시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보아스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다시 흐른다.
이렇게 은혜가 계속 흐르는 가운데 우리의 어려움은 극복될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베풀어 줄 사람이 있는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마치는 말
하나님께서는 어려움 속에서 한 가문을 어떻게 빚어가시며
어떻게 깨끗하게 하시는지를 보여주신다.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만들어 가시는지를
보여 주신다.
그것은 두 가지이다. 바로 Humility(낮아짐)와 Kindness(베푸는 인자함, 헤세드)이다.
요사이 나는 이런 기도를 한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베풀 수 있는 교인들이 많으니
받은 은혜를 지속적으로 드리고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한다.
(고용주는 어려운 시기라고 함부로 해고하지 말고, 이런 때일수록 품어주어야 한다.)
지금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그들의 은혜가 끊어지지 않고 지속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힘들어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나눔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마감 예화, 미국에 소아마비가 전국적으로 발병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때에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힘든 때였다.
당시에 소아마비를 고칠 수 있는 의료기술은 이미 개발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자원이었다.
그래서 국민 건강을 책임지고 있던 장관이
몇몇 기업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요청하였고, 이 기부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필요한 금액에는 많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그는 모든 국민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March of Dime’이라는 걷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10센트 행진
누구든지 1마일을 걷고, dime(10센트)을 기부하자는 운동이었다.
수많은 아이들을 비롯한 온 국민이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에 어려워 보였던 소아마비는 멋지게 극복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story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많은 것을 줄 수 없고, 단지 조금씩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의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도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