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 눅16:19-31 설교스크랩, 정리,
▲내세신앙/타계신앙이 없습니다.
과거에,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의 그릇된 신앙을 비판하는 단골메뉴가 두 가지인데,
성도들의 신앙이 지나치게 <기복적>이고 <타계적>이다는 것입니다.
기복적이란.. 지나치게 현실적인 축복,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만 매달린다는 것이고,
타계적이란.. 현실 세상에 관심이 없고 너무 천당 생각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판은, ‘기복적이다’는 맞지만, ‘타계적이다’는 지적은 지금은 틀렸다고 봅니다.
지금은 절대 타계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현실적입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기복신앙에 빠진 이유,
즉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히려 반대로 타계신앙/내세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말 내세가 있다고 참으로 믿는다면, 영원한 나라가 있다고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뭐 조금 잘 사는 것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렇게 치사하게 매달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내세 신앙/타계신앙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한국인들이 내세나 천국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는 이유가 2가지라고 봅니다.
①지금 우리 사회의 가치체계가 지나치게 물질주의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먹고사는 것이 중요하지 내세는 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여기에서 오늘 내 직장이 중요하고, 내 목구멍이 중요하고...
누가 우리 주변에서 세상을 떠나갔다 해도
그 분의 영원한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 ... 별 관심이 없어요,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조차도 그렇습니다.
가족 중이나 이웃 사람들 중에 누가 죽었다고 할 때,
그러면 별로 심각 하게 생각하지 않고, 냉담하게 생각하고
‘그 분이 남긴 유산이 얼마며, 누구에게 분배되었나?’ 이런 데만 관심 가집니다.
다른 사람이 천국에 가든/지옥에 가든 별로 관심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냉혹한 사회의 조류를 대표하는 조크가 수년 전에 유행했던 말 중에
‘내가 죽으면 국보 손실이고, 당신이 죽으면 환경정리’라는 말이 있죠?
무서운 얘기입니다.
그렇게 물질주의적으로 가치가 세속화된 그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②이러한 시류에 편승한 교회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대부분의 설교도 이 땅에서의 축복... 거기에 다 집중이 되어있고,
별로 내세에 대한 설교, 천당/지옥에 대한 설교를 들어 보기 어렵습니다.
따라 서 교인들조차도 이 내세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달 끝난 갤럽 조사 보고서에서 보면, (10년 전쯤 설교로 여겨짐)
‘목사님들이 어떤 설교를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 하면서
교인들이 희망하는 설교의 주제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 답으로서 ‘내세에 대한 설교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구원과 영생을 포함한 내세에 설교를 듣고 싶다’고 응답한 교인들은 1.5% 예요.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된 이유가, ‘값싼 구원’에 있다고 봅니다.
이신칭의 구원론의 극단적 강조로, 성도들은 자기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으니까
즉, 천국영생 기차표 탔으니까, 그 문제는 일단 접어놓고 사는 것이지요.
예수 믿으면 구원 받았지만, 구원을 이루어 가야한다는 신학이 없습니다.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만 강조로, 전통적 ‘순례자의 길 신앙’도 다 소멸되었습니다.
무서운 미혹입니다. 편집자 주)
▲성경은 내세를 가르칩니다. 그것을 심각한 진리로 가르칩니다.
그것은 우리가 피해가서는 결코 안 되는, 피할 수도 없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의 상태는 죽을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에요.
죽을 때 결정하면 이미 늦습니다. 지금 결정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지금 내가 날마다 구원에 합당하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고 있느냐
그것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미국 신학자는
‘날마다의 삶이,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라고 못 박아 말합니다.
▲눅16:9절에 난해한 구절이 나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불의한 재물)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이 구절 속에 나타난 이 단어를 보세요.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삶을 사느냐/못사느냐에 따라서
나의 영원한 처소. 다시 말 하면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이렇게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세의 커튼을 조금 열어서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원을 보내게 될 장소. 이 세상의 짧은 시간이 끝났을 때
우리가 영원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 그 영원한 상태는 어떤 곳일 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바로 오늘 본문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주님은
그 영원한 세계의 커튼을 조금 열고, 그 세계가 어떤 곳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영원한 세계 어떤 곳일까요?
▲1. 그곳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즉시로 가는 곳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본문을 가리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에는 ‘비유’라는 얘기가 없어요.
어쩌면 이것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실제 케이스를 예수님은 아셨기에/보셨기에,
얘기 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있었다고 저는 봐요.
그런 가능성이 높은 것은, 부자는 이름이 안 나와 있지만
주인공인 거지는 이름이 ‘나사로’로 밝혀져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시는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이, 직접 목격하신 사건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22절에 보시면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죽었습니다.
보통 죽었다고 말하면 기독교의 가장 단순한 설명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육체는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영혼은 어떻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저 상공을 계속 떠도는 것으로,
구천(구만리 장천)을 우리의 영혼이 떠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것은 샤머니즘적 생각이지, 성경적 개념은 아닙니다.
▲이렇게 (낙원)천국에 올라간 영혼은, 예수의 재림/부활 때까지 거기에 있다가
계21:2절에 보면,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에 있던 ‘성도들이’
(부활 때 공중에서 부활체를 입은 다음에) 땅으로 내려오는 ‘상징적 표현’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 ‘새 예루살렘 성’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1:2
했는데, 신부란 곧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 성=성도’입니다.
그 ‘새 예루살렘 성’안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이는 주 하나님 곤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그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21:22
(하나님과 예수님도 '성전'으로 상징화 되어 있으므로, 성도는 ‘성’으로 봄이 타당합니다.)
이것은 ‘성전’이신 하나님이, ‘성’인 성도들 가운데 영원히 거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21:3참조
21:24, (그 성에)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 만국은 열방이 구원받음을 의미하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 땅의 왕들은, 왕 같은 성도 가리킵니다.
‘새 예루살렘 성’이 ‘성도’들을 가리키는 직접적인 구절이 바로 이것입니다.
‘건물’로 보는 문자적 견해는... 일단 뒤로 미뤄놔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천국에는 건물이 있습니다.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21:9~10 (신부=성도=새 예루살렘 성) *이 단락 삽입
▲2. 의식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 중에 일부는, ‘죽으면 끝이다’고 생각하고,
무덤에서 영원히 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면 하소서!’ 라는 말을 쓰는데, ‘영원히 수면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죽은 다음에 우리 영혼은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단지 부활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다시 살아나지마는
그러나 내가 죽는 그 순간 모든 것은 다 없어진다. 영혼도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없어진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이 그 사실은 생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부자의 영혼이 살아있고, 그 의식도 멀쩡했습니다. 잠 잔 것도 아니었습니다.
육체만 없다는 것이지, 고통도 느끼는 등... 사후세계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악몽에 시달린 기억이 있습니까? 너무너무 괴로워서 소리치고 싶은 악몽,
악몽을 꾸고 일어나서 한숨을 쉬는 경우가 있습니다.
깨었으니 망정이지 깨이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분, 깨어나지 않는 악몽을 생각해 보세요. 깨어나지 않는 고통의 악몽,
영원히 지속되는 고통스런 악몽,
쉽게 말하면 그것이 지옥입니다. 기억이 살아있는 곳이에요.
의식이 폐기되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3. 영원한 세계는 두개의 대조적인 장소(천국과 지옥)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부자가 간 ‘음부’나 나사로가 간 ‘낙원’은
아직 ‘불못’이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지 않았으므로
완전한 지옥과 천국이 아닙니다.
그러나 완전한 지옥이나 천국과 큰 차이가 없으므로 크게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치장이나 교도소나 그게 그거인거죠.
지옥을 한마디로 말하면,
본문에서 두 가지의 단어가 거듭 나옵니다. - ‘고통’과 ‘고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에 막 가슴이 아프고 괴롭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고통과 고민이 끝나니까 우리가 생존이 가능하죠.
끝나지 않는 고민. 끝나지 않는 고통. 상상해 보세요.
그래서 28절에,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 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한 번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어느 날 우리도 천국에서, 나사로처럼 지옥을 보게 될 때,
아마 이 소리를 토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우리 자녀/친척들이 저 고통 받는 곳에 가지 않게 하소서!’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아니,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그런 곳으로 보낼 수가 있습니까?’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아무도 보내지 않습니다.
보내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가야 합니까?
마25:41절에 보면, 본래 지옥은, 마귀와 그의 졸개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에요.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 마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탄을 자기의 주인으로 알고,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선택해서 그를 추종하다 보니,
마귀가 가있는 곳에, 마지막에 자기도 따라가 있는 것이에요. 그것이 지옥입니다.
반대로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천국은 영원한 위로와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
계시록 21장에 보시면, 천국의 커튼을 하나님이 조금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천국에 막 도달하자마자, 거기에 우리의 발걸음이 막 도달하자마자,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마자
즉각적으로 경험할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하나님 이 저희들과 함께 계셔서 저희의 모 든 눈물을 씻기시매 21:4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자마자 경험하게 될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달려 나와 나를 안아주십니다.
‘내가 알아. 네가 세 상에 있는 동안 얼마나 아파하고 슬퍼했는지를 알아.’
그리고 주께서 내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
이어서 천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다시는 아픔이 없고 다시는 애곡함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 없는 곳이다. 21:4
▲4. 영원한 세계는 서로 왕래가 불가능한 곳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서로 왕래가 불가능합니다. 지옥 에서 천국으로 갈 수가 없고요.
천국 간 사람이 지옥으로 갈 수도 없어요.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가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16:26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해서.. 지옥 간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 아니에요.
뭐 그런 것 가르치는 종교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가 중요합니다. 이 순간이 중요해요.
이 순간 우리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에요.
그것이 내 영원한 상태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이 죽는 그 순간 일어나는 다음 사건을 볼 수가 있어요.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 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 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16:22
죽는 순간 누가 임했습니까? 천사들이 와서 그의 영혼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천국(낙원과 그거나 그거나 같습니다)으로 올려갑니다.
천사들은 우리 영혼의 가이드입니다.
이세 상에 살 때도 하나님이 그를 보내서 그를 인도하셨다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가는 바로 그 순간, 그 영혼을 영원한 상태로 옮겨가 주십니다.
부자는 ‘부자인 게 죄라서’ 지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이 부자의 일생 속에는 회개가 없었습니다.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 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눅16:30
이 부자는, 지옥에 가서야 뒤늦게 비로소 회개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젊은 형제하나가 저에게 찾아와서 전도지를 하나 가져왔어요.
전도지의 전면의 제목이 뭐냐면
"당신이 지옥에 가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음표예요.
그리고 아무 것도 없어요.
뒤를 넘겨보니까
"당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게 대답이에요.
가만히 있으면 간다는 말이에요. 가만히 있으면.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은 지옥이에요.
내가 방향을 전환(회개라는 말의 뜻)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 그 곳은 지옥밖에 없어요.
그리고 회개와 함께 강조되어야 할 한 가지는 ‘믿음’입니다.
나사로가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 간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사로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증거가 뭐냐?
그의 이름이 그것을 증거 합니다.
‘나사로’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 확률이 더 적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건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부유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부를 믿을 가능성이 있어요.
자기 재력/재산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아요.
저는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갈 확률은 더 많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그는 주 앞에 달려 와 주를 의지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믿을 곳 없어요. 제가 의지할 곳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을 믿어요. 당신이 나의 구원의 하나님인 것을 내가 믿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부자는 세상에서 당당히 살았겠지만
부자의 이름조차 성경에 나와 있지 않아요.
부자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명함을 가지고 다녔을까요?
반대로 세상에 살 때, 아무도 나사로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나사로.. 나의 사랑하는 아들.
그의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녀의 이름 모르는 부모는 없잖아요?
하나님은 나사로의 이름은 알아주셨지만, 부자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으셨습니다... ▣ 종말, 내세,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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