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자아 롬8:13 09.04.05.설교스크랩
『이미 손에 쥐고 있는 진짜 행복』The Lost Virtue of Happines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너도 나도 ‘기분 좋게 즐기며 살자’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한 사전은 ‘행복’을.. ‘기분 좋은 만족감’으로 정의 했습니다.
‘행복’을 감정, 특히 ‘쾌락에 매우 가까운 감정’과 동일시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기분 좋은 삶’을.. ‘좋은 삶’으로 여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추구하고
자녀들에게도 권하는 삶이, 바로 그런 느낌/감정적인 삶입니다.
중학교 2학년인 우리 딸네 축구팀이, 무참히 깨지고 있는 가운데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하프 타임 때, 감독이 말했습니다.
“얘들아, 점수는 신경 쓰지 마. 축구를 왜 하니? 재미를 위해서야.
그러니까 마음껏 즐기렴.
그리고 승패에 상관없이 즐거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가는 거야. 알겠니?”
감독의 말은 ‘기분 좋은 만족감’이 인생의 목표라는
우리 시대의 모토를 그대로 풀어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와 아내가 딸에게 축구를 시킨 것은
‘이기고 지는 법, 협력의 미덕, 장기적인 목표를 위해 눈앞의 만족을 포기하는 태도
등을 배우라’는 뜻에서였습니다.
감독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보다 더 서글픈 사실은
부모들 가운데 누구도,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불만족을 조장하는 소비문화
그렇다면 ‘행복을 기분 좋은 만족감이나 재미로 이해하는 시각’에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보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재미없는 것보다야 재미있는 게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문제도 보통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소비문화 속에서 광고 업체들은, 끊임없이 우리 안에 불만족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그래야 행복과 만족을 회복하기 위해 상품을 사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화는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끝없이 쾌락만 추구하려는 욕구를 일으킵니다.
그로 인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지독한 압박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절제력과 희생처럼 얻기 힘든 미덕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사방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행복=‘기분 좋은 만족감’=자기 밖에 모르는, 개인적 이기주의로 빠집니다.
‘기분 좋은 만족감’은.. ‘전통적인 정의의 행복’보다 너무나 다르고, 훨씬 못합니다.
‘기분 좋은 만족감’이란 정의를 따라가면.. 결코 ‘진짜 행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해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알 것입니다.
‘기분 좋은 만족감’은 평생의 목표로 삼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그것은 원래 행복을 좇는 과정에서 얻는 부산물일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행복’이 재미나 즐거운 만족 같은 내적 감정이며, 그것이 주된 목표라면
종일 무엇에 초점을 두며 살겠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두게 되며,
그 결과 ‘자기 이익보다 큰 명분을 추구하지 않는, 이기적인 문화’가 탄생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으로만 보게 됩니다.
가정과 일,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합니다.
온 세상이 자신의 내적 쾌락 곧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
▲그렇게 살면, ‘신앙적/인격적 성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공허한 자아’가 가진 가치 체계와 동기, 그리고 생각과 감정과 행동의 습관들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음은 지적, 영적 발전을 저해하는 ‘공허한 자아의 4가지 특징’입니다.
‘기분 좋은 만족감’을 행복으로 여기고, 그것을 주요 장기 목표로 삼았을 때
이런 특징이 나타납니다.
주위 사람들, 어쩌면 우리 자신에게서, 이런 특징이 발견될 수도 있습니다.
곧 알게 되겠지만, 이런 특징들은 이만저만 해로운 게 아닙니다.
◑1. 공허한 자아의 (역기능적) 특징
▲1. 공허한 자아는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입니다.
몇 년 전, 6학년이었던 우리 딸의 D.A.R.E (마약 중독자 갱생협회) 프로그램
(아이들이 마약을 복용하지 않도록 돕는 공립학교 프로그램) 졸업식을 위해
다른 부모들과 함께 한 초등학교에 모였습니다.
곧 6학년 아이들 5명이, 마약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들을 쓴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들은 하나같이, 한 가지 이유에 나름대로 살을 붙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 한 가지 이유란 바로 ‘이기주의’였습니다.
이를테면 자기 건강을 지키거나, 의사나 운동선수가 되거나, 학교생활을 잘하기 위해
마약을 하지 않겠다는 식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의무나, 하나님 앞에서의 떳떳함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마약이 가족이나 공동체, 하나님의 명예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라고 말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표현만 다를 뿐 하나같이, 개인주의적인 이유들만 튀어 나왔습니다.
반면, 수년 전 올림픽 빙상 경기 도중 넘어진 일본 대표의 주된 관심은
잃어버린 광고 계약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준 가족과 국민들에게 미안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 속에는 ‘공동체’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건전한 형태의 개인주의는 바람직 하지만,
현대 문화 속의 공허한 자아는 ‘자기 안에 갇혀 사는 개인’과 같습니다.
그의 인생 목표와 가치와 관심사에는
더 큰 공동체의 관심사를 위해 살 필요성이나 책임감이..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남들과 완전히 분리된 인간 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 사는 개인은, 자기 식대로 행동하고,
자기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 martin seligman은 이런 경고를 던집니다.
‘자아는.. 의미를 찾기에 매우 부적합한 곳이다.’
▲2. 공허한 자아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오늘날 청소년기의 특징들이 이전 세대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는 정설입니다. 이 특징들은 때로 30대 후반까지도 이어집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학교, 부모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미디어와, 통속 심리학과,
모든 사람을 마치 10대처럼 대하는 텔레비전 광고가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탄생한 ‘공허한 자아 속의 어린 아이’는
즉각 만족을 외치고, 누군가 어르고 달래 주기를 바랍니다.
이 어린 아이는 갈망에 휩싸여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음식과 오락거리, 소비재로 채워지고 온전해지기를 끊임없이 갈구합니다.
그는 섹스, 외모, 바디 라인에 집착하며,
감정과 경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고통, 인내, 노력, 만족 지연(delayed gratification)을 지독히 싫어하며..
쾌락, 이왕이면 ‘즉각적인 쾌락’을 원합니다.
그에게는 지루함이 최악이고 즐거움이 최선입니다.
▲3. 공허한 자아는 ‘자기애’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애는, 자기 이익과 개인적 성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태도입니다.
①<남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애에 빠진 사람은 자존감을 확인하기 위해, <남들과의 관계>를 이용할 뿐,
깊은 관계를 유지하거나 자아보다 큰 대상에 헌신할 수 없습니다.
그는 피상적이고 냉담하며 언제라도 관계를 끝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부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②자기애에 빠진 크리스천은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적 목적을 <신앙 생활>의 중심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개인적 성취를 갖다 놓습니다.’
그는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교회와 책, 종교 활동을 평가합니다.
결국 그에게 교회는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도.. 자동차나 운동 기구와 같이,
자기 삶을 용이하게 살기 위한 도구의 하나로 전락합니다.
③자기애에 빠진 사람에게 <교육>은 자기 커리어를 높이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예로부터 대학 커리큘럼의 일부로 공익을 위한 지적, 도덕적 미덕을 다루어 온
인문학과 일반교양은 그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자기애에 빠진 학생들은
보수가 많은 직장 취업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반교양 과정의 도입을 반대한다.’
라고 크리스토퍼 라쉬Christopher Lasch는 말했습니다.
▲4. 공허한 자아는 <수동적>입니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만 보는 사람이, 바로 이 공허한 자아의 역할 모델입니다.
점점 더 많은 현대인들이, 이런 수동적인 삶에 젖어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남들이 자신들을 대신해, 인생을 살고 생각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목사는.. 이들을 위해 성경을 연구하고,
뉴스 미디어는.. 정치적 사고를 대신해 주며,
좋아하는 스포츠 팀이.. 이들을 대신해 연습하고 싸우고 이깁니다.
텔레비전 시청에서 설교 청취까지..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즐거움과 재미입니다.
휴일은 원래 적극적인 놀이와 레크레이션을 통해 심신을 달래는 ‘거룩한 날’ 이지만
이제는 그냥 ‘일정이 빈 기간’이란 수동적 의미로 전락했습니다.
수동적인 개인은, 남들이 주는 쾌락과 소비재를 찾는 자아입니다.
이런 개인은 삶을 적극적으로 통제하는 능력을 점점 잃으면서
‘움츠러든 자아’(shriveled self)가 되어 갑니다.
▲‘기분 좋은 만족’을 위해서 살면.. 공허한 자아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이기적 행복’을 위해 사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런 행복을 추구하면, 삶이 무너져 내립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세상을 위해 헌신/기여/희생하는 삶을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는 하는.. 잃게 될 것이요,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게 될 것이라고요!)
▲이기적으로 살다가.. 우울증에 걸립니다.
1980년대 말, 평생 행복을 연구해 온 셀리그먼은
베이비붐과 함께, 미국의 우울증 발병률이 10배나 증가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 세대 만에 이만큼 증가했다면, 가히 전염병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인과 치료법을 찾아야 마땅합니다.
셀리그먼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성경의 시각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그는 베이비붐 세대가, (1946-1964년에 태어난 세대, 2차대전과 영향 있음)
선조들처럼 자신보다 큰 명분(하나님, 가족, 국가 등)을 위해 사는 대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신의 만족만을 추구했다는 점을
이 전염병의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은, 만족은 커녕 우울증 같은 각종 부작용만 낳습니다.
▲자동차와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배우자/파트너에 대한 불만족이 커지고 있습니다.
2001년 할리우드의 홍보 전문가 마이클 레빈michael levine은
‘사이컬러지 투데이’에 기고한 논문에서,
아름다운 여성을 자주 보는 남성은, 애인이나 아내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연구를 인용했습니다.
연구가들이 남성들에게, 아름다운 여배우의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혼인 경우, 주변의 평범한 여인이나
기혼인 경우, 아내의 매력 점수를 적도록 했습니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남성들은, 곁에 있는 여성에게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레빈은, 자동차와 텔레비전의 등장 이전에는,
평범한 남성들이 직접 대면하는 사람의 숫자가 매우 적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극도로 아름다운 여성을 직접 만날 일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운송 수단이 변변치 않고 텔레비전이 없던 시대에 남성들 대부분은
외적 아름다움이 아닌 다른 요소를 기준으로 배우자를 고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보통 남자들이 매일 밤 텔레비전 쇼와 광고를 통해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들을 수없이 보다 보니
점점 ‘진짜 삶’ 속의 여성들에게 흥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정작 놀라운 사실, 그리고 우리의 논의에서 중요한 사실은
이런 현상을 두고 레빈이 내놓은 설명입니다.
텔레비전을 본 남성들은, 자기 파트너의 외모를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내 파트너도 그럭저럭 괜찮아. 하지만 아름다운 여성들이 이토록 많은데
그럭저럭 괜찮은 여자에 만족할 이유가 뭐람? 나는 훨씬 더 예쁜 여자를 만날 수 있어..’
▲이런 현상도 결국은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레빈의 통찰력이 심오하긴 하지만, 우리는 한층 더 깊이 파고들고자 합니다.
남성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할까요? 답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행복 찾기에 몰두하는 '공허한 자(아)'들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수동적’으로 ‘개인주의’와 ‘자기애’, ‘어린아이 태도’에 빠져서
남들은 자신의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봅니다.
행복에 대한 오늘날의 관점은, 우리의 관계와 종교적 열심,
그리고 삶 자체를 서서히, 하지만 확실히 파괴하고 있습니다.
◑기분 좋은 감정은..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기분 좋은 감정’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기분 좋은 감정이 씁쓸한 감정보다야 백배는 낫습니다.
다만 문제는 감정적인 행복에 집착하는 오늘날의 세태입니다.
사람들은 어느새 감정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감정은 유익한 종이 아니라 끔찍한 주인입니다.’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 그것을 찾을 수 없으며,
자신을 유명인으로 착각하며 거짓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참된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기분 좋은 만족을 위한 삶’보다
더 크고 중요한 뭔가를 찾아야 합니다.
이기주의를 넘어 새로운 삶의 철학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삶에 정답(진리)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 심리학자들이, 대체로 이런 필요성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래 전부터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래 전에 이미 참 인생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8:13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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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은 18C 영국의 재판관 윌리엄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
에게서 행복의 근원에 관한 지혜를 얻었습니다. 블랙스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조주는 ‘영원한 정의에 관한 법’과 ‘각 개인의 행복을 뗄 수 없을 만큼
밀접하게 엮어 놓았다. 그래서 전자를 지키지 않고서 후자를 얻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창조주의 법(성경)을 정확히 지키지 않으면 행복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블랙스톤의 말은
C. S. 루이스 Lewis 의 말과 놀랄 정도로 흡사합니다.
“두 번째 것을 먼저 추구해서는 곤란하다.
첫 번째 것을 먼저 추구해야만 비로소 두 번째 것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6:3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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