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해 죽기, 십자가만 자랑하기 갈6:14 06.11.05.설교 녹취
*원제목: 세상살이 자랑대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못 박혔느니라) 갈6:14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란?
▲<세상이 나에 대해/내가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말을, 우리는 흔히 이렇게 이해한다.
세상을 하찮게 여기는 말로 이해하기도 하고,
마치 도인이 되어, 세속을 떠나 유유자적하는 모습으로 상상하기도 한다.
어쨌든 세상을 등한히/태만히 여기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또한 그런 이해를 돕는 듯한 복음성가도 있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그 외에도 성경에 보면 ‘배설물로 여긴다’는 말씀도 나오는데,
그래서 예수 잘 믿는 것은 ‘세상만사를 우습게 여긴다’는 뜻으로 이해(오해)하게 된다.
뭔가 좀 탈세상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정말 깊은 숲 속이나 광야로 들어가서 살아야 할까 보다...
그래야 내가 세상에, 또한 세상이 내게 못 박혀 죽게 되지 않겠는가!
오늘 우리가 이 말씀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갖게 되시기 바란다.
▲물론 이 말씀은 세상만사를 하찮게/등한시/우습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세상만사로부터 떨어져서, 마음을 멀리 두라는 뜻도... 정확하게 보면.. 아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세상에서 문화적 명령(생육, 번성)을 수행하면서 치열하게 살되,
‘세상에 대해 필요 이상의 우상적/정욕적 관심은 끊으라’는 뜻이다.
▲예1.
아마 대부분 한국인은 노르웨이나 핀란드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살아갈 것이다.
노르웨이, 핀란드란 나라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 나라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노르웨이, 핀란드에 대해 ‘내가 죽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이름도 잘 들어보지 못한 나라들, 나미비아, 부룬디도 마찬가지다.
그 나라들은 나름대로 존재 이유가 있고, 나름대로 세상에 필요하고 중요한 존재다.
그러나 그 나라에 관해.. 적어도 나의 욕심은 없는 것이다.
▲내 관심을 끄는 것이 ‘문제의 세상’
갈6:14절,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해 못 박혀 죽어야 한다고 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또는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
내 마음을 사로잡는 그 무엇이 있다. 내 시선과 관심을 지나치게 끄는 무엇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그 대상에 대해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관심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아 간다.
바울은, 그 정과 욕심을 못 박으라고 말한다. 그런 세상에 대해 죽으라고 가르친다.
세상을 싸잡아 다 등한시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여러분, 자녀/돈/명예/정욕 등 특정 분야에 대해 특별히 관심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그 특정 분야는, 그 사람에게는 ‘못 박아 죽어야 될 세상’이다.
그런데 어떤 특정 분야에 대해.. 내가 전혀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내게 ‘옛날 도자기, 무슨 미술작품’ 등은 아무 관심 없다.
그런 것은 ‘못 박을' 필요조차 없다.
▲예2.
제가 캐나다에서 사역하다가, 한국에서 이진법 선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내와 아들 잠시 캐나다에 두고, 제가 혼자 먼저 귀국해서,
우리 가족이 살 집을 구하기 위해, 약 20군데 쯤 이러 저리 고생하면서 집 보러 다녔다.
제가 집을 구할 때 보니까, 제 편리 위주로 집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 관심의 70%는.. 내 아들이 편리하게 살 수 있는 동네를 찾아다니게 되고..
20%는 내 아내가 좋아할 동네나 집을 찾아다니고..
고작 10% 정도만 내게 편할 집을 찾는.. 그런 것이 제 마음이었다.
반면에 우리 아들은.. ‘집에 대해서 완전히 죽은’ 것이었다.
우리 아들에게 집이 없어도 되는 것도 아니고, 소중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아들이 탈속세 해서 집 없이 살 수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아들에게 집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들은, ‘집 걱정’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장난감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을지 모르나)
아빠가 자기에게 좋은 집을 구해 주려고 그렇게 발품 팔며 애써 돌아다니는 데도
아들은 ‘집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었다.
그저 아빠가, 자기에게 제일 좋은 집을 골라 주실 줄을 믿을 뿐이다.
▲열심히 세상 일에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세상 일에 관심을 끊으라니...
여러분, 위에서 ‘모든 세상’에 대해 죽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오직 내가 정욕적으로 관심/집착하는 분야만.. 죽으면 된다.
그래도 ‘사업을 하는 사람이, 사업에 관심이 없고,
공부를 하는 학생이, 공부를 배설물로 여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 대답은 ‘하나님의 돌보심에 맡기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봐 주신다.
위 예2에서, 우리 아들은 자기 집에 관심이 없지만
아빠인 제가 아들을 위해 열심히 집 보러 다녔다는 예를 들었다.
우리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에만 충실하면,
의/식/주의 문제, 넓게는 내 생활의 모든 문제는.. 아버지께 다 맡기면 된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 책임져 주신다. 선한 목자께서 나를 잘 인도하신다.
뭐든지 주시는 대로,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인줄 알고.. 살면 된다.
바울이 말했다.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으며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풍부/궁핍)을 할 수 있다고 빌4:12~13
또한 주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 필요를 다 아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6:8
영생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그런데 이것도 잘못하면 자기 우상이 될 수 있다)
사심私心없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예쁘게 보시고, 그런 나에게 감동하셔서
하나님이 내 일체의 생활은 다 책임져 주신다. 내가 안달할 필요 없다.
그러면 내가 용쓰고 발버둥 칠 때보다, 더 잘 되는 면이 있다.
(바둑 두는 사람보다, 옆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더 잘 하는 원리와 같다.)
내가 그것들을 얻고자 용쓰고, 발버둥치는 것은
내가 세상에 대해 아직 죽지 못해서 그렇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3:16
‘세상’에 대해 바울은 자기가 죽었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시지만/동시에 죄악된 세상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신다.
저(설교자)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내가 세상에 대해 죽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내 주변 세상을 사랑해 주신다고.
내가 남편과 자식(세상)에 대해 죽을 때,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를 사랑해 주신다고!
내가 사업(세상)에 대해 죽을 때
하나님은 나의 사업을 사랑해 주신다고!
그렇지 않고 내가 사업을 너무 사랑/집착하면, 그래서 우상이 되면,
즉 내가 세상에 대해 죽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런 나의 우상(사업, 가정)을, 심판해 버리신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마10:37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잘못되었다.
여러분, 기독교의 핵심이 ‘십자가’라는데, 그게 뭔가?
- 내가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다. 본문 갈6:14
‘죽는 것’이 탈세상을 뜻함이 아니라는 것을, 위에서 설명했다.
그 때 비로소 주님이 ‘내 세상 환경’을 선한 목자처럼 잘 인도해 주신다.
버리니까 오히려 더 얻게 되는 원리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교회가 강조하는 것은
‘버리는 것’ 대신에 ‘취하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명백한 십자가 사상에 역행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경은 모든 삶의 문제의 해답’... 여기까지는 맞다.
그래서 삶의 모든 문제(자녀, 사업, 결혼, 건강 등)에 대해 답을 성경에서 찾는데,
‘세상을 버리라/세상을 못 박아라/자기가 세상에 못 박혀라’는 것은 없고,
‘이것을 더해라/저것을 보충하라/여러분이 몰랐던 요런 것이 있다’ 하면서
(이런 것을 통칭해서 ‘자기 계발적 메시지’라고 부른다)
즉 세상 지혜를 강단에서 가르쳐 준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세상 진리가 되어버렸다.
일례로 ‘스티븐 코비의 무슨 7법칙’, ‘미국 거대기업 CEO의 경영철학’,
무슨 수상/왕의 리더십, 카네기, 헨리 포드, 록펠러..,
(이런 것도 부수적으로 필요하겠지만, 도배/일색이 되어버리니까... 변질된 것이다)
세상을 버리라, 못 박아라는 십자가의 메시지는... 실종되고,
대신에 세상을 더 가져라/더 쌓아라/더 높아져라... 이런 것이 주제main topic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십자가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상에 대해 내가 죽는' 복음이다.
죽은 후에/버린 후에.. 하나님이 더 주신다. 부활하게 하신다.
◑‘세상에 대한 자랑’에 대해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6:13~14
▲잘못된 세상 자랑/ 올바른 십자가 자랑
오늘 내 마음속에 활발하게 움직이는 그 무슨 세상 자랑이 있다.
세간의 보통 세상 자랑의 예를 들면,
①자식의 좋은 대학/좋은 직장/좋은 혼처 자랑하기
②사업이 확장되고, 수입이 많은 것을 자랑한다.
③건강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랑하거나/염려한다.
올바른 바울의 십자가 자랑의 예를 들면,
①내가 자식에 대해 죽었다. 자식에 대해 아무 걱정이 없는 것이다.
‘나는 자식에 대해 털끝만큼도 걱정 하지 않는다!’ ... 이것이 바울의 자랑이다.
자식에 대해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랑거리는, ‘내가 자식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자랑한다.
②나는 사업에 열심히 임하되
‘사업에 대해 조금도 염려하거나, 집착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바울은) 자랑한다.
왜냐하면 ‘내가 사업이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사업을 등한시/다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사업에 대해 자랑하거나/염려하고/집착하는 것을 버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세상/사업에 대해 자유한 가운데서’ 사업을 한다.
(그러면 오히려 바둑 훈수 두는 사람처럼, 사업이 더 잘 되는 면이 반드시 있다.
주식 투자에 대해서 책 30권씩 읽고/연구하고/골몰하고/발버둥 치는데.. 신기하게도 잘 안 된다.)
③건강을 예로 들어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건강에 대해서 자랑/염려하지만
바울은 자기 마음에, 자기 건강에 대해서
조금도 걱정/염려/집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자랑한다.
‘건강’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고, 자유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자랑한다.
이것은 ‘건강을 버리라’는 뜻과는 엄연히 다르다.
▲자랑 같지 않은 자랑
우리가 세상을 떠나 살 수 없다. 반드시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세상에 빠져서, 취해서, 세상 일을 걱정/자랑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바울이, 자기가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 말하고,
세상이 또한 자기에게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고 세상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 대해 필요이상의 집착/관심/자랑/염려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세상에 대해 집착/자랑/염려가 없다, 나는 자유하다>는 것이
도리어 바울의 자랑이다. 정말 자랑 같지 않은 자랑이다.
세상 자랑이 없는 것이.. 바울의 자랑이었다. 십자가에 몽땅 못을 박았으니까..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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