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가 죽은 것으로 여기시라 창37:35 06.12.03.설교녹취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듯이,
부모의 사랑이 너무 과도하면,
그것이 '내 자녀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차 버릴 수 있다...
▲야곱의 지극한 요셉 사랑
야곱은, 여러 아들 중에 특별히 요셉을 지극히 사랑해서 ‘채색옷’을 입혔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값비싼 명품’ 옷이 되겠고, ‘치맛바람’이 되겠고,
확대 적용하면 ‘값비싼 사교육, 유명사립학교’에 진학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금지옥엽처럼 기른 아들인데,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내가 슬퍼하며 음부(무덤)에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창37:35
라고 말 할 만큼, 야곱은 비통해 한다.
그만큼 자식 사랑을.. 집착이라 할 만큼 쏟아 부었던 아들이었다.
(여러분, 뭐든지 너무 사랑하면.. 하나님이 빼앗아 가시므로.. 미리 조심해야 한다.)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키우니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아들 요셉이 죽은 줄 알고, 13년~15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기근을 대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요셉은 13년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된다.
그런 가운데서 야곱은,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을 13~15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
이때 야곱은 바로 왕 앞에 서서 ‘험악한 인생을 살았다’고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바로 왕을 축복한다.
아마 이 때가 야곱의 전 인생에서 가장 피크peak라고 생각한다. 야곱 인생의 최절정기였다.
그 이유는,
-아들 요셉이 총리가 되었고
-총리 아들을 둔 덕택에, 바로 왕으로부터 VIP대접을 받게 되었고
-바로 왕을 축복하는 위치에 설 만큼, 영적/인격적으로 완성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이 지독한 역설(아이러니)을 생각해 봐야 한다.
야곱 생애의 금자탑은,
그가 평생에 복을 쫓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잘 오지 않았는데,
그래서 어떻게 아들 덕이라도 볼까 해서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히며 자식 양육에 유난을 떨었는데,
그런 때는 도리어 재앙(요셉의 죽음)이 임하다가...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완전히 포기해 버리니까..
그제야 비로소 야곱 인생의 금자탑이 이루어졌다.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있었던 그 13년 기간을 통해서
그 포기와 버림과 죽음의 기간을 통해서
자기 일생에 이루지 못했던, 어떤 생애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이 은혜로 이루어주신 것이다.
야곱이 자기 인생을 포기/단념했을 때!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은 곧 야곱 자신의 죽음)
그 13년 동안에, 어찌 보면 야곱이 가장 무력하게 지낸 그 기간 동안에
몸도 다 늙었고, 잘 키워 보겠다던 자식도 죽었고..
그 기간 동안에 야곱이 뭐했는지.. 성경에 기록도 안 나온다. 뚜렷하게 한 게 없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물밑에서 이루어가고 계셨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이
자기 인생을 그렇게 놀랍게 바꾸어 주었다.
▲야곱이 자식을 포기했을 때, 하나님이 붙잡아 주셨다.
총리가 되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요셉을 과외공부 시킨 것.. 아니다.
‘채색옷을 입힌 것’으로 상징되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특별한 사교육을 시키려다가.. 좌절되었고,
그 후로는 요셉에게 부모로서 도움을 준 적도 없고,
총리가 되도록 기도해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오직 아들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채색옷 사랑이 끊어지고
특별한 자식으로 기르려던 의욕이 끊어지고
자식을 도와줄래야 도와줄 수도 없는 상태가 된 뒤에야
즉,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완전히 단절된 그 기간 동안에
<비로소 하나님이 역사하셨다.>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고
기근으로 인해 만인이 죽어가던 그 세상을.. 놀랍게 구원해 주셨다.
부모가 자식을 포기하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자식을 붙잡아 주신 것이다.
▲부모의 과도한 사랑이, 자녀의 성공을 방해할 수 있다.
요셉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끊어졌다.
어머니의 사랑이 끊어졌다. (요셉이 어릴 때 라헬 사망)
야곱은 아들이 죽은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관심을 줄 수 없고,
사랑을 쏟을 래야 전혀 쏟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야곱은 자기 인생의 꽃을 피우고
‘가장 성공한 자녀를 키운 부모’가 된다. 얼떨결에!
여러분, 지금 자식 때문에 얼마나 애쓰고 계시는가?
사랑하고, 계획하고, 머리를 굴리며
이런 길이 좋을까, 저런 길이 좋을까,
좀 다른 아이들보다 특별하게 키우고 싶고,
그런 아이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특별한 기대감이 있고,
그래서 모두가 병적이라고 할 만큼, 자녀에게 집착하며 산다.
그게 훌륭한 아버지, 어머니인 것 같지만,
성경적인 원리는 아니다.
여러분, 주의하시기 바란다. 부모의 과도한 사랑/양육이,
도리어 ‘그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훼방할 수 있다.
▲만약에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자.
형들이, 요셉이 죽었다고 채색옷에 피를 묻혀서 야곱에게 가지고 왔다.
아버지 야곱이 통곡을 하고는
‘내 사랑하는 아들의 뼈라도 수습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는
형들(아들들)을 재촉해서, 요셉이 죽었다는 현장으로 찾아갔다.
형들의 거짓말이 결국은 탄로 나게 된다.
형들을 족쳐서..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렸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아들 요셉을 구출하려고, 집안의 종들을 조직해서 애굽으로 쫓아갔다.
그래서 보디발의 집에 팔리기 직전에, 돈을 치르고 요셉을 되찾아왔다.
와~ 굉장한 아버지다!
이런 아버지의 아들 사랑은.. 정말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이 감동적/헌신적이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이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런 ‘사랑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아들 요셉에 대한 하나님 계획
-아들 요셉을 통한 인류구원 섭리
이런 것들은 여지없이 박살나게 된다.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과도한 사랑이..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섭리를.. 도리어 훼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자식에게 열중하는 우리 부모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야곱은, 드디어 요셉을 포기하고 만다.
아들이 진짜 죽은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전혀 부성애를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요셉을 들어서, 만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에게서 손 떼시라!
▲그래도 우리는, 자녀에게서 관심을 못 끊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부부가, 밤새도록 집에 안 들어오는 자식을 기다린다.
하도 말썽을 부리니까 엄마가 말한다. “여보, 우리, 저 자식, 없는 셈 치자!”
남편이 말한다. “그래. 자식이 웬수라는데... 웬수같은 놈 없는 셈 치지 뭐!”
그렇게 말한다고 자식이 없는 셈 쳐 지는가? 물론 아니다.
부모는 밤새도록 잠을 뒤척이면서, 자식이 집에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한다.
아무리 없는 셈 치려고 해도, 그렇게 인식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야곱은, 어떻게 ‘아들이 없는 셈’ 치고 살 수 있었을까?
▲내 자식이 죽은 줄 알아야! ... 실제로 그렇다.
야곱은, 수염소의 피가 묻혀진 채색옷을 목격하게 된다.
그 피가 묻힌 채색옷을 보고, 요셉이 죽은 줄로 마음이 설득 당하게 된다.
어떻게 내 마음 속에서 내 자식들이, 나에게 죽은 것으로 여겨질까?
어떻게 내가 자식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을까?
수염소의 피를 채색옷에 묻히면 된다.
‘채색옷’은, 요셉을 향한 아버지 야곱의 마음의 표현이었다.
특별한 아들로 기르고 싶어 했던 어쩌면 극성스런 마음이었다.
그 수염소의 피가 요셉의 피인 줄 알았다.
그 피를 보자마자, 요셉을 죽은 줄로 여기는데,
예수님이 어린 양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피를 우리 자녀의 채색옷에 뿌려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그 안에서 함께 죽었고, 갈2:20
우리 자녀도 그 안에서 이미 죽었다.
그래서 우리 부모도, 자식을 볼 때,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자식이 죽은 것으로> 여겨야 한다.
실제로/영적으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었다.
‘저 자녀가 2천년 전에 예수님 돌아가실 때, 이미 죽은 녀석인데..,’
라고 믿어버리셔야 한다.
그리고 자녀에 대해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한다.
▲적용 : 실제로 이렇게 자녀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생각할 때
자녀가 학교 성적이 안 좋다...
십대 문제아 같은 행태를 보인다...
옛날에는, 그런 자녀를 볼 때, 하늘이 캄캄했는데,
이제는 십자가에서 내 자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바라보니
말썽을 일으키고, 학교 성적이 엉망인 내 자녀를 바라볼 때
이상한 자신감이 부모 마음속에 생긴다.
‘내 두 손 다 털고, 하나님께 다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이 붙잡아 주실 거야!’
예수님이 저 자식을 위해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나도 그 때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고, 내 자식도 예수와 함께 죽었고..,
죽었으니.. 이제 의지할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주님 한 분만’ 바라보는 나를.. 주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거야!
우리가 자진해서 자식을 내 놓지 않으면
때때로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자식을 거두어 가신다.
‘너는 오직 나 한 분만 바라보라!’는 식으로, 주님이 우리를 강제로 몰고 가신다.
▲완전히 죽었을 때.. 주님의 역사가 비로소 시작된다.
‘채색옷에 묻은 아들의 피’를 보았을 때, 야곱은 자기 인생을 포기한다.
음부로 내려갔으면 좋겠다고 고백했다.
완전히 야곱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다.
아들이 죽음과 동시에 자기가 죽은 것이다.
그렇게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13년을 지나는데,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인생의 금자탑을 부여 받게 된다.
야곱 인생의 최대 전성기가.. 자기가 완전히 죽은 이 시기에.. 비로소 이루어져 갔다.
자기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 행복한 가정
'분류 없음 > 2006'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헛된 자랑과 참된 자랑 2030 (0) | 2009.08.12 |
---|---|
막벨라 굴부터 허락하신다 (0) | 2009.05.18 |
세상에 대해 죽기, 십자가만 자랑하기 1877 (0) | 2009.05.06 |
상황과 현실 (0) | 2009.05.05 |
경건과 영성의.. 몸의 훈련 (0) | 2009.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