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막6:34 설교부분녹취, 정리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5:1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막6:34
여기서 예수께서 무리를 <보신> 것은,
그냥 눈앞에 보이니까 보신 것이 아니라,
어떤 긍휼함을 가지고 <보신> 것이다.
◑긍휼을 보여주신 예수님
▲사람이 지위에 오를수록, 긍휼심을 잃기 쉽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항상> 긍휼과 눈물이 있었다.
병자들을 고치실 때, 그냥 습관적으로 고치지 않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사실 능력이 있고, 힘이 있는 사람에게 매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쉽게 매너리즘으로 대한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건성으로 대한다.
사람에게 힘이 생기고, 재력이 있고, 경험이 풍부해서
어떤 지도자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반드시 이것을 주의해야 한다.
자기 마음속에,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무덤덤해지고, 긍휼심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가끔 병원에 가보면, 친절한 의사에 의해서 감동을 받을 때가 있는데,
바깥에 많은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환자를 진료하는데 시간을 충분히 끌면서, 정성으로 대하는 의사를 만날 때이다.
환자와 그 가족의 애끓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공감해주는 의사이다.
▲예수님의 모든 삶과 사역은, 그 바탕foundation이 <긍휼>이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무덤 앞에 가셔서 우셨다. 요11:35
사실 예수님이 거기서 우실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조금만 지나면, 예수님이 그를 ‘나사로야 나오너라’ 해서 살리실 터인데
뭣 하러 그 앞에 가셔서 우셔야 했는가?
저 같으면 속으로 도리어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 같다.
‘내가 이렇게 다시 살릴 능력을 보여주면 다들 깜짝 놀라겠지?’ 하면서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 같다. 굳이 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우셨다. 불쌍히 여기셨다.
그 사역과 삶의 바탕에, ‘긍휼함’을 가지고 있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례교인이라고 하면서
‘긍휼함’이 없고, 비판과 정죄의 매서운 마음만 가득하다면
그의 신앙이 병들었든지, 아니면 아직 거듭나지 못했든지.. 둘 중 하나이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 자살한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
이유야 어쨌든지 ‘일단 긍휼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내 영혼이 병들어 있는 것이다.
오늘도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각종 부조리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모르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긍휼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저 자기 앞가림하기에만 바쁘고 급급하다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먼 데까지 갈 필요 없다. 내 주위를 둘러보자.
이 사람은 이런 고통, 저 사람은 저런 문제 때문에
대부분 모든 사람들이 유리방황하며, 목자 잃은 양처럼 헤매고 있다.
그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그들을 위해 정성어린 중보기도 한 마디 해 주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나는 오늘 신앙의 본질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런 갈 길 잃은 사람들이, 내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고,
내가 먹고 사는 문제, 내 삶의 고민들로 하루 종일 끙끙거리며 산다면
나는 오늘 ‘좀 쉬어야’ 한다. 피정retreat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설교자의 톤tone이 중요하다.
목회자는 항상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설교로 가르친다.
그래서 성도들이 예수님에 대해 많이 읽고, 듣고, 공부하는데,
-교리화된 예수
-사람들의 해석을 통해서 증거된/전달된 2차적인, 3차적인 그런 예수님 <말고>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말씀이 설교자의 삶에 먼저 녹아들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알고/체험하고/만난 예수를 전달할 때.. 파워가 생긴다.
비록 그것이 아직 완벽하지 않다 하더라도,
반드시 ‘카더라’는 예수가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를 전달해야 한다.
설교를 많이 듣는 사람이 경험에서 나오는 말로,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설교를 많이 들어보니까, 어떤 노하우가 생기는데
일단 제일 중요한 것이 <설교자의 톤tone>이라고 했다.
설교자의 톤이, 간절하고/힘차고/약간 격앙되어 있으면.. 일단 능력 있는 설교이고
설교자의 톤이, 평범하고/단조롭고/아무런 감정적 격앙이 없으면.. 그저 그런 설교다
라고 그는 말했다.
설교자의 음성의 톤이 간절하거나, 약간 격앙되려면
- ‘카더라’가 아니라, 반드시 ‘내가 삶에서 만난 예수’를 전달해야 한다.
- 내가 그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려고, 씨름하고 몸부림친 경험이 우러나올 때.. 격앙된다.
그런데 설교자도 사람이니까.., 말씀 붙들고 순종, 씨름, 몸부림이 태생적으로 잘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키우시는 설교자들은, 강권적으로 그런 코너로 몰아가신다.
억지로라도 그런 경험을 직/간접으로 하게 하신다.
그래서 종종 삶의 깊은 고난을 경험한 설교자가.. 보통은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교회가 안정기에 들어서게 되면.. 자꾸 ‘박제화’가 되어간다.
‘화석화’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21세기 ‘기독교 박제화/화석화’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
바로 그 ‘박제’와 ‘화석’의 돌파구를 뚫어야 하는데,
즉 ‘남들이 그러더라..’, ‘어느 신학자가 그러더라’, ‘어느 책에 그랬더라..’
이런 것을 그냥 전달하는 것은.. 이제 시대가 지났다.
과거에는 그런 것도 필요한 때가 한 때 있었으나,
이제도 계속 그랬다가는 더욱 ‘박제화’가 될 뿐이다.
‘내가 삶 속에서 깨달은 예수', '내가 씨름하며 만난 예수’
'내가 체험한 십자가의 복음', '내가 만난 부활의 예수'
... 거기에서 메시지의 깊이가 우러나온다. 감정도 격앙된다.
갑자기 큰 교회를 맡게 된 젊은 목사가 가장 당황하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다.
예수를 전하는데, 자기 경험이 너무 일천해서(얕아서) 당황하는 것이다.
‘내가 씨름하며 만난 예수’는 1~2년 만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만나고 경험하는 예수이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이상 인터넷설교 부분 녹취, 편집 ▣ 리더쉽,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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