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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자기 죄를 더 깊이 깨닫는 다윗

LNCK 2009. 5. 25. 19:49

 

◈자기 죄를 더 깊이 깨닫는 다윗           시38:1-22          -09.04.20. 설교 스크랩, 정리-

                                                                          *원제목 : 깊이 깊이, 높이 높이

 

◑도입

 

▲2010년까지 세상의 경제계에서 <마천루 경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가 더 높은 빌딩을 지을 수 있고,

또 더 높은 빌딩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경쟁입니다.

그래서 2010년까지 50조에 달하는 마천루시장이 지금 진행 중에 있다는 거예요.

 

그중에서 놀랍게도 20%에 해당되는 10조원 상당의 마천루시장이

우리나라 안에 보유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천루, 문지를 마摩/ 하늘 天/ 누각할 때 루樓,

              skyscraper 하늘을sky 긁는/문지르는 것scraper이란 영어를 한자어로 번역한 듯)

 

그래서 세계10대 건물 중에 최고층빌딩 중에 5개가 우리나라에 있을 전망이고

또 쿠알라룸푸르의 페트로나스 트윈빌딩을 지을 때

한 쪽을 일본이 맡고 한 쪽을 우리 삼성건설이 맡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트윈빌딩의 스카이통로, 그것을 또 삼성이 건축을 따내서

또 한바탕 유명해졌던 그런 일이 있었고,

지금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로 인정되는 ‘버즈두바이’가 700m가 넘지요?

 

700m가량 되는 버즈두바이를 위시로 이 아시아권에,

엄청나게 높은 최고층 빌딩들이 지금 많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마천루하면 미국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아시아권에 엄청나게 높은 빌딩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마천루 경쟁’은 인간의 본성 같아요.

바벨탑사건에서도 우리가 높이 높이 하늘에 닿을 수 있는 탑을 쌓아서

하나님께 한번 도전해보자하는 그런 죄악된 본성을 드러낸 건데,

사람이 높이 쌓고 싶은 것은,

인간에게 가장 뚜렷한 본성 중에 하나가 아닌가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높이 쌓는 것과 반대로, 깊이 아래로 파 내려 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성경은 ‘높이높이 쌓는 경쟁’을 하지 않았고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은 ‘깊이깊이 파내려가는 경쟁’을 했다는 것입니다.

 

 

◑본론 : 밧세바 사건으로, 더 깊은 신앙 경지에 오른 다윗

 

▲배경 : 밧세바 사건을 회상하며 지은 시

본문 시38편은 150개 시편 중에 ‘7개의 참회시’ 중에 하나입니다.

                                                                   (*7개 참회시 :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

 

다른 참회시들도 그렇습니다마는 본문 시38편은 밧세바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다윗이 이렇게 참회의 시를 쓰게 된 이 배경이

바로 압살롬모반사건이 발흥할 때에 압살롬의 모반에 관한 소식을 접하면서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회상하며’ 부른 노래가 아니었겠는가.. 추측합니다.

 

12절, 또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며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13절,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14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19절,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부당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으며..  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압살롬의 모반사건에 관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으면서

자기의 죄악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참회한 시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자기 죄악을 깊이 들여다보는 다윗

여러분, 참으로 이 다윗의 자기 죄악상을 드러내는 비탄의 심정이 너무 절절해요.

이 표현들을 보면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38:2

 

화살이 나를 찌르고 손이 심히 누를 정도로

그러니까 빡빡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가슴이 찌름을 받고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겁니다. 자기 죄악 때문에.

 

그리고 그 다음절에 보면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38:3

 

다윗자신은 지금 자기의 죄악을 생각할 때

온 몸에 살이 다 썩어 들어가고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그런 아픔을

자기 마음이 느끼고 있는 겁니다.

 

자기의 죄를 그렇게 깊이 보는 거예요.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38:5

 

우매하면 우매한 것으로 끝나지

왜 영적으로 우매한 것이, 자기 살에 썩어 들어가는 상처가 난 것 같은 느낌을

갖느냐 이거에요. 그러니까 그만큼 깊이 죄를 보는 거지요.

 

사실은 밧세바사건을 돌이켜보면 뭐 제정신으로 한 것 같지는 않아요.

어떻게 다윗이, 성군 다윗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요?

밧세바를 범한 것까지, 사람이 유혹을 받아서 그럴 수 있다고 이해를 하더라도

그 밧세바가 아기를 가진 것을 알고 나서 우리아를 죽인 이 사건은

참 천인공로할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하나님?

그런데 이 밧세바 사건이 말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됐을 일이지만

이왕에 일어난 일로서는 다윗에게/ 또한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까지

참 유익한 영적 그런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제 말을 잘 오해하지 마세요.

밧세바 사건 같은 것이 일어나는 게 좋다는 뜻이 아니라.. 이왕에 일어났습니다.

절대로 이 천인공노할 패륜아적 행동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되요.

그러나 이왕에 일어난 다음에는, 다윗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느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롬5:20

 

이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자기의 죄를 깊이깊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줬다는데

밧세바 사건이 계기가 되어주었습니다.

 

다윗이 특별히 보통 사람들보다 더 죄악이 많은 사람이 아니에요.

아마 그 일만 없었더라면, 일반 사람들보다 몇 배 더 성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많은 다른 죄인들을 판단하고 손가락질 하며 살았을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런 시편을 대할 때 마다,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보시고 주님이 보시는 관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밧세바 사건을 저지르고 우리아를 죽인 다윗과 마찬가지로

깊은 죄악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마음’으로는 다 갖고 있습니다.

 

▲다윗의 믿음이 뛰어난 이유, 그 모순

그런데 다윗이 다른 것은.. 그러한 죄를 범하고 나서,

자기 뼈가 썩고, 자기의 멀쩡한 살이 상처가 나서 악취가 나는 것 같이 느낄 정도로

자기의 죄를 깊이 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우리보다 영적으로 앞설 수 있는 이유라는 거예요.

 

참, 말이 모순 되지요.

다윗이 어떻게 밧세바와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범한 죄악된 사건으로 인해서

다윗이 영적경쟁에서 치고 나가고, 영적 거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지어야 되느냐?’ 이런 말도 나올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죄를 지으면 안돼요.

죄를 지으면 안 되는데 다윗은 죄를 지었다는 이유 때문에

유리한 지점을 점하게 됐습니다. 역설적이지요. 모순 되지요.

용납이 안 되지요. 그러나 사실입니다.

 

▲사도바울도 비슷한 경우입니다.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 그래요.

그는 실제로 교인들을 잡아다 죽였습니다. 살인을 했어요. 살인자에요.

아마 한두 명 죽인 게 아닐 겁니다. 직접 죽이진 않더라도, 거기에 가담한거죠.

 

일례로 스데반이 죽을 때도,

청년 사울이 지켜보며 돌로 치는 자들의 옷을 맡아주었습니다.

그것은 ‘깊은 관여’를 뜻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인의 괴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한경직 목사님 생각도 떠오르지요.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늘 등장하시는 분이 한경직 목사님입니다.

그 존경하실만한 성품과 목회적 일생, 그게 기반을 어디다 두고 있습니까?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에 동조하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템플턴상을 수상하실 때 수상소감의 첫마디가

‘나는 죄인입니다. 신사참배를 동조하고 참여했던 죄인입니다.’

라는 말씀을 첫마디로 하십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영예로워야 될 시간에

가장 추악한 당신의 모습을 들춰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에 동조했다는 그 죄책감으로

평생에 당신자신을 죄인으로 보시며 일관되게 살아가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한경직 목사님의 위상을 만들어낸 것이에요.

역설적이지요. 역설적이에요.

 

 

◑적용

 

그러니까 신앙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사람 모두는 마천루를 향해 경쟁을 합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차원에다가 얼마나 높이 쌓느냐를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높이높이 더 높이’ 쌓으려고 경쟁합니다.

그게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원리에요.

 

그러나 신앙인의 삶의 원리는 뭡니까?

어떡하든지 깊이 봐야 됩니다. 뭐를요?

내 죄를. 내 죄를. 하여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깊이깊이

자기 죄를 볼 수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영적경쟁에서 이기는 것이에요.

 

여러분, 꼭 명심하세요.

사도바울, 베드로, 다윗, 한경직 목사님..

이런 분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선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도 ‘천추의 한이 되는 죄’를 범할 수 있다면

모든 인간은 공통적으로, 더 추악한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는 뿌리 깊은 죄성을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이에요.

 

 

▲성도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경쟁을 해서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쟁은 뭐냐?

범죄적 행동을 하지 않고 누가 자기 죄를 더 깊이 보느냐?

- 이게 우리의 경쟁이 되어야 합니다.

 

사업을 할 때도, 자식을 기를 때도,

신앙인의 경쟁은 누가 어떻게 더 높이높이 올라갈 수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깊이깊이 자기 죄성을 들여다보느냐.. 이것이 경쟁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깊이 자기 죄성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결국 다윗/바울/한경직 목사님처럼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것입니다.

 

▲목회자도, 세상 ‘마천루’ 세우기로 경쟁하려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 내가 목회 현장이라는 이 삶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현장 속에서

내 죄악을 깊이깊이 들여다보느냐, 하는 것이

목사님들의 경쟁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누가 더 큰 교회를 누가 더 큰 예배당을 만들어내느냐?

누가 짧은 기간 동안에 많이많이 사람을 모아내느냐?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게 경쟁이 돼서는 안돼요.

 

돈에서, 자동차에서, 뭐 오래 사는 거에서,

자식이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에서 1등하는 게 아니라

‘내 죄를 들여다보는 깊이에 있어서’ 1등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장 깊이 보는데서 1등 하는 그분이 바로

영적 지도자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가장 깊이 봐야 되요. 가장 깊이.

 

▲십자가를 더 깊이 아는 사람

십자가에서 주님의 살이 갈기갈기 찢겨버립니다.

채찍에 맞고 못 박히고 창에 찔리고 가시면류관 쓰시고

등짝과 배가 채찍에 맞아서 다 살점이 떨어져나가잖아요.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 죄악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예수님이 그 정도로 처참하게 고난을 당하셔야 했다는 것을 ‘깊이’ 볼 수 있어야

십자가를 더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얘기가 바로 그 얘기지요.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얘기는

‘내가 가장 지독한 죄인이라고 하는 죄인됨을 자각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경쟁에서 1등하는 사람이, 참으로 영적지도자 입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여러분?

 

높이 쌓기 위해서는, 높이 쌓는 만큼 아래로 깊이 내려가야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라든지 다윗이라든지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들,

너무너무 자기의 죄를 깊이깊이 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이 사람들 눈에 보일 수 있을 만큼

높이높이 쌓아올릴 수 있었던 것이에요.

 

고층빌딩일수록 지하의 기초가 깊지 않습니까? 당연하지요.

 

 

▲설교자의 직접 경험 간증

미국에서 보험사기를 치다가 이민국에 붙잡혀서 추방됐다. 태승철 목사가.

라는 이야기를 꾸며서 밴쿠버교민들이 보는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3개 일간지에 냈습니다. 없는 일이에요.

보험사기를 쳐본 적도 없고

제가 제 차 몰고 대륙을 횡단해서 캐나다로 여행을 하면서 넘어갔지

이민국 사람들이 나를 쫓아낸 게 아닙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 나와서 어느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어떤 마음이 생겼느냐 하면

그 사람이 없는 이야기를 꾸며서 나를 비난하고 있는데

내가 기도하면서 내 죄악의 깊이를 들여다보고 내가 깜짝 놀란 것은

 

그 사람이 중앙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에다가 만들어낸

모든 나를 비난하는 이야기들은,

내 원래 죄악의 깊이를 적중하지 못하고, 잘 봐준 것이더라고요.

 

그 사람이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난하는 그것이

내 진짜 죄악을 들여다보고 나니까, 너무너무 좋게 얘기해주는 거더라는 거예요.

 

그 비방자가 한 가지 제게 도움을 준 것은

평소에 미처 깊이 쳐다보지 못했던 내 죄악의 깊이를

그런 일을 계기로, 깊이 쳐다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13절,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38:13

 

19절, 원수가 활발하여 강하고 부당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있는데

또 악으로 선을 대신하는 자들이, 내가 선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나를 대적하나이다.

이게 다 무슨 말일까요,

 

다윗의 대적들이, 부당하게 다윗을 미워하고 있는데,

다윗은 잠잠하고 있습니다. 반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비방을 통해서, 자신의 죄악을 더 깊이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더 큰 죄악이 자기 속에 있으므로, 그래서 잠잠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라도 자기 죄를 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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