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식 간증을 조심하자 눅5:14~16 09.03.29. 설교 부분 녹취
예수께서 한센병자를 만지셔서 그를 깨끗이 고치신 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눅5:14절,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특별히 ‘경고하셨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절대로 아무에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센병자는, 그 경고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다음 구절이 그 사실을 나타낸다.
▲15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마가는 더욱 자세히 기록하는데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막1:45a,
한센병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엄청난 신유의 사건을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그가 떠벌리고 다닌 결과는 이렇다.
막1:45b,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 나아오니라
▲예수께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이유는,
이 기적의 주인공은, 사방으로 다니면서 자기 한센병이 나은 것을 전파하면,
-어쩌면 그것이 예수님 유명세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시점은, 예수님이 유명해질 시점이 아니었다.
-그리고 덩달아 자기도 유명해지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로 떠오를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과 무관하거나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메시야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살짝 틀어지는 것이다.
살짝 틀어지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비슷하게 가다가, 끝에 가서 살짝 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와 구분을 못하게 만든다. 그럴듯한데 아닌 것이다.
공생애 시작, 광야시험 때부터, 사탄이 계속 시도하는 것은 <영웅 만들기>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만 지지 마시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웅’이 나타났다고 열광하겠지만, 그 열광이 식으면 그만이다.
사람들 사이에, 예수의 ‘영웅 이미지’가 퍼지면 퍼질수록, 사람들은 열광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한 순간에 군중심리에 휩싸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결코 영웅의 자리를 거부하셨다. 대신에
-말구유의 천한 자리로 오신 예수
-나사렛의 시골 동네로 오신 예수
-군중들의 환호성을 피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길을 가시는 예수를 보여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환자에게 사전에 입단속을 시키셨던 것이다.
▲입단속은, 치유 받은 한센병자를 위해서도, 꼭 필요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변화된 후에,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묵상시간을 가졌다.
한센병자가,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을,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는 것은
여러모로 보나 상당히 잘못될 가능성이 높았다.
예를 들면,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신 분이
계속 간증집회 하면서 돌아다니면
그는 반드시 영적으로 깊어지지 못한다.
변화된 이후에는, 더욱 영적으로 깊어지는 시간을 (바울처럼) 가져야 하는데,
‘스타, 작은 영웅’이 되어버린다면.. 결코 자기 영혼에 이롭지 못하다.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많은 관심을 받는 ‘작은 영웅’이 된 한센병자가
이후에 경건한 신앙생활을 유지하기는 아마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요즘은 모두 다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부흥사와 간증자가 서로 띄워주던 시기도 한 때 있었다.
부흥사는 간증자를 데리고 다녔고, ‘내가 기도해서 병 나은 사람’
간증자는 부흥사와 같이 떴다. ‘그가 기도해줘서 병 나은 사람’
그러면서 점차 간증이 그의 생계수단으로까지 발전한다...
(이런 말이 성령의 신유사역을 싸잡아 비난하는 꼬투리가 되어선 안 된다)
여러분, 우리가 간증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종종 거기에 걸려 넘어지는데,
간증이 은근히 <자기 홍보>로 둔갑해 버리는 것이다.
꼭 해야될 간증이라면, 한 번만 말하고, 내 중심에 ‘은밀함’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은밀한 신앙의 비밀로 간직하는 것이 좋은데,
간증을 반복해서 계속하다 보면.., 자꾸 첨삭되면서, 스스로 이상해진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도,
‘이 교회에 와서 기도했더니 나았다’ 하면서 무슨 장소를 신성시하는 것도
모두 다 ‘십자가의 길’과 역주행하는 길이다.
성도들이 십자가를 주목해야 하는데,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그런 일들이, 특히 부흥하는 교회에 일어나기 쉬운 유혹이므로
매우 조심해야 한다.
더욱이 이 한센병자가 자기 입으로 소문을 낼 때
명분은 언제나 ‘주님을 위하여’였다.
우리는 이런 것을 조심해야 한다. 주님은 다 아신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성경>과 <성경을 이해하는 내 생각> 사이의 어디쯤에 위치한다고.
성경(예수님)이 뭐라고 가르쳐도,
내가 그것을 첨삭해서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때문에
나중에 보면, 성경의 주장과 내가 이해하는 기독교가 엉뚱하게 다를 수 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한센병자에게 '잠잠하라'고 하셨지만
그가 자기 생각으로 이해하는 바로는 '나가서 전파해야 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그가 그 전파활동을 계속 지속했더라면.. 그는 정말 변질되었을 것이다.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도 누구보다 말씀(구약) 앞에 정통한 자들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굉장히 강조를 많이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먼 사람이 된 것을
우리가 늘 뼈저린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가 늘 말씀에 대해 말하고, 말씀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말씀으로부터 가장 동 떨어진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성경을 자기 눈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서' 가르칠 때.. 그렇게 된다.
그 결과, 성경과 비슷하지만, 성경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심하게 그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말하게 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
만일에 한센병자가, 그 기적을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면
그 당사자 말고도, 말할 사람이 너무너무 많다.
주변에서 본 사람들이, 한 마디씩 거들면서 그 소문이 쫙 퍼졌을 것이다.
여러분, 남들이 나의 좋은 소문을 내 주고, 남들이 나를 칭찬해 주는 것은 괜찮다.
그것은 어떻게 막을 수도 없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 소문내고,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칭찬하는 것은
조작manipulation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크므로.. 매우 조심해야 한다.
내가 말을 하면, ‘내’가 중심이 되고
내가 침묵 하면, ‘예수님’이 중심이 된다.
다른 사람이 말하게 해도, ‘예수님’이 중심이 된다.
단, 내가 말을 하면, 아무리 부인한다 해도, ‘내’가 중심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우리들은 너무 <공로주의>에 약하다.
자꾸 자기 공로/공적을 사람들에게 은근히 알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에게 자꾸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더라도, 자기 영혼이 천박해 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부흥한다는 소문도, 주님이 우리 교회에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소문도
자기 입으로 너무 자주 하는 것은
예수님 뜻에 역행할 가능성이 크다.
15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무슨 결과가 생겼는가?
그가 놀라운 부흥을 위한 굉장히 놀라운 역할을 감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을 보시라
▲16절,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16절 앞에 접속사 ‘그러나’ (헬라어 ‘데’)가 번역되지 않았다고 본다.
다시 번역하면
마구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기도하시러 한적한 곳에 가셨다
가 된다.
이 사람이 전도하기 위해서였는지, 어쨌든 사방팔방으로 다니면서 소문을 내면서
사람들을 끌어 모았으나,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기뻐하지 않으셨다.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이적을 보고 따르는 무리들은, 금방 뒤돌아서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십자가의 길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는 말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일관되게 ‘십자가의 길’만 걸어가셨다.
그것 때문에 때로는 모였던 무리들이 모두 다 떠나버리는 불상사가 있기도 했다. 요6장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한센병자를 불쌍히 여기사 그를 고쳐주셨지만
그런 기적으로 인해서, 무조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것을 경계하셨고,
또한 그 병자가 ‘간증전도자’가 되는 것도 경계하셨던 것 같다.
20~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공리주의, 실용주의, 실증주의의 영향으로,
‘일단 사람이 많이 모여야 한다’, ‘일단 번듯하게 지어놓고 봐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있다.
개인적으로도 ‘일단 번듯하게 성공해야 한다.’
‘일단 남 보기에 그럴듯하게 살아야 한다’ ... 이런 생각들이 너무 강한 나머지
<십자가의 길>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아가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 결과, 겉포장은 기독교인데, 속내용이나 방법론이 전혀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기독교가 <외형화>에 많이 치우쳐 왔고, 그런 것도 한 때는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를 말하는 지금 이 시대는
기독교가 점점 <내면화>로 가야하는 시점에 와 있다.
무조건 소문내서 알리거나 사람들 많이 모으는 일에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서
점점 내면적인/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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