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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의

LNCK 2009. 6. 10. 16:12
 

◈하나님의 공의                     시51:4                    설교녹취, 아마2007년초 설교

              



                                                                


구원 받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부터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지 못하고 받는 구원... 한 번 재점검 해봐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무시하는 전도 와 구원

오늘날 전도지를 보면, 한결같이 어떤 말씀이 전해지느냐 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이 있다’는 식으로 전한다.


그 말씀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죄인들에게 ‘제일 먼저’ 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그런 식으로 (희망차게) 전도하신 적은 없었다.


그런 전도 방식이 나쁜 것은,

오늘날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신자들이 양산되고 있다’는데 있다.


18세기 1차대각성 운동 때 전도한 방식은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이 있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이란 메시지로 전도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은 출애굽 백성들

히브리 백성들은 애굽에서 강제 노역을 당했다.

그들의 삶은, 오늘날 북한의 정치교화소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히브리 백성들은, 피라미드 공사에 동원되어서,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모른다.


이때 그들은 자기 민족의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다.

주님은, 처음에 9가지 재앙을 일으키셨다.

그 재앙 속에서, 애굽 백성들은 고통을 받았지만, 히브리 백성들은 보호받았다.


그런데 애굽 백성이나, 히브리 백성이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마지막 재앙이 있었다.

어린 양을 죽여서, 그 피를 문설주에 칠해야 했었다.

9가지 재앙에서 구원을 받아도,

마지막 10번째 재앙에서 구원받지 못하면 출애굽을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기 전에는,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히브리 백성들이, 유월절 규례를 통해서 출애굽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 받은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깨닫지 못한다.

자연인은 본질상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계시기 때문이며,

그 붙드신 손이 우리를 놔 버리면,

우리는 즉시 진노의 심판의 구덩이에 미끄러져 떨어져 버린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뜻은,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가.. 먼 미래에 닥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범죄한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아래 있으며  (요3:18 참조, 이미 심판 받았음) 

그것이 당장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 집행이 잠시 유예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회개할 시간’을 주시는 것이다. 


▲인간을 기쁘게 하는 변질된 복음

오늘날 복음이 너무 변질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이 아니라,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한 복음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지 않는다. 결국 회개로 인도하지 못하는 복음이다.


출애굽 할 때 피를 문설주에 칠했다.

그래서 누구나 명백하게 그 피를 볼 수 있었다.


그 어린양의 피는, 피를 칠한 목적은, 그들을 구원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해주시는 피>였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것이, 어린양의 피>였다.


오늘날의 복음은,

죄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죄책감을 덜어주는(살짝 가려주는) 식으로 ..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복음은,

죄인들의 죄를 더 드러내고, 죄책감을 심어주어서

회개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는 어린양의 피를.. 죄인들로 하여금.. 간절히 구하게 한다.


▲고전적 전도방식

우리가 진정한 죄인임을 깨닫는다면

나 때문에 똑같이 괴로워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함 앞에 나아가 회개하며

그 분의 진노를 피해야 한다.


우리가 존경하고 따르는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과 찰스 피니 전도자는

늘 ‘회개하지 않은 교인들’에 대해.. (귀 따갑도록) 많은 설교를 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회개하지 않은 교인들’에게 .. 주로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이 있으십니다.’ 등이다. (특정 단체 비난하는 것 아님)


▲여러분, 우리들의 실상은, 무기수 아니면 사형수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언도되어 있다.

그 사형수들에게 어떤 교도관들이

‘우리 교도소는, 당신들 사형수들을 위로하기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해봐야.. 모두 헛것이다.


그들이 깨달아야 하는 것은

‘왜 사형을 당해야만 하는지’를 깨닫게 하고

‘어떻게 하면 그 사형을 면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과 찰스 피니는 이렇게 외쳤다.

‘회개하라!’


그 때 성령이 역사하시면서

청중들의 마음에 거룩한 두려움이 임하기 시작했다.

청중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죽을 죄인인지 깨닫기 시작했으며,

자기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기도하지 않았다.

‘내가 천국 간다는 확신을 주시옵소서’ 라고 구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천국 간다는 확신이 없었다.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너무 두렵고, 자신의 죄책이 너무 무겁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진정 회개하고, 천국에 분명히 갈 것이다.


오늘날,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진 경우가 너무 많다.  우려스런 현상이다.



◑주의 판단은 의로우십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51:4


다윗은 자기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죄를 범했다. (밧세바, 우리야 사건)

그런데 다윗이 회개하는데, 이렇게 고백한다.


‘제가 지옥에 가든지, 천국에 가든지

제게 대한 주님의 판단/처분은 공의롭고, 정직하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라고 본다.

무슨 처분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자세이다.

you are proved right when you speak and justified when you judge.  시51:4


찰스 피니도 괴로움 속에서 똑같이 고백했다.

‘주님 제가 만약에 지옥에 간다면,

저는 지옥에 떨어지는 순간, 나를 향한 당신의 판단은 영원히 맞다고 찬송하겠습니다.’


다윗과 똑같은 고백이다.

다윗과 피니가 - 구원의 확신이 흔들렸다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


그만큼 죄의 권능을 깊이 알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였으며,

구원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매일의 삶을 조심하며 살았다는 뜻이다.


에드워즈나 피니가 강조한 것은 ‘구원의 완성’이며, ‘성도의 궁극적 구원’이었다.

‘성도의 세상에서 성공, 출세’가 아니었다. 그런 것을 언급한 적이 없다.


▲회개한 죄인의 고백 - ‘주의 판단은 의로우십니다!’

오늘날 구원 받았다고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기뻐하는 말씀들만을 걸러서 듣고 있다.

그러다가 천국문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천국 문이 열리지 않으면서,

대신에 ‘나는 너를 알지 못하노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릴 때


회개한 죄인들의 고백은 이렇다. 다윗처럼, 찰스 피니처럼

‘당신의 판단은 절대로 의로우십니다!’


②그런데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의 고백은 이렇다.

‘믿은 내가 잘못이지, 도대체 나처럼 억울한 사람이 어디 있어?’

-이렇게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은 .. 아직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위의 천국문 앞에서의 장면>을 그대로 예고편처럼 볼 수 있는데,

혹시 이 세상에서 자기 죗값으로 혹독한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즉, 사고를 당해서 불구가 되었든지, 사업이 망해서 빚쟁이가 되었든지 했을 때


회개한 죄인들의 고백은 이렇다. 다윗처럼, 찰스 피니처럼

‘당신의 판단은 절대 의로우십니다!’ (무조건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


②그런데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의 고백은 이렇다.

‘믿은 내가 잘못이지, 도대체 나처럼 억울한 사람이 어디 있어?’

-이렇게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은 .. 아직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다.


나중에 죽어서, 천국 문이 자기 앞에 열리지 않을 때

그는 똑같은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을 것이다.

‘믿은 내가 잘못이지, 도대체 나처럼 억울한 사람이 어디 있어?’

그 때까지도 여전히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철저한 죄인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간증

이 땅에서 ‘백화점 여직원’같은 교인들이 많다. (백화점 여직원께는 죄송)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지만, 겉으로는 친절과 미소로 살짝 코팅한 사람들이다.


진정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서, 마치 못 박은 것처럼 

남들도 그렇게 알고, 자기도 그렇게 속고 살아간다.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렇다.


과거에 제 별명이 ‘천사’였다. 사실이었다.

말도 항상 부드럽게 했고, 시장에서 물건 살 때도 항상 친절하게 대했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저는 존댓말을 썼다.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그래서 나도 내가 ‘천사’인줄 알고 .. 오래 동안 살았었다.


그러나 주님이 제게 큰 실패와 극심한 고통을 주셨을 때

그렇게 존댓말 하던 내가.. 말투가 급변했다. 혈기가 가득했다.

나는 절망 중에 회개하게 되면서 깨달았다. ‘내가 철저히 죽을 죄인인 것을’

‘나는 천사가 아니었다’ - 그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아니 구제불능의 죄인이었다.


내가 실패했을 때, 즉시 회개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반응은 반항과 원망이었다. ‘나 환갑 될 때까지는 교회 절대 안 갈거야!

혹시 애를 낳으면, 애는 교회학교에 보내드리지. 그러나 나는 안 가!’


그러다가 완전히 깨지고 나서.. 비로소 나는 회개하게 되었다.

완전히 회개한 사람에게는.. 원망과 불평이 사라진다.

대신에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니이다!’ 라고 고백한다.


▲나의 실패와, 이웃의 실패 속에서 회개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나의 실패 속에서 회개할 기회를 갖는 것은.. 당연하고

눅13:1~5절에 보면,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을 두고

‘회개치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다.  눅13:1~5

- 이웃의 망함을 보면서.. 미리미리 회개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종종 주님이 원망스럽고, 불평이 나오는 것은

아직 완전히 회개하지 않을 때.. 그렇다.

아직 자기에게 선한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있고, 자기가 의롭다고 느끼니까

‘주님이 실수하신 겁니다. 주님이 야속하신 겁니다. 주님이 저를 멸시하시는 겁니다.’ 한다.


다윗은 자기가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었을 때

‘주님이 내 왕위를 폐하신다 하더라도

나는 주의 판단이 의롭다고 선언합니다.’ 라고 고백했다.


이런 ‘죽을 죄인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진정한 회개를 한 사람의 표시다.

자신이 죽을 죄인, 가장 낮고 비천한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의 무슨 판결이든지.. 항명하거나, 상고하거나, 대들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런 회개에 이르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거기서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욥이 극한 고통과 시련을 거친 다음에 나온 고백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며 회개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고, 의롭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감추어진 깊은 죄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는 말

복음은 .. 좋은 소식이나

듣기에 좋은 소식이.. 사람을 죄책으로 이끌며,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듣기에 싫은 소식이.. 죄인을 죄책으로 이끌며, 회개로 인도하고, 구원한다.


이렇게 어렵게 <회개를 통해> 구원 받은 사람은

자기가 죽을 죄인임을 깨닫기 때문에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다’고 고백한다.


또한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도.. 애쓰게 된다. 애타하게 된다.

자기 혼자 받은 구원으로 .. 절대 만족할 수 없다.

 


▲관련 글 : 조나단 에드워즈,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