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Z36fsItVJzA
◈룻이 선택한 ‘망하는 길’ 룻1:6~14 -출처, 녹취-
(아마 2007년초 설교)
◑1. 하나님 나라는, <참 회개한 한 사람>을 통해서 시작된다.
▲서론 : <한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새 역사
성경의 역사는, 신기하게도 ‘한 사람’에 의해서 뒤바뀌진다.
그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새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본다.
단 한 사람의 순종으로!
예를 들면,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아브라함
히브리 민족을 구한 요셉
애굽 노예로부터 해방시킨 모세
사무엘과 그 어머니 한나 등
신약시대에 사도 바울 등 그 외에도 무수히 많다.
그런데 그 ‘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거의 다 불행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을 따랐기 때문에 생긴 불행이었다.
▲서론 : 망한 가운데서 오히려 소망을 찾은 <나오미와 룻>
나오미는,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자, 모압 땅으로 이민을 떠난다.
그런데 그곳에서 10년 정도 사는 사이에, 쫄딱 다 망한다.
그리고 종종 회개는, 쫄딱 망한 가운데서 비로소 되어진다. 룻1:20~21
나오미와 룻은, 모든 것을 잃어버려서, 오히려 소망이 있었다.
전능자가 심히 나를 괴롭게 하셨으니 1:20
주님이 자기를 쫄딱 망하게 했다고...
그래서 자기를 ‘마라’(쓰다/괴롭다)라고 부르라는 말은.. 회개의 자세/마음을 뜻한다.
주님이 내 모든 것을 없어지게 하셨을 때,
그 때가 사실은 새생명, 부활의 삶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사실은 우리가 거의 모든 것을 잃어서.. 문제가 아니다.
사실은 우리가 아직도 뭔 가가 남아 있기 때문에.. 문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기 전에는,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기/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1. 예레미야가 깨달은 인간의 부패성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17:9
사람은 얼마나 부패한지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면서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갈파했다.
그는 이스라엘 국가가 망할 것을 예언을 통해 <알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당시 사람들은 도저히 <알 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결국에 유다 왕국은 바벨론 포로가 되고 말았다.
여러분, 우리는 평생 알아가야 할 것이
주님의 크시고 위대하시고 엄위하심을 알아가야 하듯이
인간의 부패함, 타락함, 죄악된 속성을 더욱 깨달아가야 한다.
주님은 우리들을 슬픔과 아픔 가운데, 회개와 참 믿음을 주신다.
쫄딱 망해서 슬픔과 아픔 가운데... 회개하게 된다. 인간의 부패성을 비로소 철저히 깨닫게 된다.
▲2. 욥의 고난은.. 욥을 회개시키기 위한 것
우리들은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신 슬픔 가운데
진정한 회개를 드릴 수 있었던 한 사람을 본다.
그 불행과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친구들이 ‘회개하라’고 권면했다.
그러자 욥은, ‘자기는 회개할 것이 없다’고 우겼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회개의 은총을 주셨는데,
그 회개는, 물론 친구들이 말한 범죄와 그런 회개가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중에 정죄한 친구들을, 욥에게 용서빌게 하셨다.)
욥의 회개는,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회개였다.
욥은, 내가 스스로를 한(탄)하고 주 앞에 회개하나이다 라고 했다.
자기 스스로를 미워했다는 뜻이다.
더 이상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욥에게 있어서, 새출발이었다.
(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회개에 이른 것이다.
예레미야가 탄식한 대로,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인 것을
욥은 비로소 자기 스스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쫄딱 망한 나오미가, 또한 자기를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나오미=예레미야=욥)
▲3. 망하는 길을 선택한 룻
그런데 오르바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뭔가를 얻을 길/자기 살길을 찾아 떠났다.
그런데 룻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오미를 따라갔다.
시모 나오미에게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었다. 빚을 상속 받는다면 모를까...
아니 사실 룻은, <나오미의 하나님>을 따라간 것이다.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요
비록 그 길이, 자기 수중에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정말 어리석은 선택인 것 같았지만,
자기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자(룻)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자(나오미)를 따라갔다.
여러분, 하나님이 망하게 하실 때는, 발버둥 치지 말고,
인간적으로 어떻개 해서든지 만회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망해 버리시라.
그 때 '철저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리고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다. 욥이 그랬고, 나오미가 그랬고, 룻이 그랬다.
그런데 우리 각자는 '체면'을 목숨보다 중요시 여긴다.
그래서 절대로 망한 티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오르바처럼 살길이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다.
오늘 나의 삶은, 오르바인가/ 룻인가?
내가 믿다가 어려우면, 살 길을 찾아서 떠나는 것이 ... 내 신앙의 동기인가?
아니면 룻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나오미의 하나님을 쫓아가는 사람’인가?
우리가 받는 세례는 ‘내가 죽는 것이요,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표이다.
내가 죽은 사람은,
자기가 뭘 빼앗기든지/얻든지.. 그것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날 현대의 성도들이 잃어버린 교훈이다.
우리가 죽을 죄인임을 깨닫고, 세례를 받고
내가 주님과 함께 장사지낸바 되어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도 세상에 대해서 이제부터 죽는 마음으로 신앙을 배우기 <시작>해야 하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믿습니다. 아멘!’으로 <끝>내버린다.
여러분,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우리는 일평생 점점 더 깊이 알아가야 한다. 이것은 평생 작업이다.
하루 만에 그 깊이를 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십자가의 깊이를 더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성도는 자기의 부패함과, 자기 죄악의 깊이를 더 깊이 깨닫는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런 것의 중요성을 아예 깨닫지 조차 못한다.
‘본질이 다른, 이상한 기독교가 되어버렸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4. 쫄딱 망한 후에,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된 사도바울
사도바울은 처음 믿을 때부터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리고 자기 일생에 받을 고난을 예언으로 받는다.
그리고 놀랍게 하나님께 쓰임 받는데...
그러나 빌립보서에 말하기를 그는,
‘나는 아직 잡을 줄로 여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부활의 권능에 참여함을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빌3:10
그는, 우리가 평생 믿어도 체험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를 다 체험하고도
빌립보서를 썼던 시점이, 다메섹 체험 이후 약 25~30년 지나서이다.
그 때도 여전히 ‘알고자 한다/배우고자 한다’고 말한 ‘구도자’였던 것이다.
'내가 십자가를 다 알지' 라고 큰소리치지 않았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십자가를 점점 알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 지구상에 지금도 얼마나 많은 불행이 있는가?
지금도 이 순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지옥으로 가고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 믿어서 자기 혼자, 복 받고 잘 살겠다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제정신이겠는가?
십자가의 주님을 알면 알수록,
자기 죄의 심각성을 깊이 볼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만히 혼자서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또한 보게 된다.
▲나오미는, 자기의 모든 것을 빼앗은 분이 ‘전능자’임을 알았다.
놀랍게도 나오미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으므로
풍족하게 나갔더니, 나로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느니라고 말한다. 룻1:20~21
그런데 이때부터가 나오미의 일생이 성경과 역사 속에 기록될만한 삶이
시작될 줄 누가 알았으랴?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게 무엇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물질, 명예, 자존심 등)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본인이 아무리 (업적, 경력, 물질) 쌓아도,
어쩌면 썩어질 것들을 쌓는 수고가 될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잃어버려서 더 이상 스스로 만회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그 곳,
그 곳에서, 욥처럼 깊이 회개하고, 자기의 부패성을 철저히 깨닫고, 거기서 주님을 바라볼 때
영원히 쇠하지 아니할, 영생에 속한 인생이 새로이 시작된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의 기독교가 소홀히 하는 통찰력이다.
오늘날 나의 삶은
오르바의 삶을 사는지, 룻의 삶을 사는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한다.
오르바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조금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기억되지 못할 그런 인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룻은, 아무 것도 없는/보탬이 안 되는 나오미와, 나오미의 하나님을 따라갔는데,
그가 예수님을 낳는 메시야의 조상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고 하셨는데.
룻기 1장에도,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살짝 감춰져 있다.
룻이, 바로 그런 역사를 이루었다. 하나님을 믿고서 죽고자 했는데.. 기적처럼 부활한 것이다.
▲5. 한나라는 불행한 여인
브닌나는 자기 남편에게는 잘 대했는지 모르나, 한나를 괴롭혔다.
게다가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마저 한나 편을 들어 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한나에게는 자녀를 주시지 않았고,
자기를 대적하는 브닌나에게는, 하나님이 자녀를 잘 주셨다.
우리가 전도할 때 마다 꼭 질문 받는 것은
‘어떻게 하나님이 악당들을 심판도 하지 않고, 저렇게 잘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그리고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보니까 꾀재재하고, 안 풀리는 사람도 많고...’
왜 그러냐고, 그래서 예수님 못 믿겠다는 항의성 질문을 받는다.
한나도 그랬다.
그러나 한나는 그 가운데서, 자기의 마음을 통곡하고 하나님께 나아갔다. 삼상1:10
그런데 그런 한나의 간절한 기도는 엘리 제사장에게 ‘술취한 여자로’ 오해받게 된다.
그러나 한나는, 개의치 않고, 자기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은 이유로
더욱 자기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았다. poured out (개역은 마음을 통했다) 1:14
어떠한 절망과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삶 속에서도
한나처럼
주님 앞에 자기 심정을 모두 쏟아내 부어버릴 정도로 격렬하게 기도할 수 있다면,
주님은, 지금까지 자기의 고통과 고난이 얼마나 의미가 큰 것이었음을
반드시 알게 하실 것이다.
문제는 우리들이 그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그 부활의 삶/회복의 삶을
‘받을 만한 그릇이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죽고자 할 때.. 반드시 나타난다.
▲쫄딱 망하지 않은 나 ... 자존심을 언제나 앞세운다.
제가 괴로울 때는 언제나 ‘죽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든다.
그런데 그럴 때 주님을 바라보면, 꼭 주님이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아니,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지금 빨리 죽어서 천국 갔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바로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때, 주님은 무엇을 하라’고 시키신다.
저는 그런 일을 몇 번 겪었다.
그러면 제 기도가 바뀐다.
‘주님, 죽고 싶습니다’ 하던 기도에서 → ‘주님, 죽어도 그 일은 못하겠습니다.’로 바뀐다.
주님이 ‘이것 하라’고 마음에 감동을 주셨지만, 내가 버티는 것이다.
‘딴 사람 시키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도 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죽기까지 한다.
내가 죽어도 못 하겠다는 이유는, 사실은 내 자존심 때문이다.
죽어서 빨리 천국에 가고 싶다는 이유도, 사실은 내 자존심 때문이다.
주님은 그렇게 십자가에 자기(자아/자존심)를 못 박으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못 박을 만한 것만 박고, 진짜 자존심은 절대 못 버린다.
여러분, 우리 신앙은 시작부터 <주님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놓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을 멀리하고, 범죄하게 되고
사탄이 좋아할 일을 하게 된다.
◑2. 하나님 나라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앞서 언급한 나오미나 룻, 한나.. 모두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도대체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뭐 특별히 기대될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은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기대하시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어떠한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해서 자신의 부패성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면서
오직 주님 만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와 하나님 나라를 살리는 일을 행하신다.
▲미워서 팔아버린, 그래서 잊혀져버린 요셉
그가 나타나 자기들을 살릴 줄을.. 그의 형제들 중에 누가 알았겠는가?
룻은, 오늘날로 말하면, 홈리스 피플(노숙자)이었다.
그저 하루하루 생계를 힘겹게 이어가야 하는 최저층 극빈자였다.
남의 밭에서 추수하다가 버린 찌꺼기 이삭을 주워서, 먹고 사는 인생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 곧 시작될 다윗 왕조의 창시자, 또한 메시야의 예표
다윗 왕의 할아버지(오벳-이새-다윗)를 잉태할 줄이야 .. 누가 알았으랴?
여러분, 우리의 절망과 불행 속에
놀라운 소망이 감춰져 있다.
(룻처럼) 죽고자 하는 길을 선택할 때에만
감춰진 그것을 만나게 된다.
▲저는, 이제껏 정말 절망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위 설교 내용이다.
절망은, 이 땅에서 썩어질 것들을, 거두어서 불사르는 ‘정화의 기간’이 된다.
또한 절망은, 그 때부터 하나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부활의 시작’이다.
이것은 절대 과대광고가 아니다.
다만 진실일 뿐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오르바의 삶을 선택하느냐?’
‘룻의 삶을 선택하느냐?’이다.
‘살 길을 선택하느라고 발버둥치는가?’
아니면 ‘믿음을 따라서 죽을 길을 선택하는가?’의 결단의 차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자꾸 무엇을 얻고자 한다.
끊임없이 자기 살길을 찾는다.
모세도,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 왕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히11;25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연단 받고, 고난 받는 쪽으로 선택했다.
그에게는 자존심, 체면, 모든 것의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올바른 신앙적 선택이었다...
성현경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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