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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보는 눈이 거듭나야 합니다 행10:9~16 09.05.24.설교스크랩, 정리
사도행전 10장,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한 본문은,
유대인이 이방인을 바라보는 편견이 비로소 깨어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꼴 보기 싫은 사람 다 없어졌습니까?
또한 미운 저 사람은 ‘정말 없었으면 좋겠어!’ 그런 사람 다 없어지셨습니까?
완전히 해결 되셨습니까? 사람을 보는 눈이 거듭났습니까?
예수 믿기 전에는 누구나 마음에 드는 사람/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정말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 멀리 하고 싶은 사람,
나쁜 사람,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았습니까?
사람을 보는 눈이 딱 갈라져 있었습니다.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네, 저 사람은 상종할 사람이 못되네.’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순간에 그것이 확 바뀌어버립니다.
꼴 보기 싫었던 사람이 내게 너무 고마운 사람으로
사랑이 그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 이것은 기적입니다.
예수 믿는 가장 놀라운 증거, 마음에 정말 예수님을 믿었다 하는 분명한 증거가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져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되셨습니까?
그런데 우리 안에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사람을 보는 눈이 편견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인들끼리도 그럽니다.
▲하늘나라는 회개한 자만 들어갑니다.
지난 2005년 4월 8일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 한 분이 피를 토하는 공개 회개를 하였습니다.
"해방 직후에,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한 목사들을 두고 ‘마귀당’이라고 하고
밥도 같이 먹지 않았습니다. 처음의 뜻은 좋았지만
내가 잘났다는 교만심이 커지고, 판단만 하고, 사랑은 흐려졌습니다.
평생 나 자신이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았으면서도
가장 무서운 교만 죄를 가지고
함부로 입을 열어 정죄하고 저주했던 죄를 지었습니다.
하늘나라는 회개한 자만 간다고 했습니다.
이 교만했던 죄와 부족한 종이 바로 죽을 수 있도록 축복해주길 바랍니다."
하며 목이 메인 채 고백을 마쳤습니다.
우리가 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안에 말도 안 되는 편견이,
하나님이 절대로 그런 것을 가르친 것도 없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 때문에, 고집 때문에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구분해 보는 것입니다.
▲‘범죄’보다 ‘정죄’가 더 큰 죄
하나님이 주시는 눈으로 보지 않고,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보는 것이
교회 안에도 얼마나 뿌리 깊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편견 중 하나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술, 담배, 음란, 방탕, 자살은 큰 죄로 여깁니다.
그러나 더 큰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경멸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 <정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눈에 티와 들보로 비유하셨습니다.
이웃의 범죄가 ‘티’라면,
그의 범죄를 보고 정죄하는 것은 <들보>, 즉 더 큰 죄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니까, 잘못 했다고 보이는 것이지요.
술 담배가 어떻게 괜찮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음란방탕한 일을 어찌 그냥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자살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그런 사람을 내가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 마음은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죄라는 것입니다. 그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더 심각한 죄냐 하는 것을!
정죄는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는 무시무시한 교만입니다.
▲똑 같은 죄인
유명한 부흥사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한번은
어느 교회 헌신 예배에 초빙을 받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니 한 평신도 지도자가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 자주 술에 취해서 덕을 세우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징계해야 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그랬으니
권면해서 듣지 아니하면 징계를 해야지요.
그러나 그 구절 뒤에 이어서 보면,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했으니
성령 충만함을 받지 못한 사람도 동시에 징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했답니다.
술 마시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말 성령이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해서,
내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가는 역사가 없는 것도, 똑같은 죄라는 것입니다.
서로 죄를 따질 것이면, 정확하게 따져야한다는 것이죠.
▲복음을 믿는 사람은, 남을 결코 비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나는 괜찮은데, 저 사람은 나쁘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자기도 욕심이 있으면서 남이 욕심을 부리면 비난합니다.
자기도 거짓을 품고 살면서 누가 거짓말을 하면 막 화를 냅니다. 참지 못합니다.
자기도 이기적이면서 이기적인 사람을 보면 정죄합니다. 이기주의자라고 경멸합니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그가 정말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자신이 얼마만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많은 성도들이 전적인 타락을 분명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적인 타락이란 우리가 너무나 타락하여
우리에게는 조금도 선한 것이란 없고, 내가 하는 것은 다 죄고,
우리는 이 세상 가장 흉악하고 저질스런 자와 사실상 같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전적 타락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진정 믿는다면 누구도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이라고 정죄했던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의 마음은, 내가 욕하고 비난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그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용서 못할 사람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고부간의 갈등을 해결한 평양대부흥
1907년 평양에 강력한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을 때,
미국 선교사 요나단 고우포스가 그 당시 일들을 기록해 두었는데,
그 책을 읽어 보면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예증하면서
일례로 성도들의 가정에서 ‘고부’간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이 선교사가 한국의 고부간의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해서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 보았던 것입니다.
시댁이 싫어서 시금치도 안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문제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이 전해지고 성령충만하니 이 문제가 해결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 보는 눈이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심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모든 천사와 함께 다시 오실 때,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나누어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게 되고,
왼편에 있는 이들은 저주를 받아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교회 열심히 다닌 것이 아닙니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편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왼편 사람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45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심판의 기준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사람 보는 눈이 거듭났느냐/아니냐에 따라 오른편 왼편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그들이 누구입니까?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처럼 보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독일군 포로를 사랑한 처칠 수상
처칠은 세계 2차 대전 중에 독일과 싸울 때
런던 시가지는 불바다가 된 채 방공호에서 18시간씩 근무하면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독일에서 날아 온 로케트가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떨어져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처칠은 그것을 보고 국회에 포로수용소를 좀 더 안전한 지역을 옮길 수 있는
예산 배정을 청원하였습니다. 국회의원들은 완강히 반대하였습니다.
자정까지 회의를 거듭하다가 결국 자정에 가서야 통과되었습니다.
처칠 회고록에 처칠은 그 순간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국이 승리한 열쇠였음을 아십니까?
처칠 회고록으로 처칠은 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바로 이 대목을 보고 선정하였다고 합니다.
▲부모를 바라보는 눈이 변한 청년들
지난 한 주간 젊은이교회에서 부모 위한 특별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매 시간 눈물 바다였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부모로 인한 상처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집회 후 모든 청년들의 부모가 다 좋은 부모가 되었습니다.
청년들의 눈물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부모들이 다 변화되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예전과 똑같습니다.
다만 기도를 한 청년들의 눈이 변화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부모가 없습니다.
상처를 준 부모도 주 안에서는 다 좋은 부모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부모로 인해서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에 대하여 불 같이 화내고, 비난하고, 욕한 적이 없었습니까?
“사람이 그럴 수 있어? 그런 사람 가만 두면 안 됩니다. 그 사람하고는 못 살아.
우리 동네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내보내야 해요.” 하면서
비난하고 분노했던 적은 없었습니까?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본성은 그러니까요.
우리 눈에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문제 많은 사람들, 정말 상종하기 싫은 사람,
같이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가 아직 거듭나기 전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 안에서 거듭났다면 눈이 열려서
‘하나님은 내가 정죄하고 싫어하고 판단하는 그 사람을 어떻게 보실까?’
하는 눈이 뜨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요?
하나님은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도 싫어하실까요?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도 그렇게 보실까요?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 다 감격합니다.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은 나를 사랑의 눈으로 여전히 보시고
당신의 독생자까지 주셔서 우리가 구원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만 그럴까요?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사람도 똑같습니다.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 사람도 하나님은 사랑하는 눈으로 보십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미워할만한 일이 있으니까
미워하고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으니까 마음에 안 드는 것이지만
우리가 아직도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이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주셨다고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증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말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네가 미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네가 판단하지 말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네가 무시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성도 여러분, 십자가 때문에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까?
십자가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우리에게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고후10:5절 말씀처럼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여야” 합니다.
방법은 십자가의 능력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을 믿으면 우리 눈이 바뀝니다. ▣ 크리스천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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