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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하나님의 형상 1947

LNCK 2009. 6. 19. 15:22
 

◈하나님의 형상                   창1:26~28                   09.05.22.설교녹취요약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바쁘게 달려가는 사람들


▲너는 누구냐?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장영희 교수의 2004년 중앙일보 칼럼,

(서강대 영문학 교수, 암투병 교수로 유명했다)


어떤 중년여인이 중병에 걸려 가사상태에 빠졌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선상에서 헤매는데,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너는 누구냐?’

‘저는 쿠퍼 시장의 부인입입니다. 이 도시 시장의 안 사람이죠.’


‘나는 네 남편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제니와 피터의 엄마입니다.’


그 목소리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재차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나는 네가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교사입니다. 학교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나는 네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매주 교회에 다녔고, 남편을 잘 내조했고, 제 직업에도 충실했습니다.’


‘나는 네가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결국 이 여자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그 후에 그녀의 삶이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정녕 알지 못하고 살아온 나날들을 반성했다는 것이다.


그가 그 때 쓴 칼럼을 계속 들어보자.

 

(장영희 교수가) 어젯밤 무심코 TV를 켰는데, 옛날에 유행했던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 때 꿈은..


30년 전에 유행했던 노래였다. 흘러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나는 거침없이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라는 가사처럼

내 삶은 '무엇 무엇을 하려다가 그대로 지나가버린 삶의 연속'이었다.


내가 이제 죽어 누군가 내게 ‘너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위 쿠퍼 여사처럼)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나도 이야기 속에 여자처럼 ‘나는 서울대 장OO교수의 딸입니다’ 라고 대답할까?

아니면 ‘나는 어느 대학의 교수이고..’

진정 나는 누구라고 답할 수 있을까?


명마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뛴다고 했다.

나는 명마가 되기 위해, 지금까지 뒤 한 번 안 돌아보고 오직 앞만 보고

좀 더 좋아 보이는 자리, 좀 더 편해 보이는 자리를 위해 질주했고,

지금까지 숨을 헐떡거리며 이 자리까지 왔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오늘 도착한 우편물 겉봉에 보면,

장영희 교수, 박사, 자문위원, 이사 등 타이틀도 다양하지만

그 어느 것도 진짜 내가 누구인지 말해 주지 않는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것이 뭔지

지금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뭔지 조차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나는 이제까지 나만 쳐다보고 살았는데,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내가 나를 제일 잘 알아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당신은 누구신가?

‘저는 분당에 살고, OO교회에 다니고,

(장영희 교수처럼) 이제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라고 대답하실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 각자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정녕 모르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김교수, 언제 당신이 한 번 남을 위해 살아봤어?

저희 학교 근처 산에 7십만 볼트짜리 송전탑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송전탑을 이전 설치해 달라고, 한전 측에 항의성 데모를 벌이고 있는데,

교수인 내가 구경만 할 수는 없고, 나도 데모에 동참을 해야 하니, 짜증이 났다.


그랬더니 선배 교수께서 대뜸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김교수, 당신이 언제 남을 위해 한 번 살아본 적 있어?

여태까지 자기만 위해서 살다가, 요즘 며칠동안 남(학생들)을 위해 살아보려 하니

힘들어서 성질부리는 거지?’


정말 나를 열 받게 하는 말이었다.

‘아니, 제가 어떻게 나를 위해서만 살았다는 겁니까?’

‘당신이 공부한 것이, 또 연구한 것이, 남을 위해 살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한 번 생각해 봐, 공부하고 유학 갔다 온 것이 자기를 위해서 산 것이잖아?’


서로 친하니까, 우스개 소리로 주고받은 한담이었지만, 따지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도 지금까지 오직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오직 준마처럼 달려오기만 했던 것이다.

 

▲일생을 전 존재로 살면서 대답해야하는 답변

‘너는 누구냐?’에 대한 대답은.. 단 며칠 만에 대답하지 못 한다.

우리 전 생애로 대답해야 한다.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해야 한다.

우리 일평생을 성실하게 살면서, 그 전 생애로서 비로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 OOO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지만

이것은 전 생애를 내 몸으로 그렇게 살아낸 다음에.. 비로소 진짜 대답이 되는 것이다.


‘너는 누구냐?’ ... ‘나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게 정답이지만, 내 삶 가운데서 고민 가운데 길어낸 대답이 만약 아니라면,

아무 현실성 없는 공허한 이론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나의 본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이 뜻하는 의미를 한 번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대신 보여주는 존재


▲고대 왕들이 자기 석상(형상)을 만든 이유

고대 근동아시아에 왕들은, 자기 통치 영역 안에,

자기 모양을 본 딴 석상이나 금신상을 만들어 세웠다.


왕이 육체적으로 그 장소에 부재不在하지만, (왕은 주로 왕궁에 있다)

실제적으로 내가 여기에 임재하고 통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 형상을 만들어서 이곳 저곳에 세워놓았던 것이다.

(비슷하게 3공화국 때, 박대통령 사진을 학교 교실에까지 걸어놓았었다.)


왕들이 정복한 땅에, 왕이 늘 그곳에 기거할 수 없으니까

자기 형상을 딴 석상을 만들어서 거기에 세운 것이다.

 

출애굽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신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바알인데,

그 바알의 이미지를 황소로 만들어놓고, 황소(금송아지)를 섬겼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석상을 만드시는 대신에, 우리들을 형상으로 세우셨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초월해계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신데

그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세상 속에 어떻게 임재 하시는가?


이방의 왕들이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자기 제국 곳곳에 세워 두었듯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들을 택하여, 세상 곳곳에 포진해 두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신데 신4:12참조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고 대변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나의 회복된 모습(형상)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나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큰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이요, 하나님 통치의 대행자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 본래 모습이다.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든지 형상물(조각물)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출20:4등

하나님의 형상(우리)들이 이미 있는데,

왜 하늘에 있는 것, 땅이나 바다에 있는 것으로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것들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 아내가, 매일 저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구역식구들은, 구역장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목자의 음성, 말, 태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 사랑, 인격을 느껴야 한다.


빌립이 하루는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이라고 말씀하셨다. 요14:9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도요한도 이 사실을 잘 깨달았다.

그래서 이웃이 서로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눈에) 보는바 (하나님의 형상인)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눈에)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4:20


사도야고보도 이 사실을 잘 깨달았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약3:9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창세기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사도요한, 사도야고보가 모두 다 강조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신앙의 목표를 놓치고 있다.

기독교를 믿는 이유가 여기(하나님 형상의 회복)에 있는데,

이런 중요한 원리를 놓쳐버리고, 대신에 성공/현세적 번영에 목표를 두는 것은

그야말로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전도도, ‘하나님 형상’이 먼저 회복되어야.. 비로소 전도가 된다.


▲하나님 형상을 보여준 예, 장기려 박사,

그가 막사이사이 상을 받고 쓴 글에 보면, 상 받은 사실을 오히려 고통스러워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형벌까지 받으셨는데

나는 좋은 것을 먹고 입고 마시며, 또 좋은 집에 살면서.. 일해 오지 않았는가.

이렇게 희생 없는 삶을 살면서, (실제로는 많은 희생을 하시면서도 부족하다고 느끼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자만이다.


(막사이사이 상을 받은 것이) 결국 공명심을 바라고 일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부끄럽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먼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형상인 장기려 박사님을 본받아 사는 삶을

오늘 내가 도저히 살기가 힘들다고 푸념하지 마시고, 너무 높으니까,

우리는 그 절반만이라도 따라가는 삶을 살면 된다.



◑‘하나님의 형상’의 신학적 의미


▲1. 자연과 물질세계를 다스리는 존재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고대근동 세계에서는 <왕만 신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왕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은 <신의 노예요, 왕의 노예>이었다.

그래서 왕을 위해서 무슨 토목공사에나 동원되고 그랬다.


그런 사회 분위기속에서, 성경에 보니까

모든 인간은 노예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왕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나와있다.

‘모든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왕’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혁명적이지만 당시로 봐서는) 정말 매우 혁명적인 개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인들은 ‘일벌레, 일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의 심각성은.. ‘하나님의 형상, 다스리는 존재’와 정반대의 삶이라는 것이다.

‘일과 성취’를 마치 신처럼 섬기면서, ‘하나님의 형상’인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자기 스스로 ‘일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모르니까...


▲세상을 다스려야할 왕적인 존재가, 일의 노예가 된 것을 풍자하는 유머가 있다.


하나님이 소를 창조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60년 동안 살아라, 너는 사람을 위해 평생 일만 하며 살아야 한다.”


그랬더니 소는 그 봉사기간이 너무 길다고 느꼈는지, 30년으로 깎아달라고 탄원했다.

그래서 소는 30년만 살게 되었다. (소의 평균 수명이 30년)


하나님께서 개를 만드신 후에 “너는 30년만 살아라, 대신 너는 평생 집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까 개도, “저도 15년만 살겠습니다!” 라고 건의했고, 받아들여졌다.(개 수명 15년)


하나님께서 원숭이를 창조하시고 “너도 30년만 살아라, 대신 너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 재롱을 떨어야 한다!”고 하자, 원숭이도 15년만 살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너는 25년만 살아라, 대신 네게는 생각할 수 있는 머리를 주겠다!”고 하셨더니,

사람은 욕심을 부려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지 마시고, 소가 버린 30년, 개가 버린 15년, 원숭이가 버린 15년을

모두 다 제게 주십시오!”  그 소원도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사람은 25년까지 그럭저럭 살다가

소가 버린 30년을 얻어서, 25~55세까지는 소처럼 죽도록 일만 하고,

개가 버린 15년을 얻어서, 55~70세까지는 (개처럼) 퇴직하고 집만 지키다가 보내고,

원숭이가 버린 15년을 얻은 것으로는, 70~85세까지는 (원숭이처럼)

손자손녀 앞에서 재롱을 부리다가 세상을 떠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누가 만든 유머인지 모르지만, 돈을 벌기 위해 일벌레가 되어 살다가 가고 마는

한국인들의 삶의 모습을 잘 풍자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과 반대되는 삶이다.


그러나 신자는 이렇게 일벌레가 되어, 돈의 노예가 되어 세상을 마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인, 하나님의 형상, 즉 다스리는 자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2. 교제하는 존재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본문에 ‘하나님의 형상’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한 번만 사용하면,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면, 인간은 ‘2인1체’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서로 교제하고 계신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서.. 서로 교제하며 살도록

원래부터 그렇게 창조되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닮았음)이 가진 의미이다.

3위가 일체이신 하나님을 닮아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교제하도록 창조되었다.


*이 의미를 좀 더 확대해서 설명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그 형상을 가장 잘 드러낼 때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며 교제할 때’라는 것이다.


여러분, 사람이 언제가 가장 이타적(비이기적)이며, 사랑이 풍부하고,

하나님의 모습을 엇비슷하게 가장 잘 보여주는가? - 연애할 때다.


인간은 병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가?

- 사랑할 때이다. 그 때 가장 이타적이 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그것이 가장 먼저 가정에서 일어나야 하고,

그 다음에 교회 안에서 주 안에서 형제 자매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도록 하셨는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가족 안에서 ‘사랑’을 배우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이 가정에서 먼저 그것을 배우고,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면서 점점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로 변해가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에 찌들려 살던 한 자매가,

대학에 들어가서 얼굴에 화색이 돌았는데,

사실은 선배 남학생이 ‘네가 좋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예가 좀 그렇지만,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될 때, 사람이 깨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올바른 관계의 사랑을 통해서.. 살맛을 느끼고, 본연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그만큼 사랑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연애 예를 잠시 들었지만,

그 에로스의 사랑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아가페 사랑으로 승화되어가야 할 것이다.


▲3. 사명을 감당하고 책임지는 존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다스리라! 창1:28

 

이것은 축복인 동시에 사명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이 세상에서 제멋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으며, 자기 사명에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사명감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마틴 루터이다. (후략)

                       ※마틴 루터의 사명감에 관한 부분은 여기 참조 → #894 (3항) 클릭             

                                                                                                                                               ▣ 하나님의 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