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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열병에서 안식으로 1949

LNCK 2009. 6. 20. 20:51
 

◈열병에서 안식으로                    막1:29~34                      -09.02.26.설교축약, 출처-


 

▲왜 베드로의 장모를 특별히 부각을 시키는가요? - 기적에 목적이 있다는 뜻

다른 많은 병든 사람이 있었고,

열병보다 더 지독하게 위급한 병들이 있었을 텐데

왜 베드로의 장모를 부각시켜서

이 분이 병 나은 것에 대해서 마가가 특별히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바로 ‘기적 이야기가 의도하는 것이고 있다’는 것이에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기적이야기는 기적 자체를 위해서 기록이 되지 않습니다.


기적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내시려고 하는 제3의 초점이 있다고 하는 것이에요.

기적 자체에 목표를 두고 있지 않아요.


기적은 다 사실이었고 지금 나한테도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만

성경에 나와 있는 기적이야기가 이 기적이

여러분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주목적 아님)

그 기적이 가리키는 ‘제3의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한 번 살펴봅시다.


 

▲초점1. 복음이란 안식일의 회복이다.. 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라고 선언을 한 뒤에  막1:1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서 나은 것, 막1:29~34

그것도 특별히 안식일에 낳은 것을 기록한 이유는 뭡니까?


(막1:21/눅4:31절에 보면, 안식일에 회당에서 들어가셔서 가르치신 후에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지금 마가가 안식일이라는 그릇의 틀에 담는 겁니다.

안식일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이렇게 선언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뭐냐? 안식일의 회복이다... 라는 것이지요.


(4복음서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기적은 대부분 안식일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합니다.

평일에도 기적을 행하셨겠지만, 특별히 안식일에 행한 것만 주로 성경에 기록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의 의미를 가르쳐주시려는 것입니다.)


▲안식을 못 누리고 살던 사람들/우리들

여러분이 십자가 복음 믿으면서 안식 쉼이 생겼습니까? 샬롬과 평강이 주어져요?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안식일에 안식을 누리는 게 아니라

정말 쉼과 평안을 누리는 게 아니라

6백 개가 넘는 안식일 조항을 지키느라고 사람들이 다 찌들어 버렸어요.


안식일에 더 힘들어요.

마치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이 주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가면 더 지치는 것처럼...

회사에 출근해서 일할 때보다 더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안식일을 지키는 게 완전히 짐이고, 부담이고

안식일이 원만하지 못하니까,

안식일이 안식일답게 하늘의 샬롬으로 누려지지 않으니까

우리의 삶 전체가 다 안식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렇지 않겠어요?


안식일에 안식이 되어야 하늘의 힘을 공급을 받고

그 힘으로 또 세상을 살아갈 텐데

안식일에 안식일 규정을 지키느라고 정신이 없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괴롭습니다.

안식일(주일)을 안 지키면 안 지키는 대로 힘들고.. 지키면 지키는 대로 힘들고..


이런 상황인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오시더니

이제까지 서기관들이 전하는 말씀과 다르게 힘이 있으시고 권위가 있으시더니

각종 귀신들린 자들을 다 쫓아내시는 겁니다.


마가가 보고 기절을 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안식일에 도대체...’

안식일이 뒤집어져 버렸어요.


 

▲초점2. 참된 안식은 예수님을 섬기는 것. 가만히 쉬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베드로가 자기 처갓집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갑니다.  막1:29


베드로 장모께서 열병으로 앓아누워 계신 거예요.

오늘날로 치면 말라리아 같은 열병이었겠지요.


그러니까 연세 드신 장모가 열병으로 앓으셨으니까

얼마나 체력소모가 많으셨겠습니까?

예수님이 그 분을 고치시고 일으켜 주셨어요.


그런데 본문에 참 특이한 것이 있다는 것이에요.

장모가 일어난 다음에 예수님을 시중들었다는 기록이 나와 있어요.


이게 참 특이한 기록이라는 것이에요. 왜냐고요?

베드로의 장모집이면 베드로의 아내도 따라왔을 수 있고,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고

동네에서 볼거리도 없고 구경거리도 없으니까

예수님이 이 난리를 치시는데, 다 와서 구경하고 있었을 것이에요.


그래서 여자들 중에 굳이 베드로의 장모만 예수님께 시중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동네여자들이 다 오지 않았겠습니까?

아프다가 당장 일어난 사람을 보고는 다들 ‘쉬세요, 우리가 시중들 터이니’ 하면서

베드로의 장모가 시중들 기회를 가급적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가의 눈에는 그 장모님이 시중드는 것이 특별히 눈에 들어온 것이지요.

그래서 다른 여인들이 시중 든 것은 다 빼버리고

그 장모가 시중 든 것만 기록한 이유가 ... 과연 무엇입니까?


서두에, 기적 사건은 ‘제3의 초점’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한 의도와 목적이 있다는 뜻이지요.


이게 바로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게 쉬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수종을 드는 게 안식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도, 안식일에 많은 섬김과 봉사를 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쳐주시고, 말씀을 가르치시고..,



▲초점3. 열병/질병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참된 안식입니다.

자, 열병에서 나오는 게 안식이에요.

‘안식’과 반대되는 입장이 바로 ‘열병’이라는 겁니다.


그게 열병이든지, 더욱 포괄적으로 어떤 질병이든지

우리 스스로 열병처럼 집착하며 쫓아가는 병적인 집착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질병이 우리를 엄습해서, 본의 아니게 우리가 질병의 포로가 되어서

어쨌든 자유로운 생활을 하지 못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열병에 걸리면..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열병/질병에서부터 놓임을 받기 전까지는

절대 우리에게 안식이라는 건 주어질 수 없고

안식이 주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것들에 대해

내 삶이 진행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에요. 열을 내면서 자식을 기르라고 자식을 주신 법이 없습니다.

자식 땜에 노래하고 자식 땜에 웃고 자식 땜에 은혜가 넘치라고 주신 것이지.

그런데 왜 안 돼요?

내가 ‘자식 열병’이 나 있으니까, 오히려 딴 길로 가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 열병에서 놓임을 받아야 되는데

주님을 수종든다는 게 뭐예요? 받들어 모시는 것입니다. 막1:31


우리가 열병(포괄적으로 집착을 뜻한다고 볼 때)에서 자유하게 되는 길은

주님을 수종드는 것입니다. 주님을 받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의 장모가 한 번 고침을 받았지만

또다시 열병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상상이긴 하지만...


남편을, 아들을, 사업을,

열병에 사로잡혀서 일을 그르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도우는 길은

내가 먼저 주님을 수종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먼저 안식이 이루어질 때

내가 상대하는 남편, 자녀, 사업/직장에도

안식이 따라서 임하는 것입니다. 안식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