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9

결국은 순종하는 믿음이다 1948

LNCK 2009. 6. 19. 20:42
 

◈결국은 순종하는 믿음이다.                      삼상15:22                09.05.09.설교부분녹취



◑잘못된 치우친 믿음


▲1. <지식>에 치우친 믿음

①오늘날 한국을 포함한 서구 세계에서,

‘믿음’이 너무 <지식>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치우쳐 있다.

성경과 신학에 대한 지식은 굉장히 많으나.. 믿음은 별로 없다.


여러분, 성경에 관한 지식도.. 믿음을 더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신학 지식 그 자체로는.. 아무 소용없다.


극단적인 예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구약성경 지식에 능통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날 것인지’까지 다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구약을 아무리 읽어도,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끝내 깨닫지 못했다.

믿음의 실체를.. 순종 없이.. 지식으로만 접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성도가 종국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있어야 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순종의 발걸음’ 없이, ‘성경지식’으로 그것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 결과, 참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②「하늘에 속한 사람」을 쓴 중국의 윈 형제가

서방 세계로 나온 후에 자기가 겪은 체험을 담은 「하늘 생명수」라는 간증집을 썼는데,

그 책에 보면, 서방세계의 신자들은,

성경을 그렇게 많이 알면서도, 정작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성경이 없는 과거 공산권의 신자들,

교회 성도들 중에 성경책을 가진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던 사람들,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몇몇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했다는 것이다.


지식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고,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지식’보다 ‘순종’이 먼저이다.

순종이 없는 지식은.. 아무 소용없다. 참된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 지식이 오히려 자기를 더욱 교만하게 만드는 올무가 될 수도 있다.


③복음서가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다.

바울서신이 강조하는 것은 ‘지식’이다.


그런데 복음서와 바울서신 사이에 사도행전이 있다.

사도행전은 <행함>을 강조한다.

그 때는 아직 성경66권이 완성되지 않았다.

제자들은 복음서만 알고, 바울서신을 몰랐으니까 성경지식이 별로 없었던 때였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그렇지만 전심으로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러 나섰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고,

놀라운 그야말로 ‘사도행전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믿음’은 먼저 <행함>으로 온전해진다.

그 다음 단계로 <지식>이 필요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의 기이한 믿음’

그가 무슨 성경지식이 많아서, 믿음이 칭찬받은 것은 아니다.

‘행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④행함/순종이 없는 지식은, 마치 클러치가 맞물리지 않는 자동차와 같다.

시동은 걸리고 소리는 요란하지만, 차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날 서구의 교회가

<믿음>을 얻기 위해서 ... 너무 <지식>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극단에 빠질 수 있다.

<행함/순종>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도자들부터 <행함>을 자기가 직접 보여주며, 믿음생활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2. <예배>쪽에 치우친 믿음

①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바로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제사가 순종보다 낫다>고 거꾸로 가르치는 것 같다.


순종(말씀의 실천)을 통해서.. 성도가 믿음을 갖게 되는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배를 통해서.. 성도가 믿음을 갖게 된다고 자꾸 가르친다.


물론 예배를 통해서도 믿음이 온전해지지만,

먼저 강조해야할 더 중요한 <순종>을 제쳐 놓고/무시하고

<예배>만 자꾸 강조하는 것은... 그래서는 온전한 ‘믿음’이 생길 수 없다.


②오늘날 성도들은, <예배>에 수없이 많이 참석하고 있지만

여전히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성도들이 교회에 많다.


여러분의 삶에 <순종>을 통한 믿음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 드린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라는 말씀이 실제로 여러분 삶에 적용되시기 바란다. (예배 폄하 아님)


오늘날 기독교가 <순종의 종교>에서 <제사의 종교>로 점점 퇴락하고 있다.

순종의 삶은 어떻게 살든지 별로 개의치 않고

제사에만 꼬박꼬박 참석하면.. 마치 큰 믿음이 되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③여러분,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배를 열심히 드렸겠지만) 예배를 통해서 ‘온전한 믿음’에 이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말씀에 순종해서, 핍박을 당하면서도, 나가서 복음 전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온전한 믿음에 이를 수 있었다.


여러분, 온전한 믿음을 가지셨는가?

만약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행하지 않고도 잘 견디는 것’은

(말씀 지식을 많이 알고 있고, 예배 참석을 잘 해서 별 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병든 믿음이다. 실상이 그렇다.


그 지식에서, 그 예배(종교생활)에서 더 이상 허우적거리지 마시고

결단하시라.

성경을 펴놓고, 내가 순종이 빠진 부분이 어디인지 찾아서, 순종을 행하시라.

그 다음에 지식으로, 예배로, 당신의 믿음을 더욱 온전히/견고하게 다지시라!


④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에 목숨을 걸었다.

그래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때에 성전제사를 지키려다가 엄청난 핍박을 당했고,

로마 제국이 점령했을 때에도, 그들의 제사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 제사를 건드렸다가는, 폭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배에 목숨을 걸고 사수하며, 열심이었던 신자들이

정작 예배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에, 알아보지 못했다. 도리어 죽였다.


무슨 뜻인가?

<순종>없이, <예배> 다시 말해서 종교생활에 .. 그들은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예배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라,

순종이 빠진 예배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예배를 잘 드린다’고 바리새인처럼 자랑하는 데는 혹시 필요할지 모르나...


백부장에게 예수님이 칭찬하셨다.

내가 이스라엘 땅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   눅7:9

백부장은, 예배에 앞서, <순종을 통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인정받았던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믿음이 더욱 견고해져야지,

믿음의 성장도 없는 예배가 계속된다면... 자신의 <순종>을 한 번 점검해보자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풍랑 속에서 드러난다.


종종 우리 삶에 풍랑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믿음>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려고,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시려고, 풍랑을 주시는데...


▲1. 마감 5분전에 응답하시는 이유

풍랑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간절히 구하게 된다.

마치 자석처럼, 믿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주님께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어 있다.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마감 5분전’에 응답되는 체험을 종종 하는데,

그런데 ‘마감 5일전’에는 절대로 응답 안 된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종종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내 기도제목이 주로 <먹는 것, 또는 돈>이 될 때가 있다.

<먹고 사는 문제로> 주로 기도할 때가 있다.


문제는 ‘주님이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이왕 응답해 주시려면, 일찍 응답해 주시면 좋을 터인데,

사람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후에, 꼭 ‘막판5분전’에 응답하신다. 종종 그렇다.

‘미리 응답해주시면 덧나시나?’

그냥 애가 타서 죽기 일보직전까지 기다리셨다가.. 어김없이 응답해 주신다.


그것도 ‘영원한 해결’이 아니라, ‘임시변통’으로 응답해 주신다.

당장 수습할 정도로만 응답해 주신다.

그래서 또 ‘막판5분전’의 스릴과 서스펜스를 기다려야 하는데...


‘좀 미리 안정되게, 넉넉하게 해결해 주시면

복음 전하는데도 더욱 힘쓸 터인데...

먹고 사는 것에 이렇게 진을 빼야 하니... 비생산적이지 않은가?’


여러분, 주님이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의 상태가 ‘먹을 것이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것은.. 일용할 양식이 없었다는 전제다.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은.. 환경이 두려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의 삶에 그만큼 염려가 많았다는 것이다.


왜 주님을 따르던 12제자가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넉넉하면 좋았을 터인데, 복음전파에도 전력투구했을 터인데

이렇게 빡빡한 환경으로 주님이 몰고 가셨던 것일까?


우리의 믿음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이.. 그런 절망적인 상황이 오지 않으면

우리가 ‘믿음만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이 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많은 행동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해결하려는 행동이 거의 다이다.

그 때 주님은, 내 노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신다.

그게 주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내가 믿음만 의지하도록 인도하신다.


제자들은 풍랑이란 ‘상황’을 잠잠케 해달라고 아우성치지만

주님은 ‘너희들 믿음 키우려고, 풍랑 일으켰는데, 아이고 힘들어’ 하실 것이다.(농담)

왜냐하면 제자들이 믿음이 쉽게 키워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판5분전’에 해결되고 나면, 나중에 풍랑도 감사하게 된다.

자기 믿음도 견고하게 자라고..

풍랑도 잔잔케 되면그런 상황으로 몰고 가시느라 애쓰신 주님께,

감사가 자연히 나오는 것이다.


▲2. 풍랑은 내가 스스로 노 젓는 노력을 멈출 때까지 친다.

주님만을 전적으로 붙잡을 때까지.. 풍랑이 계속 치다가 그제야 멈춘다.


암환자 중에, 초기 암환자가 믿음으로 나았다는 얘기는 없다.

초기 암환자는.. 대부분 수술해서 낫는다.

초기 암환자는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자기가 믿는 구석이 있으므로.


그런데 우리는, 어차피 끝까지 가야, 내 노력을 멈추는 데까지 가야

그제야 주님이 전적으로 개입하시고, 풍랑을 멈추어 주신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든지,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든지

둘 중에 1개만 보게 되어 있다. 둘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언제까지 해결 안 되면 나는 끝장나는데...’ (아직 자기 계획이 살아있는 상태다)

이렇게 기도하다가도, 진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기도가 바뀐다.

‘오직 주만이 아시나이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여러분, 절망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절망은 우리를 정결케 하고, 우리에게 온전한 믿음을 도와준다.

절망을 통해서 ‘내 방식의 믿음’을 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절망 속에서 우리는

노를 계속 젓든지, 주님을 깨우든지.. 둘 중 하나만 하게 되어있다.

물론 믿음으로 노를 버려야 한다. 주님을 깨워야 한다. 그제야 풍랑이 잠잠케 된다.


▲풍랑이 없어도 내가 주님만을 바라볼 때까지.. 풍랑은 지겹도록 계속될 것이다.

내 인생에 풍랑을 안 주셔도 될 만큼

내가 믿음으로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될 때가 속히 내게 임하도록.. 믿음이 성장하자.


그럴 때 축복도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다.

일이 저절로 되어질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게 자랐기 때문이다.

축복을 주셔도, 실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 믿음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