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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하지 말라 1985

LNCK 2009. 7. 14. 15:59

◈비판하지 말라                         눅6:37~38                             09.06.14.설교녹취

 

 

◑반대적 측면으로 살펴 본 ‘판단하라’는 말씀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어떤 상황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을, 전면 중지하라는 뜻은 아니다.

모든 종류의 판단과 분별을 거부하라는 뜻은 분명 아니다.

 

▲옳고 그름과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마7:6

이 말씀은 ‘분별하라’는 뜻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옳은 것을 선택하라는 말씀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셨는데 마7:15

여기서 삼가라는 말은 ‘분별하라’는 뜻이다.

그들이 옳고 그른지 분별하고, 그 열매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다. 

 

③예수께서 마10장에서 제자들을 둘씩 짝 지워 전도하러 내보내실 때

어느 마을에 들어가면, ‘어떤 집이든지 무조건 들어가라’ 하지 않으시고

그 마을 사람들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 머물라  마10:11

고 하셨다. 합당한 자를 찾아내려면 분별해야 한다.

 

④사도요한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고 했다. 요7:24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르게 판단해야 한다.

 

⑤사도바울도,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

고 말씀했다.  고전2:15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끊임없이 판단해야 한다.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시비를 가려야 하는 순간에,

‘나는 잘 모르겠어, 나는 아무 것도 판단하고 싶지 않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⑥그래서 올바른 판단을 회피하는 자들에게, 성경은 다음과 같이 책망한다.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잠17:15

 

악인이 의인으로 둔갑해 있고, 의인이 악인으로 둔갑해 있는 상황에서

‘복잡하니까, 나는 잘 모르겠어’ 하며 회피하며 방치해 두는 것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일체의 판단을 금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부당하거나 섣부른 판단,

잔혹한 비판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정죄적이지 말라>는 것이다.

 

 

◑특별히 남에게 엄격하고, 자기에게 관대한 사람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말씀이다.

 

▲자기에게 관대하면서, 남에게는 비판적인 사람 

혹자는, 자기가 대하는 누구에게나 관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다가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관대해서 아무렇게나 행동하므로.. 호감이 떨어진다.

 

반대로 혹자는, 자기가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엄격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꺼려하지만,

나중에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해서 언행심사가 늘 단정할 때...

사람들은 점점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남에게 관대한 사람의 대부분은.. 자기 자신에게도 무척 관대하며

남에게 엄격한 사람의 대부분은.. 자기 자신에게도 무척 엄격하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에게 관대하면서, 남에게만 엄격한 사람>이다.

쉽게 말해서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대체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반대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대단히 엄격하면서도, 남에게는 관대한>

그런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눅6:37절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특별히 이렇게 ‘자기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비판적인 사람’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왜냐하면 아래 41절 말씀과 연결해서 보면.. 그렇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6:41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6:42

 

 

▲자기에게 엄격하며, 타인에게 관대한 사람

민족적으로 보면, 독일 사람들이 삶의 행동에 있어서 대체로 엄격하다.

독일 사람들 중에는, 아침에 샤워를 하고 나서도,

마른 걸레로 욕실 벽과 바닥의 물기를 완벽하게 제거해서

욕조와 벽을 항상 번들번들 광택을 내게 해 놓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다음 사람이 그 화장실/욕조를 사용할 때

마치 고급호텔의 욕실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간혹 한국인 가운데도, 그렇게 깔끔한 사람들도 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성격의 배우자와 만나서 산다면, 무척 힘들 것 같다.

샤워를 하고 나서도, 욕조의 물기가 한 방울도 안 남도록 깨끗이 제거해야 하고,

벽장에 이불과 옷도, 군대 내무반보다 더 각도 있게 정리해야 하고..,

그런데 이렇게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독일인들은 많고...  

 

제가 아는 사람중에, 실제로 이런 성격의 남편과 만나서도, 잘 사는 아내가 있었는데

그 비결을 물어보았더니, 그 아내는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 남편은, 자기는 그렇게 철저히 정리정돈 하지만,

저와 아이들을 보고는, 절대로 그렇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자기 성격이 칼 같은 사람은, 칼같이 살면 된다.

그러나 그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며,

가족들에게까지 자기 기준을 따라서 살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자기에게 엄격한 것은 좋지만, 타인에게까지 그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물론 남편이 (절도 없는) 아내를 쳐다보면서, 무척 답답해 하지만,

그렇다고 아내에게 절대로 자기처럼 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격적으로 대단히 성숙한 크리스천 남편이다.

 

 

 

◑왜 우리가 자꾸 비판하는가?

 

▲1. 자기 존재감, 자기 우월감을 느끼게 되니까.. 비판한다.

사람들은 비판을 통해서, 어떤 자기 우월감에 빠지게 된다.

은연중에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엄청난 교만을 갖게 되는데,

그런 교만에 빠지면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니까, 계속 비판한다.

 

▲2. 용서하지 못할 때, 비판하게 된다.

문맥을 보면 그렇다. 37절에, 비판과 용서가 연결되어 나온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눅6:37

 

우리는, 그가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용서해야.. 비판하지 않게 된다.

 

은혜를 모르는 자라도 사랑하고 용서하라  -바로 가기, 클릭-

그래야 비판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1. 비판으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자녀에게 잔소리/훈계/교훈하면.. 훌륭한 자녀가 되는 줄 알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절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 부모들도 직장생활을 해 봐서 알지만

내가 정말 혼신의 힘을 다 바쳐 직장 일을 열심히 할 때는

나를 비판하고 지적하는 상사가 아니라

나를 품어주고/ 알아주고/ 격려해주고/ 나를 인정해 주는 상사와 함께 일할 때다.

 

저도 결혼생활 22년 경험을 돌아보면

아내에게 시시비비를 옳게 가려서, 어떤 사태의 진척을 가져왔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옳은 것을 설명해서, 아내가 거기에 설득되고 따라주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대신에 아내를 공감해주고/ 노고를 인정해주고/ 아끼고/ 긍정해 주었을 때

아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물론 나에 대한 아내 입장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끄실 때도, 그들을 비판/정죄하지 않으셨다.

있는 모습그대로 받으시고 품으셨기 때문에.. 그들이 결국 훌륭한 사도가 될 수 있었다.

 

▲2. 내 기준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평론을 보더라도, 같은 영화를 두고도,

평론가의 입장에 따라.. 정말 180도로 다른 평론을 하는 것을 본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도 마찬가지다.

같은 사안을 두고서, 두 신문이 평가하는 바는.. 정말 서로 다르다.

저는 개인적으로 조선일보 성향이지만, 그렇지만 한겨레신문의 평가도 존중한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가끔씩 한겨레신문을 들추기도 한다.

반대적 입장을 살피면서, 내 판단을 더욱 온전하게 내리기 위해서다.

 

기억할 것은, 내 기준은, 내 생각에 아무리 옳게 보이더라도

항상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 남을 비판하지 않게 된다. 나도 틀릴 수 있는 것이다.

 

▲3.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훨씬 더 성숙한 사람인데.. 내가 몰라서 비판할 수도 있다.

사람은 자기 수준만큼 이해한다.

자기 수준을 넘어가는 것은.. 덮어두어야 하는데..

내 수준으로 이해해서 깎아내리면서 비판하면.. 결국 내가 우스운 사람이 되고 만다.

 

어떤 음악의 거장이 연주를 했는데,

한두 군데 틀린 곳이 있었다고 가정하자.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 넘어가지만,

좀 아는 사람은.. 그가 어느 부분에 어떻게 틀렸는지.. 정확히 집어내게 된다.

 

문제는, 그 한두 군데 때문에,

그 음악 거장의 전체 실력을.. 내가 비판하면서.. 그 거장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한두 군데 틀린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도 불분명 하지만)

그는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거장이다.

거꾸로 만약 내가 연주자였다면, 수 백 군데는 족히 틀렸을 것이다.

 

어쨌든 비판을 조심해야 한다.

그의 업적과 명성을 훼손하면서.. 내 교만을 떠는(과시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4. 비판하는 그 기준으로.. 내가 똑같이 비판받기 때문이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6:38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롬2:1~2

 

저는, 제 아이들을 막 야단치다 보면,

제 마음 속에 어떤 내적 음성이 들린다.

그 순간, 그 기준으로 하나님이 나를 야단치실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너도 그렇게 야단맞아야 되는 것 아니냐?’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도 마찬가지다.

순간적으로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시기 바란다.

‘그렇다면 너도 그렇게 야단맞아야 되는 것 아니냐?’

 

▲5. 비판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교만이기에, 비판하면 안 된다.

내가 하나님 대신에 ‘최종 판결자 노릇’을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물론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서 비판할 수도 있으나

그런 강한 내적 부담이 없으면.. 비판하지 않는 것이.. 나를 위해서 좋은 것이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롬14:4

 

제 아이가 아무리 잘 못해도, 제 앞에서, 옆집 아저씨가 제 아이를 혼내면

기분이 무척 좋지 않다.

그 때는 그 훈계를, 그 부모에게 넘기는 것이 예의다.

 

하나님이 롬14:4절에서 그러시는 것이다.

‘내 아들/내 종인데, 왜 네가 난리 치냐?’

 

▲6. 내가 누구를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꼴이 된다.

내가 지금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고 있다.

하나님이 죄인 된 나를 불러서 쓰시는 그 은혜가 있었다면,

똑같은 그 은혜가.. 그에게도 역사하실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용서/쓰임 받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적용되지 않고... 그래서 비판받아야 마땅하고...

이것은 말이 안 되는 독선이요/자기기만이다.

 

이 죄인 같은 내게 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인정할 때

저 죄인에게도 같은 은혜를 부어주시는 사실을.. 반드시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는.. 결코 비판할 수 없다.

왜 비판하는가? 주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거나/잠시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용서와/사랑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비판을 이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6:38

 

위 말씀을, ‘후히 주면 후하게 받는다’는 경제적 원리로 우리가 이해하는데,

물론 경제적으로 적용할 수도 있고,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갚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전후 문맥(눅6:37~38)을 보면,

일차적으로 <비판에 관한 교훈>의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볼 때, 용서를/사랑을 충분히 주라는 말씀이다.

 

용서를/사랑을 주기 때문에, 그 일환으로 선물/물질을 줄 수도 있겠다.

또는 원수가 뭘 꾸러 왔을 때도, 거절하지 말고 어떤 물질을 꾸어주라는 뜻도 되겠다. 눅6:34~35

그러나 1차적으로 용서와 사랑으로 해석하고, 2차적으로 물질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즉, 내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싶을 때, 그를 판단하지 말고,

대신에 사랑을 흔들어 넘치도록 주라는 것이다.

비판 대신에, 사랑을 충분히 주면,

나 역시도 남에게 비판을 받지 않게 되고, 사랑을 충분히 되돌려 받는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할 때, 그를 비판하게 된다.

그러나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할 때, 그를 진정 사랑하게 된다.

 

예를 들면, 내 자녀를 통해서, 내가 뭔가를 그로부터 <받고자> 할 때,

자녀가 공부를 잘 하고, 부모에게 순종해서 .. 내가 기쁘고 부모의 체면을 차리려고 할 때,

자녀를 비판하게 되고.., 자녀에게 핏대를 올리게 됨을 깨달았다. <받고자 할 때>이다.

 

그러나 내 자녀에게, 내가 뭔가를 <주려고> 할 때, 아무 것도 <받기를 바라지 않을 때>,

나는 내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히 사춘기 내 아이와의 갈등도 점차 해소되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무 것도 <받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주려고>만 했을 때...

 

내 이웃과도 마찬가지다.

사랑을/용서를 <주려고> 할 때.. 우리는 그를 비판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뭔가 그에게 <받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비판하게 된다.

 

그런 의미로 본문 눅6:37~38을 다시 읽어보시라.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용서와 사랑을)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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