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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살리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 1986

LNCK 2009. 7. 15. 13:18

◈살리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                        요8:1~11                     07.07.22.설교스크랩



▲하나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던 다윗

성경에 보면 다윗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편애하시는가 싶을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왜 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을까요?

 

성경에 보면 순종, 기도, 능력, 순결함 등에서 다윗 보다 탁월한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믿음 좋기로는 아브라함도 있고,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순종한 사람으로는 다니엘도 있고,

능력 행하는 것으로는 엘리야도 있고,

정결한 사람으로는 요셉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다윗을 특별히 취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이라고 했습니다. 삼상13:14, 행13:22


어떻게 하면 우리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빌2:5,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 안에는 여러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은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 중의 한 곳입니다.


▲본문 설명

오늘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로 끌고 와서

“당신은 이 여인을 어떻게 할 것이냐?” 고 묻는 장면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굳이 예수님께로 끌고 온 것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요8:6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여 죽이고 싶으나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율법을 어긴 죄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살려주라고 하시면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배교자요,

음행을 장려하는 사람이라는 누명을 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본문에서 두 부류의 사람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살리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여인을 죽이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까지 죽이려 합니다.


▲옳고/그르냐 판단 이전에 생각해볼 문제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어떤 사람에 대하여 불 같이 화내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욕한 적이 없었습니까?

“사람이 그럴 수 있어? 그런 사람 가만 두면 안 됩니다. 그 사람하고는 못 살아요”

하면서 비난하고 분노했던 적은 없었습니까?


만약에 그런 적이 있었다면, 우리 자신이 바리새인 일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 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어떤 영이 역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똑같은 율법이라도 얼마나 다르게 적용되는지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박사요,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율법으로 사람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율법을 잘 아셨지만 예수님은 그 율법으로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바리새인들 마음에는 죽이려는 영이 역사하고 있었고,

예수님 안에는 살리는 영이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간음죄를 지은 여인을 두고 두 가지 영적인 힘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로 인하여 그녀를 죽이려는 힘입니다.

또 하나는 그녀를 살리려는 힘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이려는 역사는 마귀의 역사입니다.

살리려는 역사는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이 두 가지 영적인 힘은 지금 우리에게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실 간음한 여인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죄가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그 죄가 드러난다면, 어떻게 사람들의 눈총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아프리카의 성자’ 라고 존경받는 슈바이처 박사도

원주민과 끊임없이 불화와 갈등을 겪었으며,

자기가 치료하는 환자들을 매우 냉정하게 대하며

아프리카 흑인들을 무시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경의 권위를 격하시킨 사람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돌을 맞을만한 죄가 다 있습니다.

마귀는 그것을 들추어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죄는 술집에서 술과 여자에게 몸과 마음을 빼앗기고 놀아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이사야가 깨달은 진리

선지자 이사야가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들어가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6:5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자기가 죽을 죄인임을.. 이전에 꿈에도 상상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죄악이 많다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죄악이 많아서 화로다 죽게 된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정죄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마귀의 역사임을 분별해야 합니다. 속으면 안 됩니다.

결코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회초리로 내가 쓰임 받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죄를 모르시지 않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죄와 저주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을 정말 경험한 사람은

누구도 남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남을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남의 죄를 대신 회개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딜레마

한국 교회는 초창기부터 율법적인 분위기가 매우 강했습니다.

한국 사회의 유교 전통 때문입니다.


일제 말 어느 교회 장로님의 큰 아들이 믿지 않는 처녀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주일에 예배당 청소하는 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고,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면 이방인과 결혼한다고 해서 책벌을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교인들이 벌 떼같이 그 장로님을 징계하여 교회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목사님을 압박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결국 “네, 다음 주일에 책벌하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다음 주일 설교 후 광고 시간에

“이 시간, 모 장로님의 큰 아들이 불신자와 결혼하였기에 책벌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은 ‘이제야 교회가 바로 되는구나.

장로가 무서워서 책벌을 못하더니 이제야 어쩔 수 없이 칼을 드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계속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아버지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그를 낳아서 기른 육신의 아버지요, 또 하나는 믿음의 아버지인 목사입니다.

이 청년이 죄를 지은 것은, 육신의 부모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요,

믿음의 부모인 내게 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인 내가 벌을 받겠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당분간 근신하기 위해서 모든 예배를 인도하지 않겠습니다.

남은 순서는 이 장로님께 맡길 것입니다.” 하고 강단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장로님과 아들이 목사님을 붙들고

“죄는 우리에게 있으니 우리를 책벌하시고 강단에 올라가십시오.” 라고 했지만

목사님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교인들도 나서서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스스로 책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온 교인들이 마음에 들고 있던 돌을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지 못했던 죄를 눈물로 자복하기 시작함으로

그 교회는 법도 서고, 사랑도 넘치는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돌로 치기 전에, 먼저 화를 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부터 죽여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안과 주위에는 두 영적인 힘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는 영이 죽이는 악한 영인지, 살리는 예수님의 영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죽이려 하는 마귀의 영의 역사에 속으면 안 됩니다.

가족 사이에, 이웃 사이에, 교우 사이에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아야 합니다.

독한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또한 화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화 낼만하니까 화를 내지요!”

아닙니다. 화를 내는 데는 영적인 역사가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화를 내서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휘둘리는 것이고 마귀에게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딤후2:24~26,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화를 내면 안 되는 것은,

화를 내어서는 마귀 올무에서 사람을 건져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약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진정한 회개와 변화는 화내고 정죄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서와 사랑에서 이루어집니다.


▲눈을 가리신 예수

수묵화가 문순 집사님의 화집에서 [눈을 가리신 예수] 라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 충격으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의 눈을 가리웠을까?'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이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그린 것이라는  

화가의 말을 듣고 더욱 충격을 받았습니다.

문순 집사님이 예수님의 얼굴에 눈을 가리는 순간, 너무나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성령님의 감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문순집사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울었다. 또 울고 울었다. 왜 그리 울었을까?

나는 내 손으로 예수님의 눈을 가리며 눈물을 닦았다.

주님의 눈을 가리며 나는 참 많이 울었다. ...

가슴이 너무 답답했지만 난 가렸다. 숨조차 내쉬기 힘들었다.


이 세상에 눈을 가린 예수님의 모습을 내놓기가 너무나 아프고 쓰라렸고,

두려웠지만 난 가렸다.

그러나 그 순간 얼마나 큰 은혜가 나에게 임하였는지 모른다.

가려도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주님의 얼굴이 나를 향해 미소짓고 계셨다. ...”

 

이 그림의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이 만난 예수님이었습니다.

삭개오를 향하여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고 말씀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시되 우리 죄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다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의인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보십니다. 창조 원형으로 보십니다.

예수님의 이 얼굴을 본 사람은 남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 크리스천 인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