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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최고의 목표는? 1994

LNCK 2009. 7. 21. 13:07

◈신앙생활의 최고의 목표는?                   요1:9~14                     09.06.21.설교녹취



▲신앙생활의 최선, 최고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서, 매일 신앙생활 해야 하는가?

신앙생활의 최선의 목표는

내 삶/내 모습 속에서 예수님과 그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항상 이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어렵다면, 가끔씩이라도 나타나야 한다.)


만약 내 삶 속에서 가끔씩이라도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는 성도라면

조금 더 자주/많이/크게

예수님이 내 삶 속에서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실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신앙생활의 모습이다.


교회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인격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건물도 필요하고, 좋은 프로그램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새 신자와 세상 사람들이 ‘저 교회에 가면 예수님이 느껴져!’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한다.


◑예수님을 영접한 자/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공평하신 자원, 그리스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가장 소중한 인생의 자원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감격하시기 바란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나 공평하시다는 사실에

더욱 감격하시기 바란다.


다른 것은, 공평하지 않다.

돈도.. 쉽게 부자 되는 사람도 있고, 평생을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외모도.. 미모를 타고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모가 영 떨어지는 사람도 있다.

지능도 마찬가지다. ... 이런 것들은 절대 인간에게 공평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예수님은 공평하게 우리 속에서 역사하신다.  요1:12

그래서 무디 같은 무식한 구두수선공도..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고,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시골출신 빌리 그레함도.. 시대를 움직인 종이 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나 공평하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꼭 가문을 따라, 학벌을 따라.. 역사하시지 않는다.

외모를 따라, 물질의 부유함을 따라서는.. 더더욱 역사하시지 않는다.

모든 민족과 방언과 족속들에게, 남여노유를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공평하게 역사하신다.


이 자원만 있으면, 다른 자원은 조금 부족하고 뒤떨어져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와 여러분이, 이 자원을 갖고(모시고)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란다.  요1:12

 

다만 우리의 도전과 과제는

우리 각자가 가진 이 공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원을

무디 선생님이나 빌리 그레함 목사님처럼

어떻게 잘 사용하고, 활용하느냐의 ... 과제이다. 

 

▲중국 선교사 조나단 고포드

그는 초기 13년 동안, 중국에서 선교사로 수고했지만

아무런 열매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선교방법을 바꾸었다.

‘내가 이제 선교하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모든 노력을, 예수 안에만 머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인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이후부터 선교의 열매들이 비로소 맺어지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 속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 머물기 힘써야 하는 이유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고,

참된 본질적 기독교 사역의 열매는.. 그런 과정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다르게 이루어지는 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참된 열매가 아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잘 머무시게 하실 것인가?>

이것이 오늘 내 삶의 핵심 목표가 되어야 한다.

영접하는 자에게, 예수님이 이미 머물고 계시지만

<잘 머무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소요리문답 1번은

하나님을 존귀히/영화롭게 여기고, 그 분을 즐기며/enjoy하며 살아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내 집에 오시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꺼려하고/자기 자유가 속박 받는 것으로 여긴다면..  돌이켜야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잘> 머무시지 않으실 것이다.


교인들이 신령한 주의 종들을 존경하고 따르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존귀히 여기기 때문에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잘 모시고 사는, 신령한 주의 종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따르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부터 생각하면 틀린 것이다.

내가 주님을 어떻게 모시고/어떻게 나타내며 살 것인가... 이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일>을 많이 해야, 주님께 영광을 많이 돌릴 것 같지만... 접근법이 잘못된 것이다.

일하기 전에 주님을 <모시고/교제하고/기뻐해야> 한다.

또한 자기가 혹시 <일>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그 주님과 <교제>로 만족하는 삶을 살 줄 알아야 한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39:3


요셉은 보디발에게 여호와를 전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보디발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고 했다.


요셉은 가만히 있었다.

다만 자기 안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만 애쓰고, 가만히 있었다.

전도하는 등의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주변 사람들이/보디발이

그것을 알았다/보았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오늘 내가 주님과 교제하며 동행할 때,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깨닫게 된다.

‘아하,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시는구나!’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 이것이 전도다. 이것이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기를 거부했다. 단1:8

세상의 안락함, 세상의 부귀영화, 세상의 가치로 자기를 치장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제, 동행이 무너질까봐 .. 그는 심히 염려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 각자는 어떠한가?

하나님과 나와의 교제를 방해하고 훼방하는

세상의 안락함, 풍부함, 각종 첨단 문명/문화에 빠지는 것을,

다니엘처럼 두려워하며, 자기를 지키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 세상풍조에 같이 떠내려가고 있는가?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단1:15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얼굴이 더 윤택해진 것은,

채식을 했기 때문이.. 물론 아니다.

세상풍조와 세상문화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의 깊고 순수한 교제에 애쓰고 힘썼을 때

그들의 얼굴에 빛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것이다.

세상을 따라간 사람들(다른 청년들)보다, 더 멋진 영향력이 미쳐지더라는 것이다.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단1:20



▲마치는 말

그렇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의

지혜와 능력은.. 세상에 똑똑한 사람보다 10배나 더 뛰어나게 된다.

요셉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다.


그들은 세상에서 무슨 큰 일을 시도하려고 애쓴 것이 아니었다.

다만 가장 소중하신 하나님을, 자기 삶 속에 극진히 모시고,

그 분과 교제하고 동행하기를 힘썼다.


그랬더니 놀라운, 상상치 못하는 결과가 나타나서

세상 사람들이 요셉과 다니엘, 고포드 선교사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이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자원은.. 차별이 없으시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동일하시다.

이 보배를 소유하시고, 귀히 여기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란다.

 

..................................................<더 읽으실 분>...............................................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그 예수님의 고결한 모습이, 나 같은 죄인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물론 가능하다. 가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바로 이것을 원하셨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나의 모양과 형상대로’ 그들을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하나님은 인생을 창조하실 때, 벌써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을 그 속에 담아두셨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원래적으로 나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형상이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훼손되었다.

그 형상이 무너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가지게 되는데,

다시금,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그 형상과 그 인격이 깨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아담이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이유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기 원하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자녀를 삼으신 이유는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를 통해서 ‘예수의 형상과 인격’을 드러내는 사람은,

또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예수의 형상과 인격’이 드러나는 것을 잘 보게 된다.


자기가 이것을 잘 드러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서도, 그 형상과 인격을 잘 발견하지 못한다.

여러분, 이런 수준에까지 신앙이 성장하시기 바란다.


▲인생의 목적을 바로 알면, 세상사에 목숨 걸지 않는다.

하늘에 이미 계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 다가오신 예수는, 이 땅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도, 이런 예수님의 삶에 비추어 보면,

세상살이에 그다지 아옹다옹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에 보내졌다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과 함께 거해서 그 분을 나타내고

의연하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 이것이 사도 요한이 제시하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 앞에 두려워 떨 필요 없고,

이 세상의 실패 앞에 좌절할 필요도 없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 때문에.. 그렇게 잠 못 이룰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이 땅에 거하는 동안

나를 보내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면서

그 분의 뜻을 나타내고 순종하다가... 하늘로 돌아가는 것

-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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