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복 있는 사람 예레미야 렘25:1 09.06.28. 박목사님 설교스크랩
◑예레미야가 과연 ‘복 있는 사람’인가요?
사실 제가 그랜드캐니언을 여행하면서 마음에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번 여행 기간 내내 <복 있는 사람>을 통해 예레미야서를 읽었는데,
‘예레미야가 과연 복 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는 복된 사람이 분명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1:2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4
예레미야서를 보면, 비록 예레미야의 삶의 환경은 어려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그의 내면이 정중동 하는 삶을 사는..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을, 당시 세상 사람의 대표로 볼 때,
세상적 여건은 출세하고 권력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마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불안정하고(시1:4), 결국 망하는(시1:6)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생동안 힘들게 살았던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20살 때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외적으로 볼 때, 그의 사역이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그 말씀을 듣고 감동받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계속해서 예레미야를 공격하고 반대하고
‘나라가 망한다고? 어떻게 네가 그런 예언을 할 수 있느냐?’며 그를 죽이려 하고,
‘너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두고 보자. 너 잘 되나 보자.’
이런 표현들이 예레미야서에 나옵니다.
이런 공격을 받으면서 인생이 힘들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선지자가 과연 복 있는 사람일까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남들보다 좀 더 큰 집에 살면 복 있는 사람이고,
남들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소유가 많으면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악인의 꾀’라고 말합니다. 시1:1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던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복 있는 사람일까요, 지지리도 복 없는 사람일까요?
여러분, 예레미야는 결코 인생을 편하게 살았던 사람은 아닙니다.
또 예수 믿는 우리조차도, 예레미야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기 망설여지는
힘든 삶을 살았던 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수많은 사람이 살았던 2,600년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영적 지도자라고하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런 시대에 어린 나이에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았던,
불편하게 살았고, 욕도 많이 먹고 살았지만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았던 예레미야! 그는 정말 복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을 이야기하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예레미야가 받은 하나님의 축복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주저하게 만듭니다. 고심하게 만듭니다.
성경의 복을=세상 복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공통점도 있지만, 성경의 복은, 세상복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입니다. 세상의 복을 훌쩍 뛰어넘는.. 영원하고, 견고한 복입니다.
예레미야 21장에 보면 그 당시 사람들 중에
이스라엘의 왕인 시드기야가
자기 신하 두 사람을 예레미야에게 보내면서 이런 부탁을 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지금 우리를 공격한다.
이렇게 나라가 위급한 상황을 당했으니까, 예레미야 당신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기적을 베풀어주셔서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떠나게 되지 않겠느냐?’
‘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얼핏 보면 복 받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왕’자리는 그렇게 복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노심초사해야하는 매우 불안한 자리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방침/뜻/길이 보이지 않으니,
시드기야는.. 왕이지만, 불안 초조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종종 감옥에 갇히는 몸이었지만, 불안 초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내면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정중동 합니다.
그는 진정한 복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이유 - 내가 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기 때문
지금 나라가 급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렘21장의 그 공격으로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잠시 흔들렸다가 느부갓네살이 물러가고,
나중에 다시 공격해 와서 결국 망하게 되는데요..)
나라가 이렇게 위급하게 되었을 때 선지자에게 기도해 달라고 그러면
선지자가 기도를 해야 됩니까, 안 해야 됩니까?
기도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레미야가 이렇게 답합니다. 예레미야 21:3~8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너희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너희는 망할 것이다. 이 나라는 망할 것이다.’ 라고 선언합니다.
얼핏 보면 납득이 잘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지금 시드기야의 문제가 무엇이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선지자는
기도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멸망을 선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예레미야서를 보면서 우리가 발견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부릅니다.
내가 배고프면.. 하나님을 부르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달라고 부르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내 필요를 위해서 있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내 필요가 채워지면.., 하나님하고는 상관없이 삽니다.
그들이 그런 삶을 반복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끔찍한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해도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듣지 않는 사람,
이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 ‘복 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시1:4
◑공격을 당하면서도, 말씀을 전파한 예레미야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
제가 지난 3주간 큐티(Q.T)를 하면서 가장 도전을 받았던 예레미야 본문이
렘20:8~9절 말씀입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20:8~9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멸망을 선포하게 하니까, 사람들이 계속 공격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내가 더 이상 이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리라' 결심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어떻게 하랴!’
그래서 골수에 사무치고 마음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서
그 말씀을 들고 또 사람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마음을 가진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로, 모델>로 사용하셨습니다.
지난 6월 22일 월요일 큐티를 하면서, 예레미야 25:1절을 읽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가 그날 아침 하나님께로부터 굉장히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유다의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렘25:1
유다 모든 백성,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가 받은 말씀, 그가 전파한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유다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을.. 특별히 예레미야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아프간 선교의 사명을 재확인 했습니다.
공격을 당하면서도, 계속 말씀을 전파한 예레미야를 보면서
공격을 당하면서도, 계속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보면서,
회교권 선교의 사명은.. 공격을 당하면서도.. 계속 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던 날 아침,
사흘 후에 모일 아프간 전략회의 모임 때문에, 기도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날 이 말씀을 읽는 동안, 하나님이 제 마음에 한 가지 도전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프간 피랍사건을 경험하면서,
배 목사님과 심성민 형제가 피 흘리고 죽었던 그 땅을 생각하면서
처음에는 분노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 두 분의 죽음을 통해서/또한 피랍을 통해서
우리 샘물교회 공동체가
아프간을, 회교권을 더 열심히 섬기라고 부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백성들에게 반대와 배척을 받으면서도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약 40년 동안이나 계속 임한 것을 보면,
그래서 그가 계속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한 것을 보면
아프간 선교를 하면서 우리가 배척을 많이 받았지만
하나님은 아프간/회교권 선교의 선구자적 사명을, 저희 교회에 주신 것이 아닌가?)
자연스럽게 저도 여러분도, 그렇게 마음을 인도함을 받아간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아프간 땅에 300명의 선교사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 선교사 100명이 다 빠져 나오고 난 다음에도, 외국 선교사들이 남아 있습니다.
수 십 개국에서 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왜 한국말을 하는 두 사람이
거기에서 복음 때문에 피를 뿌리고 죽어야 했는가요?
하나님이 모든 한국 백성들을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
(특별히) 우리 교회를 통해서 임한 것이 아닌가요?
전에도 그런 생각을 가끔씩은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가는 생각으로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만,
그날 아침에 예레미야 25:1절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강하게 도전하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지금 사람들이 선교를 얘기하면서.. 샘물교회를 꼭 샘플/모델처럼 얘기합니다.
(대부분) 좋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간혹 나쁘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좋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나쁘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금만 얘기를 들어보면 비그리스도인들도 ‘이게 욕할 일은 아니구나!’ 하며
마음이 선한 분들은 곧 마음을 돌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선교 세미나를 할 때면 샘물교회가 모델로 자주 등장합니다.
▲제가 이번 아프간 전략회의에 참석하면서, 미국인 목사님을 몇 분 만났는데,
나이가 70세 되신 프랭크라고 하는, 처음 보는 목사님이 저를 끌어안았습니다.
한 번도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는 분인데,
그분이, 샘물교회 박 목사가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를 만나기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제가 그 분을 처음 만났습니다.
얼마나 열정이 대단한 분인지.. 그는 미 해병대 출신이었습니다.
해병대에 있으면서 예수를 믿게 되고,
그러면서 신학을 해 복음사역자가 된 분인데
나이 70에도 몸매가 아주 꼿꼿하고, 얼마나 재빠른지
저한테 거수경례를 붙이면서
‘당신은 하나님 나라의 제너럴(general/장군)’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저는 제너럴이 아니고 서전(sergeant/병장) 출신’이라고 그랬더니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당신 교회에 피를 흘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당신과 당신의 교회를 제너럴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날 제가 제네럴 소리를 한 10번쯤 들었습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가 전혀 원치 않았던 아프간 사건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모델로 세워놓으셨습니다.
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남은 길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순종해서 잘 사는 겁니다.
우리가 잘못되면.. 한국교회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이고,
우리가 선교에서 실수하면.. 한국교회 선교는 역시 문제라고 말할 것이고,
우리가 잘하면.. 한국교회가 잘한다고 말하는 자리에
우리를 갖다 세우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더 긴장할 수밖에 없고,
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치는 않았지만, 우리가 이런 자리에 서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건 박 목사 당신 몫이고, 목자들이나 장로님 권사님들 얘기지
나는 아직 목자도 아니니까 그렇게 부담스러운 얘기 하지 마시오!’
이렇게 말하시는 분은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복을 걷어차는 사람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부담스럽고 편한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치 않았지만 이 공동체에 오게 만들고
이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부족한 우리를 좀 더 효과적으로 쓰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예레미야와 같은)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 더 읽으실 분 .......................................
◑그랜드캐니언에서 받은 은혜
이번에 제가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창조과학 탐사여행’을 가졌는데,
크리스천 지질학자 한 분이, 3박4일 동안 버스 안에서
그랜드캐니언의 지질연구에서 배우는 놀라운 교훈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랜드캐니언이 만들어진 배경 -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그랜드캐니언의 대자연의 장관이 만들어진 것은,
과거에 해석은 이랬습니다.
<수 백 만년 동안 풍화작용과 침식작용이 끊임없이 반복되어서,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 6월에 모인 지질학회는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수백만 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바람이 불고 침식작용으로
이런 풍경이 만들어지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오랜 조사를 한 끝에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랜드캐니언이 만들어지게 된 기원은,
그랜드캐니언 동쪽과 북쪽에 큰 호수, (남한 크기의 4/5쯤 됨)가 두 개 있었는데
이 두 호수가 동시에 터졌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 물이 노아 홍수 이후 때에,
시속 100㎞ 속도로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면서 지금의
그랜드캐니언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미국지질학회가 2000년에 내린 정설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충격을 받은 것은,
경치가 좋다고 생각하며 보았던 그랜드캐니언이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노아 홍수 때 세상이 뒤집어졌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홍수에 지반이 올라가고, 내려가고, 지진으로 갈라지고,
화산이 터지고 하면서, 그랜드캐니언이 만들어졌는데,
우리는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라는 사실은.. 미처 몰랐습니다.
브라이스 캐니언, 자이언 캐니언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
그게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니
참 슬펐습니다.
아마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광경을
슬픈 마음으로 본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그랜드캐니언 관광했을 때를 생각하니까, 자꾸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때는 관광차를 타고 갔거든요. 그랜드캐니언 가까이 가자
안내하는 청년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1~2분만 지나면 오른편에 광경이 나타날 텐데
최대한 탄성을 지르십시오. 그래도 부족할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광경이 나온다고 저 양반이 저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나 했는데,
한 1~2분후에 버스가 돌아나가는데 오른쪽에 보니까
어마어마한 광경이 펼쳐지는데 정말 탄성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랜드캐니언에 가 보신 분들은 아마 저와 똑같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의 관점에서 다시 한 번 보니까
그게 하나님의 ‘저주의 소산’ 이었던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셨던 세상, 홍수 이전 세상은
그랜드캐니언 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을 법한 그 창조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것의 일그러진 모습 정도를 보며 탄성을 지른 나 자신이.. 우스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옛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날마다 세상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는데,
그게 얼마나 좋은 세상이었을까요?
진노(홍수)의 결과가 이 정도인데,
하나님이 원래 지으셨던 세상, 홍수 이전의 세상은 얼마나 좋았을까요?
제가 충격을 받았던 또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전 세계에 석탄 매장량이 많지 않습니까?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어마어마하게 많이 매장돼 있는 석탄이.. 원래는 나무껍질들이랍니다.
그런데 현재 전 세계에 매장돼 있는 석탄의 양을 모두 계산하면
이 지상에 있는 모든 나무껍질을 벗겨서 만든다고 해도 1%밖에 안 된답니다.
여러분, 감이 잡히십니까?
도대체 옛날에 홍수 이전에, 나무가 얼마나 많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적어도 지금보다 1백배가 더 많았다는 것이지요.
▲지질층이 증거 하는 노아 홍수
지금의 지질층은 홍수 이후에 생긴 것입니다.
기가 막힌 것은 그랜드캐니언 1.6킬로미터 밑에 보면
①맨 처음에 하나님이 만드신 지층이 나오고,
②그 위에 셋째 날 창조하신 지층이 나오고,
③그리고 이 셋째 날 지층 위에 홍수 이후 지층들이 나온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랬더니
①맨 첫째 날 땅에는 화석이 하나도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②화석이 안 나오는 그 위의 땅에도 화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①과 ②의 두 층이 육안으로 보기에도 모양이 확 다릅니다.
③그리고 그 위부터 우리가 말한 지층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우리가 지리 공부할 때 배운 선캄브리아기(先cambria紀) 라고 하는 겁니다.
그 이후부터 화석이 나오기데,
이 세 층이 너무 분명하게 딱 드러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땅에 이렇게 정확하게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지 않고 악인의 꾀를 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셨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시1편에 나오는 ‘악인’과 ‘의인’의 개념
여러분, 시편1:1절에서 ‘악인, 죄인’이라고 하는 표현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를 지칭하는 시가서의 표현입니다.
사실 실질적인 죄의 문제를 놓고 말하면 우리도 다 악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오늘 예배의 자리에 와 있지만,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죄 안 짓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도 쉽게 거짓말하는 사람들이고
때로 예수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큰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내 죄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면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 사람은 악인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에서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감히 그 칭호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악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차마 의인이라고 그러려니 입이 안 떨어집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우리가 마음속에 문제가 많이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악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의인’이라고 말하는데
‘아휴, 나는 나를 감히 의인이라고 말 못해!’ 그러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는다면,
그리고 사람들의 꾀를 좇아 사는 것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을 안다면,
그래서 사람들의 꾀를 좇지 않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살겠다는 소원을 가진 자라면
우리는 악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이라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 복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고
눈이 달라진 사람입니다. 보는 것이 바뀐 사람입니다.
먼저 자기를 보는 눈이 바뀝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뀝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부족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의지하고 살면
거기에 놀라운 축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 선지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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