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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LNCK 2009. 7. 30. 17:11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시19:1~14               2009.06.11. 설교녹취/정리

 

 

◑1.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레마의 말씀> 을 듣는 것

 

▲오늘도 땅 끝까지 증거 되는 하나님의 말씀

말씀에 마치 바퀴라도 달린 듯 (‘발통’이란 말이 더 실감난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온 세계로 쉬지 않고 전파된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는’ 것이다.

 

시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 시편19편을,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대로 인용한다.

롬10:18, 그러나 내가 말하였노니 저희가 듣지 아나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구슬이 세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이

약방의 감초처럼 흔해 빠져도, 약탕간에 들어가야 감초가 단맛을 내듯이

그 흔하게, 땅 끝까지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그것이 아무리 많아도

 

 

→내 귀에 그것이 '들려져야' 보배가 된다.

내 마음 판에, 잘 박힌 못처럼 콱 박혀져야.. 그 말씀이 내게 보배가 된다.

 

그 사실을 아래 구절이 설명하고 있는데...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오늘날 교회는, 이 구절을 ‘성경말씀을 많이 읽고 들으면 믿음이 생긴다’ 라고 이해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저는, 그저 ‘성경 많이 읽으세요’ 정도로 이해하면 안 된다고 본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의 본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판과 내 귀에 특별히 와서 콱 박히는 것>을 뜻한다.

즉, 소위 말하는 '레마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야 믿음이 생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다.

 

평소에는 그저 그렇게 예사스럽게 들리던 그 말씀이

어느 날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정말 쉽게 잊혀지지 않는 말씀으로

즉 하나님이 내게 개인적으로 특별히 주시는 말씀으로 콱 박힐 때가 있다.

 

바로 그 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라는 말씀이 제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소위 그런 ‘레마의 말씀’을 많이/자주/종종 받아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라는 말씀처럼

내게 믿음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저 녹음기 틀어놓듯이 하나님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라는 말씀이.. 글쎄, 잘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형식적이라도 말씀을 듣다가, 어느 날 말씀이 콱 박히게 되겠지만...

 

롬10:18, 그러나 내가 말하였노니 저희가 듣지 아나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레마의 말씀’처럼, 그들의 마음 판에 콱 박히는 말씀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레마의 말씀’이란 표현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지만,

맞다면 맞을 수도 있고, 틀리다면 틀릴 수도 있는 표현이다.

다만 별다른 대체할 만한 뾰족한 말을 찾지 못하기에, 그냥 ‘레마의 말씀’으로 쓴다.

 

헬라어에 '말씀'에 해당하는 단어 중에 레마와 로고스가 있는데, 성경은 둘을 혼용한다.

그 말씀 구절들을 일일이 살펴 보면,

'레마'라고 쓴 말씀의 대부분 (80%)는 <개인적, 주관적으로 주어진 말씀>  즉, 오늘날의 레마의 말씀이고,    

'로고스'라고 쓴 말씀의 대부분 (80%)은 <그냥 객관적인, 말 또는 말씀>인 것이다.

 

'레마의 말씀'이란 용어 자체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 20%의 혼용하는 예외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고,

'레마의 말씀'이란 용어가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약에 나오는 '레마'의 80%의 용례가 

개인적/주관적(소위 레마의 말씀)인 용례로 쓰이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말씀을 정리하면 이런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많이 듣는다고.. 다 자기에게 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이 마치 자기에게 ‘레마의 말씀’처럼 ‘특별히 들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말씀을 통해, 내가 진정한 믿음을 세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레마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사실을 알면,

우리가 말씀을 듣거나, 설교를 들을 때.. 더욱 예민해지게 된다.

그저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그저 설교를 듣거나 하지 않고,

 

그 중에서 ‘내게 주시는 말씀’(레마의 말씀)을 받으려고.. 내가 예민하게 깨어있게 되고,

내가 평소에 기도할 때에도 ‘그것을 주십사고 사모’하게 된다...

 

 

 

◑2.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믿음을 통해서.. 레마의 말씀이 들린다>

 

 

▲다윗은 어떻게 그 아름다운 시편들을 쓰게 되었을까?

시편을 읽어보면,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데...

그 때 당시에, 성경은 모세오경 밖에 없었다.

 

다윗이 혹시 모세오경을 읽고서, 마음에 큰 은혜와 감동을 받고서,

이런 주옥같은 시편들을 지었을까? (시편 150편중 2/3가 다윗의 저작)

 

그런데 시편에, 모세오경에서 인용된 구절들은.. 뚜렷하게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다.

다윗이 모세오경을 읽었겠지만,

그 내용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거나 재해석해서 시편을 짓지 않았다.

다윗의 시편은 거의가, 다윗의 독창적인 창작품들이다.

 

 

다윗은 전혀 독자적인 영성과 독자적인 표현으로

아름다운 시편을 약 1백편 가까이 지었다.

 

▲여러분, 지금 사도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믿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편지한다.

그런데 그것을 인용한 구절이 시19:3~4절이다.

 

여러분, 만약에 제가 사도바울이라면, 만약에 제가 로마서를 쓰고 있다면,

로마교인들에게 '믿음'을 설명할 때

시19:2~4절이 아니라, 시19:7~11절을 인용했을 것이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이렇게 ‘계명’(시19:7~9)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로마교인들이 믿음을 가지라고 소개할 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편지하면서,

 

 

그러나 내가 말하였노니 저희가 듣지 아나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롬10:18

라는 시19:2~4절을 인용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위에 복잡한 설명은 몰라도 된다.)

사도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여러분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들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이미 땅 끝까지 이르러 있다’는 것이다. 롬10:18, 시19:2~4

 

여러분 중에 만약 지금 누가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아직 말씀/복음을 못 들어서가 아니라 (그것은 이미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

여러분이 그것을 소위 ‘레마의 말씀’으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씀이 많이 귀에 들리지만,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앗과 같이.. 물거품이 사라져 없어져 버리듯이

그 들리는 소리를... 아무 소용없이 그 말씀들이 다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는도다  시19:3~4

‘소리’는 히브리어로 ‘카브’인데 ‘선 line’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연결선/라인’이 생긴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여러분 지금 이 예배실안에도

‘들리는 (외부의) 소리는 없지만’ 사실은 이 방 안에도 ‘소리’들이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라디오(트랜지스터)를 틀어보면

‘삐오삐오, 두두두’ 하는 무전 소리로부터

일본방송, 중국방송, 여러 개의 한국방송, 러시아 방송까지 다 잡힌다.

들리는 소리가 없지만, 지금 이 예배실 안에도, 사실은 소리로 가득 찬 것이다.

 

여기서 ‘믿음’을 트랜지스터에 비유해 본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널리 퍼져있고, 그것이 세상에 가득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고, (믿음의 트랜지스터를 가진 사람)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소리’ - 여기서는 레마의 말씀

 

다윗이 주옥같은 시편을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속에 ‘믿음의 트랜지스터’가 있어서

날이 날에게, 밤이 밤에게 전하는 소리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 들을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의 음성/말씀들을

그는 잡아낼 수 있었다. 들을 수 있었던 귀를 가졌던 것이다.

 

 

▲마치는 말: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왜 내 귀에, 하늘과 궁창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음성을 듣지 못하는가?

‘내 믿음의 라디오’를 점검 받아야 한다.

그 ‘믿음의 라디오’가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은, 오늘도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도다. 롬10:17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나이다.

 

주의 인자는 커서,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넓은 궁창에 이르나니♪

 

다윗은, 믿음의 라디오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시편을 썼던 것이다.

 

오늘 우리도, 다윗처럼, 믿음을 갖고서,

온 천지에 가득 찬 하나님의 말씀을 ‘레마의 말씀’으로 받게 되기를 바란다.

 

 

 

 

◑3.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가장 전통적인 해석   (그냥 참고하세요)

 

 

전통적으로 이 말씀은 이렇게 해석해 왔다.

하나님의 말씀/ 일반은총/ 하나님의 존재의식 등은

날이 날에게, 밤이 밤에게 소식을 전하듯이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저절로, 자동적으로 온 세상에 전파되어진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렇게 말씀한다.

롬10:18, 그러나 내가 말하였노니 저희가 듣지 아나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선교사가 그 지역에 이르기도 전에,

사람들의 마음에, 벌써 하나님의 신존재에 대한 본능적 인식이 있고,

복음이 그 사람에게 전파되기 전에도,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해 알고/믿고/사모하고 싶은 마음’이 사전에 형성되어 있다.(일반은총)

 

그런데 선교사가 가는 것은,

이미 준비되어진 밭을, 알곡을.. 추수하러 가는 것이다.

이런 예가 적절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공중에서 공군을 통해서 이미 승리하신 것을

육군 보병인 선교사가 직접 가서 점령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선교적 관점에서 위 구절을 이렇게 해석해 왔다. 이런 해석도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