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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린 딸을 고치신 기적 2022

LNCK 2009. 8. 7. 11:30

◈귀신들린 딸을 고치신 기적                      마15:21~28                   -09.07.09.설교스크랩, 축약-

 


이 본문은,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는 이방 여인에게

예수님이 ‘개’라고 지칭하신 내용인데,

여인이 ‘개라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나오자

주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 (메갈레 피스티스, 메가톤급 믿음?) 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설교자는 이 본문을, ‘딸을 고쳐달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딸에게서 나를 구원/풀어주소서’ 라는 관점에서 풀어갑니다.

전자도 맞지만, 후자에 더 강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내 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지 않고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1. 신앙/믿음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


▲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마15:22

지금 자기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려서, 여인이 예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을 했을까요?

먼저는, 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해야 되잖아요?

 

만약에 의사에게 나왔다고 하면

‘우리 딸 좀 고쳐주세요!’ 이렇게 얘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에게 나왔으니까... 이렇게 말했다고 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을 먼저 하는 거예요. '내 딸'보다...

즉, 여인에게 '메시아 신앙'이 있었다는 것인데요...

▲이해를 돕기 위한 예화

옛날에 서부개척시대 때 미국에서 인디언과 백인 기마병들이 싸워요.

그러다가 인디언들이 미군 병사를 포로로 잡으면, 

말 뒤에 밧줄로 잡아매서 온 동네에 끌고 다녀요.

막 말을 달리며 질질 끌고 다니는 것 보잖아요? 지금 상황이 그런 상황이에요.


마치 귀신이 말에 올라타고, 자기 딸을 말 뒤에 묶어서

좌지우지하면서 자기마음대로 끌고 다니는 겁니다.


그 뒤에, 엄마는, '엄마와 딸'이라는 사랑의 줄 때문에

엄마도 역시 질질 끌려 다니는 상황이에요.


이 때 엄마가 메시아를 보면서 하는 말입니다.

‘딸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딸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딸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할 수밖에 없는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탄원합니다.


▲신앙은 -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 것은

내 문제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아 신앙이 아닙니다.


-내 사업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내 사역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합니다.

내 문제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인생의 짐/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은 첫 번째 우선적인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런 것은, 새벽에 정한수 물 떠놓고 비는 믿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러니까 여러분이 구원을 받아야 될 것은..,

저를 예로 들면, 제 같은 경우는 어디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제 목회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돼요.

선교회에 마음이 매여 있는 한, 메시아를 제대로 만날 수 없습니다.

메시아가 주시는 구원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이게 본문의 ‘귀신에게 매여 있다’하고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목회가 잘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 목회를 좀 부흥시켜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는,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모르고 하는 기도라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알고 하는 목사님의 기도는.. 어떤 기도라야 합니까?

‘예수님! 내가 목회가 안 되는 바람에, 교인들이 불어나지 않는 바람에

내 마음이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습니다.

내 마음을 목회로부터 완전히 독립시켜주시고, 해방시켜주시고,

내 마음을 구원시켜 주시옵소서.’ ...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구원받아야 될 대상은,

메시아께 찾아올 때, 간청해야 될 구원의 내용은

-내 아들로부터 내가 구원을 받아야 되고 (심하게 매여 있는 경우에)

-내 아내로부터 구원을 받고

-선교회/목회에 내 마음이 과도하게 매여 있는 것으로부터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들이나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너무 과도하게 사랑해서.. 도리어 상대를 질식시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가 자유하면, 상대도 자유하고

자기가 매여 있으면, 상대도 얽어매게 됩니다. 내 상태를 보면, 상대의 상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에 얽힌 것을 모르고.. 자기가 사랑이 많을 줄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 ‘구해낸다’는 뜻인데, 현재적으로 설명하면, <내가 빠져나오는 것>

예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려고 하는 구원은

우리 마음을 세상에 매어있는 것으로부터 빼내는데

구원의 기본 목표가 있다는 것이에요.


-사업에 얽히고, 사람에 얽히고, 자기 명예심/자기 자존심에 얽매인 것들을..

거기서 나를 풀어내는 것, 빼내는 것, 구해 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기도는.. 자신을 거기에 더 얽어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젠 예수를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말아야지.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어요.

계속해서 예수 믿는 목적이 그것(내 욕심/내 야망)이라고 하면...

내 욕심/내 야망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예 신앙의 첫 걸음부터!  


▲그러면 구원의 상태가 뭡니까? 내가 구원 받았어요. 그러면 구원의 상태가 어떤 겁니까?

성경대로 말하자면 구원받은 상태는

하나님을 내가 지금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상태가.. 구원받은 상태에요.

내가 얽어매어져 있는 것으로부터 빠져나와서.. 이제는 하나님만 사랑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교회에 헌신하고 충성, 봉사하고 헌금하고 하는

그 모든 믿음의 행위의 마지막 귀결이 뭐냐고요?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집안의 일이 형통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얽어매어진 우상으로부터 풀려나와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지금 내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면.. 내게 구원이 임한 거예요.


여러분, 천국에 가면 우리가 영원토록 사랑하고/영원토록 찬양한다는 거예요.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를 보면서 찬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는데

오늘도 안 지루하고, 내일도 안 지루하고, 그냥 보고 있어도 안 지루해요.

여러분 이런 것 경험해 보셨어요?

제가 우리 자식 같은 경우,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가 않아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겠습니까? 여러분. 그게 구원이에요.

하나님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있어도 더 좋아요. 보면 볼수록 더 좋아요.

날마다 보니까, 이제 주님이 지루하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볼수록 더 좋아요. 

이게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자꾸 딴 게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있자니, 지루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딴 것이 보고 싶어집니다. 어떤 걸 보고 싶어요?


돈 많은 상황을 보고 싶어요.

자식의 높은 성적을 보고 싶어요.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상황을 보고 싶어요.


많은 경우.. 지옥에 안 가고, 천당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불완전한 구원관이라는 거예요.

지옥, 천당 가기 이전에

먼저 내 눈에, 내 마음에.. 오직 예수님/메시아만 크게 보여야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 눈에 물질/명예/쾌락이 크게 보이는 사람이.. 천당 가겠어요? 우상 섬기는데...


▲결국은 나 자신

여러분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 같지요?

여러분이 암에 걸려가지고 방사선 치료 한 번 해보셔서

입맛도 없고 한 50kg 나가시던 분이 38kg, 35kg이 되는 상황이 되면

자식이고, 남편이고 다 귀찮아져요.

마지막 남는 것이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



◑2. 나는 ‘개’ 임을 인정하기


이 여인에게 주님께서 개라고 얘기하신 것은

(이방인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개라고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하여 개라고 불렀지

누가 자기를 향해서 자기가 개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메시아/구세주 앞에 나올 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메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열린 천국문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다 ‘개’입니다.


우리가 붙잡고 어떡하든지 생을 잘 이끌어보겠다고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참으로 숭고해 보이는..

우리의 근실한 삶의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보실 때는 다 ‘개 같은 것’이고 ‘경멸할 일들’이라는 겁니다.


왜요? 하나님 나라/영생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니까요.

(마르틴 루터가 모든 세상 직업을 ‘신께 받은 소명’으로 설명했는데,

그렇게도 볼 수 있고, 또한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관악산을 동쪽에서, 서쪽에서, 남쪽에서, 북쪽에서 볼 때, 각각 모양이 다릅니다.

각각 다 맞는 관점입니다. 어느 하나로만 찝어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영적으로 이방세계에서의 삶 전체를 다 하나님께서 그냥 개라고 보시는데

그 상황을 메시아 앞에 나오면서

내가 지금 살아가는 방식은 개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 버리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라는 겁니다.



◑3. 네 소원대로 되리라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 딸이 나으니라.  마15:28


▲앞서 ‘개’가 되면서, 내가 죽어버렸습니다.

자기 딸에 대한 자기 소원도.. 다 죽어버립니다.

‘개’가 되어서.. 주인의 처분은 무엇이든지 다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 때 주님께서 손대기/역사하기 시작하신다는 거예요.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여기서 우리는 ‘네 소원대로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춰

본문을 풀어 가면 안 됩니다. 기복신앙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위 ◑1.에서 참된 신앙은 ‘오히려 딸의 속박에서 자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내 소원에서 자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주님이 허락하신 것은

내 기복적 소원을 주님이 다 허락해 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개처럼 자아가 죽고서

‘주님 뜻대로 되기 원합니다. 이래도 좋고/저래도 좋습니다’ 했을 때

주님이 주님 뜻대로 결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딸 문제에’ 완전히 자유했을 때에

비로소 주님이 주님 뜻대로 해결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자기 딸을 고쳐주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여인은 이미 ‘딸 문제에’ 자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먼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 딸이 나으니라.

그런데 주님이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일종의 보너스랄까요?


▲목회자로서의 제 개인적 갈등

제가 목회 초년에, 영락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을 때에는

설교를 하고, 교인들이 저를 칭찬하고, 교인들이 저를 좋아하고

이런 것으로 그냥 만족해하면 됐어요.


그런데 제가 담임목회를 시작하니까

교인들의 영혼자체가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제게 유혹이 오는 겁니다.


영락교회 때부터 계속 들은 말씀이 뭐냐 하면

선배목사님들로부터

‘설교가 다가 아니다. 말씀이 다가 아니다. 목회는 종합예술이다.’

이런 얘기를 계속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종합예술이면 뭐해야 되느냐?

경영을 배워야하고, 이벤트의 효과를 동원해야 되고,

그리고 또 목사님들과 연대를 해야 되고...


그런데 제가 단독 목회를 하면서 설교를 하면

성도들의 입에서 뭐라고 말이 나오느냐면

‘너무 세다. 현실을 살아가야하는 우리들한테는 비현실적이다.’

이런 얘기들이 들립니다.


그런데 내가 설교를 마치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제가 설교내용을 한 번 돌이켜 생각(복기)해보면

'정말 비현실적이기는 하겠다.'

'야. 이것 참 이대로 나가다가는 목회가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벤쿠버에서 삼성교회를 창립하고 교회를 이끌어가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그 유혹과 싸웁니다.

갈등하게 되고 고민하게 되고, ‘내가 도대체 어떻게 목회를 해야 좋은가?’


그러다가 다시 십자가 복음을 발견하고, 마음에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목회 던진다. 목회는 망한다!


그리고 오직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가 메시아’라고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 드리면,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한 점으로 모아집니다.

십자가라는 한 점에 모아집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일단 십자가를 통과하는 동안에 다 죽어버려요.

그 사람이 대통령이라도, 그 사람이 여왕이라도, 그 사람이 창녀라도 아무 상관없어요.


창녀와 여왕이 십자가 전에는 창녀와 여왕인데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다 죽어버리니까

죽고 나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니까

이전에 그가 누구였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제로zero 점을 향해서

마치 블랙홀처럼, 십자가라는 블랙홀을 향해서 다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세상은 아무 것도 없어져요.


그리고 위에서부터 깡그리 없어진 사람의 삶의 지평위에,

우리의 마음이 다 사라져버리고 십자가에 빨려 들어가 버린 그 사람의 삶의 지평위에

하나님이 저벅저벅 걸어 다니시는 것을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 내가 벌여놓은 삶의 판도에서

내 마음을 매고 있는 모든 줄들에 대해서 그리스도 십자가를 향하여,

메시아를 향하여 나올 때 우리가 가져야 될 분명한 것은..

 

다른 것 다 필요 없어요.

헌금 안 해도 돼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

(이런 것 없이) 헌금에 애쓰고, 봉사에 애쓰고 하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소원을 바로 가지세요. 어떤 소원을 갖냐고요?

지금 세상 안에서 내 마음을 묶고 있는 이것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놓임을 받겠다고 하는 분명한 소원을 갖고서

이제부터 어떻게 기도 하냐?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설명하면

내가 지금 자식 땜에 꽁꽁 묶여서 마음이 너무너무 찢어지게 아픕니다.

내가 남편 땜에 묶여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걱정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나와서 고백할 때

 

‘내가 이것에 매여 있으므로 이렇게 괴롭습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 분명한 소원이 있을 때 (본문의 여인처럼)

주님께서 이렇게 얘기하실 것입니다.


‘너의 삶이 개판으로 되도 돼?’ 이렇게 물어보실 수도 있어요.

'네가 볼 때 개판처럼 진행될 수도 있는데 괜찮아?' 이렇게 물어보실 거예요.

'네가 만약에 네 자식에 대해 마음을 떼버리고 마음이 해방되면

자식의 삶이 개판이 될 수도 있는데 괜찮아?'


이 때 '주여! 나는 원래 개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식이 개판되는 것 마땅합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물어보십니다.

'사업이 개판돼도 될까? 네가 사업을 잘 돌보고 그러지 않아도 괜찮겠어?

나한테 싹 마음이 들어와 버리면

사업은 완전히 줄이 풀어진 매생이 마냥 바다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텐데,

그래도 되겠어? 개판 될 텐데...'                                                              *매생이: 파래와 비슷한 녹조류

 

'주님, 저는 원래 개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몸입니다.)

개판 되어도 좋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을 때

이제 드디어 메시아신앙이 확정되어진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주님이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손이/하나님의 섭리가/하나님의 역사가

자식에게도 남편에게도 사업에게도 하나님께서 손을 뻗어서

동시에 역사하시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메시아/기독교/십자가 신앙입니다.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