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기도자 고전10:4~5 설교녹취
내 인생에 많은 환란과 시련이 그치지 않는 것은
그래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게 하시고, 그런 절박한 기도를 통해
내 ‘견고한 진’을 파하고, 진정한 기도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섭리다.
▲기도는 ... 오직 주만 바라보는 것
주님은, 우리를 기도자로 만들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게 하신다.
‘저 사람은 나를 받아주겠지/이해해 주겠지..’ 이렇게 철썩 같이 믿고 있었는데,
주님은.. 그 사람으로부터 내가 깊은 상처를 받게 하신다.
그 이유는.. 오직 주만 바라보라는 것이다. 사람을 바라보지말고!
사람을 의지하면.. 기도를 결사적으로 안 하니까!
기도는.. 오직 주님 한 분만 철저히 바라보는 것이다. 시123:2
사람을 의지하거나,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오직 주만 바라보지 않게 되고.. 그러면 간절한 기도자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도자’로 세우는 사람은
반드시 그 자리에 도달하게 하신다... ‘오직 주만 바라보는 자리’다.
내가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자리이다. ♬주만 바라 볼 지라♪
그래서 오직 주만 바라볼 때,
우리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된다. 고후10:5
우리의 완전한 복종은.. 이런 아픔 속에서 비로소 온전케 된다.
우리가 문제를 만나고,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
<그들의 냉정함/박대>를 따지지 마시라.
<내 복종>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내 복종을 온전하게 하시려고>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실 뿐이다.↓
◑야곱을 결사적인 기도자로 만든 도구, 에서
▲에서가 집에 있는 한, 야곱은 편한 날이 없었다.
그 위기가 가장 극에 달한 시점이, 얍복강 나루터를 건너던 날이었다.
야곱에게는.. 도무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에서다.
에서가 있는 한, 야곱에게는 삶에 평안함이 없었다.
야곱은 그렇게 에서를 만나기 싫어했다.
그런데 에서는, 야곱을 ‘기도자’로 만들기 위한 .. 하나님이 동원하신 도구였다.
그 날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은 ‘결사적인 기도자’로 변신한다.
자기 환도뼈가 부러지는 상처를 안고서.. 야곱은 ‘기도의 사람’으로 환골탈태한다.
환도뼈가 부러진 것은.. 어디 도망도 못 가는 상황, 막다른 골목이었다.
꼼짝없이 기도하는 것 말고는.. 그 어떤 탈출구도 없었다.
▲내 인생에 고통을 주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계속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다면,
주님의 의도는... ‘나를 점점 얍복강가로 몰고 가시는 것’이다.
나를 결사적인 기도자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오직 주만 바라보는 기도자’ 야곱은 ... 에서 때문에 가능했다.
에서가 친절하고 관대하고 상냥했으면/보통 사람만 같았어도...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야곱은 절대 변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절대 떠나지 않을 것 같은 거머리 같은 에서가
얍복강을 거쳐서, 야곱이 ‘오직 주만 바라는 기도자’로 변신한 이후
놀랍게도 에서는 야곱을 떠난다.
▲내 인생에 아직도 ‘에서’가 아직 남아있다는 뜻은
내 ‘환도뼈’, 즉 내 자아/내 고집/내 견고한 진이.. 아직 뼈처럼 단단하게 남아있다는 뜻이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에서가 아직 살기등등하고, 기세등등한 이유는
아직 내가 완전히 깨어지지 않은/부서지지 않은,
내 자아/옛사람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완전히 부서지고 깨어질 때까지
에서는 결코 나를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손이 그렇게 움직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관심은, 에서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회개하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아직 자기 삶에 ‘에서’가 남아있는 사람들은
얍복강의 씨름하는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야곱같은 나를, 점점 ‘기도자’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감춰진 섭리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기도자’로 변화된 증거는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한 것이다.
내 뜻을 억지로라도 관철시키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과 반대되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기도이다.
그래서 야곱은, 아버지의 뜻대로, 형 에서를 만나러 나간다.
오늘날 나도 마찬가지다.
어떤 얍복강처럼,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났을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다른 인간적 수단을 강구하지 않는 것은
진정 그가 ‘기도자’가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다윗의 감춰진 기도
▲시편을 읽어보면, 다윗의 <눈물의 기도>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다윗이 얼마나 처절하게 시를 짓는지/기도하는지
그의 고뇌, 탄식, 비통, 울부짖음이 종종 들린다. 너무 자주 들린다.
시편의 2/3를 다윗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약 100편의 시편을 다윗이 지었는데,
그 중에 대부분이 눈물/비통/회개/탄식의 시다.
그런데 같은 시대의 다윗의 일생을 기록한 역사책인 사무엘상하를 보면,
‘다윗이 언제 이렇게 눈물을 많이 흘리며 기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편과 같은 극도로 절박하고 처절한 상황은, 사무엘서에 그리 자주 안 나온다.
그래서 시편은, 다윗의 ‘감춰진 기도’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다윗의 고뇌의 기도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각자의 고난도 다들 감춰져 있다.
목회자가 교인의 가정들을 심방해 보면,
덮어둬서 그렇지, 진짜로 꺼내서 공개하면
남들이 모르는 처절한 고난의 문제들이.. 각 가정마다 다 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되면, 목회자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전투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심각한/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성도들 각 가정마다 감춰져 있음을 알게 된다.
▲도대체 다윗은, 시편의 눈물의 기도를 언제 드렸던 것일까?
우리가 아는 몇 가지 굵직한 사건들이 있다.
밧세바 사건, 압살롬의 모반 사건, 광야에서 사울 왕에게 쫓길 때,
블레셋 왕 앞에서 미친 체 할 때.., 등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윗의 눈물의 기도는... 시편에 너무 많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추측이지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즉 역사서 성경(사무엘, 역대기)에 일일이 세밀하게 다 기록되지 않은
다윗의 고통의 나날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다.
저(설교자)는 이것을 ‘기도자가 되는 과정에서의 연단’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이 다윗을 진정한 ‘기도자’로 만들기 위해
남다른 고통을 계속적으로 주셨던 것이다.
마치 에서가 극심한 고통을 줘서 야곱이 ‘기도자’가 되었듯이
다윗도 시편을 지을 만큼/메시야의 조상이 될 만큼
온전한 ‘기도자’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계속 심적인 고통을 가하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기도자’로 세우시는 사람은
정말 그와 가까운 사람도 잘 알지 못하는.. ‘깊은 영혼의 고뇌’를 그에게 허락하신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완악해서..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기도 안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자기를 쳐서 온전히 그리스도께 복종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온전한 기도자’로 점점 만들어 가시는 과정에서
영혼의 고뇌, 환경의 고난, 인간관계의 어려움 등을 골고루 주시면서
그가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도록..
그래서 세상을 살리고 시대를 변화시키는 ‘기도자’가 되도록..
하나님이 특별히 빚어 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는 사람은.. 이것을 미리 각오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길이 꼭 고달프고 괴로운 길만은 아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네가 약함 가운데서 온전하여지니라!’
결론은, 이 길이 한편은 괴로우면서도, 마지막은 가장 영광스러운 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감춰진 기도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기도를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5:7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예수님이 3년 정도 공생애를 사셨는데,
겟세마네 동산 말고도
예수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다.
만약 겟세마네 동산에서만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라고 하지 않고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라고 표기했을 것이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라고 표기한 것은,
주님이 공생애에 종종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것은 ‘예수님의 감춰진 기도’이다.
이 사실이, 성경에 자세히 명시되지 않고, 히5:7절에 한 번 나오지만
예수님도 (다윗처럼) 종종 깊은 고뇌의 기도를 드리셨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기도자’로 만들어 쓰실 사람은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
그런 막다른 환경으로 몰아가신다.
그래서 자기가 믿었던 인간관계도 다 끊어지고
오직 ‘전심으로 주님만 바라는 기도자’가 되는 것이다.
야곱처럼, 환도뼈가 부러지면서, 주님의 옷자락을 간절히 붙잡게 된다.
‘주여, 저를 축복하지 않으면, 제가 주님을 놓아드릴 수 없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냥 그런 고난의 환경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간절히 기도하면 된다.
내 스스로 통곡과 눈물로 기도 못 하니까.. 주님이 그런 코너로 나를 몰아넣으신다.
이렇게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면서
우리는 점점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된다.
내 ‘견고한 진’도 점점 부서져 나간다.
▲우리 각자에게는
심한 통곡과 눈물 없이는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내 환도뼈/내 견고한 진’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문제를 당하면, 피해서 도망간다. 일단 편한 길을 선택한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에서’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얍복강, 즉 내가 더 이상 도피할 수 없는 자리에 나아가서야
비로소 내 환도뼈가 부러지면서, 나는 ‘기도자’로 환골탈태하게 된다.
물론 그 날 밤은, 한 번 진짜로 죽었다 깨어나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내 자아가 깨어지면서, 이제 ‘기도자’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님의 진정한 축복은, 웃음이 아니라, 눈물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그래서 우리도, 깊은 ‘나의 시편’을 쓰게 하신다...
◑기도는.. 내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
▲육체대로 싸우지 않았던 바울
고린도 교회에, 바울을 두고서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고후10:2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대응한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고후10:3
▲내가 육체에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 아는 길은.. 육체대로 싸우느냐/ 아니면 기도하느냐.
우리가 기도하게 되면,
기도하면 할수록.. 영적 싸움이 다가오게 되는데,
‘나를 더욱 더 완전한 기도자로 키워나가기 위한’ 싸움이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10:4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10:5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싸우지 않았다. 고후10:3
대신에 기도했다. 기도로 영적인 싸움을 벌였다.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키 위한 기도요, 영적 싸움이었다. 10:4~5
▲견고한 진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고후10:4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어려운 환경이나, 어려운 사람과 실제로 부딪힐 때
영적으로 보면, 공중에, 어떤 동일한 영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견고한 진’이다.
그 영적인 문제 ‘견고한 진’이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 환경의 문제/인간관계의 문제로 나타나게 된다.
(모든 문제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지만, 많은 문제가 그렇다.)
이 땅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 일을 되지 않게 만드는 어떤 영적 문제, 곧 ‘견고한 진’이
나와 하나님 사이에, 또한 나와 천국 사이에
공중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견고한 진’을 파하는 능력은
기도와 금식과 회개이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병기다.
‘그 견고한 진’으로 인해 내 주위 환경과 인간관계의 문제가 생기지만
그 문제로 인해... 우리는 오히려 기도하게 된다.
그래서 문제 있는 사람이.. 오히려 기도자로 점점 변신하게 되는데...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10:5
사람들은, 환경이나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떤 ‘이론’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런 저런 합리적 이유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왔다는 이론/논리를 편다.
이론/합리적 이유를 따지는 것도 필요하지만,
대개의 문제나 환경은, 이론을 뻔히 알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때 기도는 모든 이론을 파한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체험해서 아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있다.
물론 그런 ‘자기 생각’도 일리가 있고, 논리적이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
▲여러분,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그 이유는 정말 제각각이다.
뒤에서 보면.. 그 문제의 배경이 되는 이유가 있고,
측면에서 보면.. 그 문제의 주변적 원인/ 주변인과 관계된 이유가 있고,
정면에서 보면.. 그 문제의 직접적 원인/ 나와 결부된 이유가 있다.
무슨 문제 하나를 분석하고 합리적으로 그 원인을 설명하려고 할 때도..
쉽지 않고, 그렇게 논리로 이유를 따져서는.. 대개의 경우 해결을 못 한다.
예를 들면 고부간 갈등/부부갈등 등이다. '이론'으로는 해결 못 한다.
요셉이 팔려간 것도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
-형제들의 시기 때문
-요셉의 고자질 때문
-아버지의 편애 때문 등등.. 여러 방면의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 이유를 다 합해도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이유가 가장 큰 이유다. 시105:17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자기 머리로 이유를 따지는데 몰두하지 말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자기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고,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져야 한다.
기도 가운데, 우리는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요셉의 '구속사적 이유' 같은 것 말이다.
여러분,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내가 해석하지 않으려고 해도
주변에서 이러쿵, 저러쿵 해석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때 우리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해야 한다. 고후10:5
궁리하지 마시고, 요모조모 따지지 마시고, 오직 기도하라는 것이다.
▲정리하면
내 주변에, 삶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영적인 원인이 있다.
물론 그것은 내 잘못, 내 연약함, 내 죄 때문이지만, 또는 이웃의 잘못 때문이지만,
더 근본원인은, 공중에 ‘나의 견고한 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이론을 파하고.. 그것을 깨닫고,
그 ‘견고한 진’을 이기고, 자기 환도뼈를 부러뜨리면서 자기 자아를 철저히 못 박는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이론’과 자기의 ‘높아진 생각’으로
자꾸 문제를 분석하고 이유를 따지는 중에.. ‘견고한 진’은 파해지지 않고
결국 같은 문제가 자기 삶에 계속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그런데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가 온다. 고후10:6
강력한 기도와 회개로, 자기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자기가 영적으로 먼저 온전히 서게 될 때이다.
이 때 자기 개인적 문제/견고한 진이 해결되지만,
그 개인적 문제의 해결은,
종종 공동체적 문제, 그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결정적 열쇠'(언약의 표적/사49:8) 가 된다.
야곱이나 다윗의 '온전한 기도자'로 변신은,
자기 개인적 승리와 변화일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전체의 승리와 변화를 가져왔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어떤 표적이 되었다. 사49:8)
#관리번호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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