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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 눈, 나쁜 눈 비유 2045

LNCK 2009. 8. 22. 12:28

 

◈성한 눈, 나쁜 눈 비유                      마6:22~23                  07.10.10. -설교스크랩, 출처-     



▲샌드위치처럼 삽입되다

본문 마6:22~23절의 ‘성한 눈과 나쁜 눈의 비유’는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앞에는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6:20, 너희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

6:21,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는 말씀이 나와요.


본문의 뒤에는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6:25절부터도 물질에 관한 말씀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 중간에 본문이 위치합니다.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저는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다가

듣는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시면서,

마음의 답답함이 확 밀려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청중들의 반응을 보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을 때,

다른 내용을 끌어들여 이해를 도우려 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보니까,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더란 말이에요.

보물을 하늘에 쌓으며 살수가 없는 조건에서 살고 있더란 말이에요.

왜 그렇습니까?

땅의 것들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으니까!

아무리 하늘의 방식으로 살라고 해도, 땅만 보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본문을, ‘재물에 관한 설교’ 도중에

갑자기 ‘시력이 좋고 나쁜 비유’를 삽입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5:14

내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즉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내가 자동적으로 발광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빛이.. 나를 통해 비춰지게 됩니다.


내가 거짓말 안 하고, 구제하는 등.. 외적인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빛을 발할 때

그 빛이 내 행동으로 나타나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전 지식을 갖고서, 본문을 해석해 봅시다.

내 몸 자체가 하나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눈이 좋으면 몸이 밝아서 좋겠지만, 눈이 나쁘면 몸이 다 얼마나 어둡겠냐?

그런데 내가 ‘등불’이라고 할 때

그 ‘밝기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밝은 등불이 있고, 희미하고 어두운 등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내 눈>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좋으면 몸이 밝아서 좋겠지만, 눈이 나쁘면 몸이 다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쳐다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자꾸 시각을 땅에 고정시켜서 쳐다보면,

즉, 물질과 재물을 늘 쳐다보고 살면...

온 몸이 어두워진다는 것이고,

그러면 제대로 된 등불, 빛을 발하는 등불이 될 수 없다는 것이요...

한 마디로 <내 눈이/내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하늘 관점, 하늘 방식을 얘기해도

너희가 계속 땅의 것만 보고 있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내가 바라보는 것을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돈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내 행동의 궤적이 돈을 따라서 결정됩니다.

돈이 잘 벌리는 곳으로 가고, 돈 모으는 방식으로 살게 되고..

내가 지속적으로 보고 있는 그 돈이.. 내가 걸어갈 길을 밝혀 줍니다.

 

이어령 씨가 쓴 한자 주석 책에 보면, ‘주인 主’자를

등잔 모양(王)에, 그 위에 심지가 얹혀진 것이 ‘주인 主’자래요.

그러니까 ‘등잔처럼,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등잔처럼 가만히 앉아서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는 그것이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길을 열게 되므로..

내 눈이 쳐다보는 그것이.. 내 삶의 주인이 됩니다.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는 이유

우리가 눈으로 하나님을 주목해서 쳐다보고 있어야,

하늘이 주인 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이 될 텐데,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이 모두 이 땅의 것들이에요.


예수님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곁눈으로 이 세상 것을 바라 볼 수는 없는 겁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까?

돈을 너무 좋아서 돈만 바라보다 보니까,

다른 것이 안 보이게 되는 거죠.


     예를 들면, 연애 할 때도,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는 것은

     그 여자 말고 다른 여자는 여자로 안 보인다는 말 아닙니까...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눈이 먼다는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눈이 멀어야 해요.

     그런데, 자꾸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 듣고,

     눈을 재물에게서 떼지 못하는 겁니다.


돈이 벌리건/ 안 벌리건 간에,

돈에 눈이 멀면, 그것 말고는 보이지가 않아서, 늘 돈 걱정이 되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돈을,

내가 하나님 때문에 눈이 멀게 되면,

하늘에 쌓는 것이 되고, 절대로 문제가 안 생길 텐데...


돈에 눈이 멀게 되면.. 돈을 자꾸 지켜보고 자꾸 쌓아요.

그러면 결국 녹슬고 도둑맞아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마6:19



▲눈이 주는 걱정과 염려로부터 자유하고 싶었던 어떤 해부학자 <소설>

이건 비단 우리 믿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완전한 운둔자>라는 단편이 있어요.


해부학자 루베르가 주인공인데, 무한한 정신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해 걱정과 염려가 생기니까,

눈과 뇌의 중추신경의 연결을 끊으려고 합니다.


결국 5감각시경을 다 끊어내려고 하는 과정에서,

자기 뇌를 끄집어내서 포도당 영양액 속에 집어넣고,

때가 되면 영양액만 바꿔주는 거예요.


가족 같은 사람들이 포도당 영양액을 바꿔주며 살았는데,

(마지막에 그것을 모르는 아이들이,

그 뇌를 깨고 던져서.. 주인공의 뇌가 개밥이 되었다는 내용이에요.)


주인공이 무한한 정신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방해가 되는 시신경을 끊어버린다는 이 이야기가

(실제로 모방해서는 절대 안 되지만) 어떤 교훈이 된다고 봅니다.


시신경과 청각 등을 통해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들이 너무 방해하니까,

남이 돈을 많이 벌고, 남이 큰 집에 사는 것을 보면

내 마음이 벌렁벌렁 하잖아요,


그만큼 눈으로 (귀로도 마찬가지) 보는 것에 의해서,

우리가 큰 영향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보는 것에 의해서.. 내 삶과, 내 진로와, 내 영생의 모든 것이

결판난다는 것입니다. (이 설교문의 주제)


    마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내 눈이 쳐다보는 것으로 인해, 내 온 몸이 온전해 진다는 것입니다.

   본문 전후 문맥과 연결하면, 내 눈이 돈을 쳐다보고 있으면, 내 온 몸이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

 

▲눈이 밝으려면,

불교에서도 이것을 추구합니다. 색즉공.

보이는 것이 사실은 없는 것이라고..


그런데 아무리 얘기해도 그게 됩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더 유혹 받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늘 십자가만 바라보는 겁니다. 다른 것을 안보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게 문제고, 귀에 들리는 것이 문제죠.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서 보이는 것이 차단이 되어야 해요.

(그런데 이게 잘 안되죠. 그래서 경건의 훈련practice이 오랜 기간 필요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뭐냐 하면,

돈 걱정이 될 때, 돈 문제 안보고 십자가 보는 것. 이게 믿음이에요.

시선이 그곳만 보는데,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져요.


십자가를 계속 보면, 십자가에 의해 움직여 갑니다.

돈 문제 앞에서 십자가를 보면

내 눈을 하늘로 끌고 올라가서

돈에 대해 갖고 계신 하늘의 뜻을 보게 됩니다.

그 뜻이 내 마음에 전달이 됩니다.


상상입니다만, 마치 만화영화처럼,

내 눈을 길게 (껌처럼) 빼낸다고 상상해 보세요.

시신경이 아주 긴 껌처럼 늘어나서 하늘로 올라간다면,

하늘을 볼 거 아니에요.


내 눈이 하나님을 보면, 땅에 있는 내 몸이 웃어요.

다른 사람들은 경제가 어렵다고 다 울고 있는데,

나는 하늘의 하나님을 보면서 웃어요.


남들은 그러죠, ‘쟤는 왜 웃어?’

이유를 모르죠. 하늘을 못 보니까... 이게 믿음의 사람들이에요.


반대로 지금, 눈이 연결되어 어두운 상자 속에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몸은 이 밝은 방에 있으면서 눈은 어두운 상자 속에 있으니까

사방을 더듬고 다니겠죠.


마찬가지에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보는 대로 움직이고,

우리는 하늘에서 본 것대로 움직이며...  사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어요.

이 땅의 사람들은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면 큰일 나요.

치안이 허술한 상태인데 죽을 지도 몰라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의 뜻을 봅니다.

하나님의 손만 보고 갑니다, 저리로 가라 하면 가고,

사람들은 어딜 가. 그러고,

이게 믿음의 조상의 발걸음이에요.


여러분, 목사님들도

목회에 바빠서 십자가를 못 보면.. 십자가를 모르는 거예요.

지속적으로 십자가를 봐야 해요.

이 땅에서 유일하게 24시간 지속적으로 봐도 괜찮은 것은 십자가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24시간 지속적으로 물질을 바라보니까.. 온 몸이 어두워지는 것이지요.

(후략)                                                                                                             ▣ 물질과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