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에 성벽을 돌아본 느헤미야 느2:11~20 08.11.10.설교녹취
*원제목 : 이런 신앙도 다 있나?
대다수 성도는.. 하나님이 자기 마음을 잘 알아주시고,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
그래서 내 마음에 담긴 소원들을.. 하나님이 좀 알아서 척척 이루어주시기.. 바란다.
대다수는 그런 은근한 기대감 속에서 일평생 신앙생활을 해 나간다.
그러나 소수의 성도는.. 오히려 자기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기 원한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런 성도였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를 물으며, 관심기울이며 신앙 생활한다.
오직 소수 성도만 그렇게 신앙생활 해 나가는데...
◑밤중에 느헤미야가 성벽을 시찰한 이유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서 도착한 이후 사흘을 쉰 다음에
아무도 모르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서
아주 가까운 한 두 사람만 데리고, 나귀에 올라타고서,
밤중에 조용히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돌아보게 된다. 2:11~12
그 옛날 가로등도 하나 없던 그 시절에,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마 희미한 등불 하나 앞 세워서, 무너진 성벽을 여기저기 둘러보았을 것이다.
그 후에,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지도자, 방백, 유지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우리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자’ 라고 말할 때에도
<자기가 그 전날 밤에 성벽을 돌아본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2:16~17
▲느헤미야는 왜 밤에 성벽을 돌아보았으며, 왜 그 돌아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일까?
그에게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일까?
단순히 그의 성격이 주도면밀했기 때문일까?
그래서 산발랏과 도비야 같은 방해세력들이
괜히 훼방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런데 성벽을 시찰할 때,
어두운 밤에 돌아보는 것은..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시찰을 해서 상황을 파악하려면, 밝은 대낮에 해야.. 상황이 잘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산발랏과 도비야의 반대는.. 미리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앞으로 곧 대명천지에 드러내 놓고 성벽 재건을 해야 될 시점에서,
반대세력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이 무서워서
어두운 밤에 숨어서 돌아보았다... 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느헤미야서는 묘한 ‘유비’를 제공해 주고 있다.
*유비 : 비유와 비슷한 말인데, A를 설명하기 위해서
A에다 B를 갔다 대어서, A를 더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
느헤미야는 ‘술관원장’이다.
술관원장은 비서실장인지, 정무수석인지.. 어쨌든 왕의 최측근으로서,
마치 왕의 입속의 혀처럼, 왕의 분신처럼 처신하는 사람이다.
왕의 안색을 살펴서, 수심이 보이면.. 그 수심을 풀어드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왕이 필요로 하는 것을, 왕보다 한 발 앞서 느껴서, 그 시중을 드는 사람이다.
여기서 ‘묘한 유비’라는 것은,
느헤미야가 왕의 시중을 들면서, 왕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그가 하나님의 시중을 들면서, 하나님의 안색을 살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느헤미야의 유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신앙이란,
술관원장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시중드는 것처럼
주도면밀하게 하나님을 시중들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이
참 신앙임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유비/느헤미야의 배경’의 연장선상에서
그가 밤중에 거의 혼자 성벽을 돌아본 이유를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측근으로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기 원했던 것이다.
그 밤중에, 성벽을 돌아보면서, 느헤미야는 주님의 마음을 느껴보기 원했던 것이다.
성벽이 무너진 현장을 일일이 답사하면서,
자기 백성의 처참한 상황으로 인해 마음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헤미야가 그 한밤중에 읽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에 이 일을 낮에 했다고 가정해 보자.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유지들이 자동적으로 뒤따라붙었을 것이다.
사방에서 의견이 분분했을 것이다.
-방백들이 말하는.. 성벽재건에 관계된 정치적인 설명들
-기술자가 말하는.. 자재와 인력의 예상치를 거론하는 건축학적인 설명들
-제사장들이 말하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는 설명들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런 저런 분분한 이야기로.. 하나님의 심중을 느끼기는커녕
느헤미야는 오히려 생각만 복잡해졌을 것이다.
▲느헤미야는 과거에도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고 본다.
페르시아의 궁궐에서 아닥사스다 왕이 어떤 고민과 스트레스에 빠져서
모든 신하들과 문무백관들을 다 물리치고
심지어는 가족과 왕비까지 다 물러가게 하고
혼자 외딴 방에 들어가서 고민과 시름에 빠져 있을 때
그 때 왕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술관원장이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왕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왕의 친근한 상담상대가 되어주면서, 왕과 독대했던 경험이 여러 번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왕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던 경험을.. 느헤미야는 이미 여러 번 했을 것이다.
▲같은 경험을, 그 야심한 밤에, 느헤미야는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한밤중에 느헤미야는 성벽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술관원장’(최측근)으로서...
‘하나님 아버지, 무너진 예루살렘이.. 이렇게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했겠군요!’
그래서 느헤미야는 지금
그 어떤 사람의 관점도, 의견도 듣기 이전에
무너진 성벽에 대하여, 앞으로 일으킬 성벽 재건 공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고, 하나님의 의견을 듣기 원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밤에 성벽을 돌아보았던 것에 대해서
방백들에게, 유지들에게.. 일절 함구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신앙적 비밀을.. 일일이 다 밝힐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과 독대하며 나눈 대화들을
그 다음날 대신들에게 발설하면 안 되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느헤미야는,
자기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밤에 성벽을 돌아본 일들을,
예루살렘의 방백들에게 일절 함구했던 것이다.
◑회복되어져야 할 예루살렘 성벽
▲성벽의 의미
예루살렘 성벽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시는 곳이요, 하나님이 늘 눈여겨보고 계시는 곳이다.
지금 우리들은, 자기 마음의 아픔을 하소연하고 호소하지..
지금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 마음의 아픔을 알아드리는가?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마치 술관원장이 왕의 의중을 알아드린 것처럼,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는, 하나님의 술관원장이 되어드린 것이다.
성벽은.. 계시록에 새예루살렘 성으로서, ‘어린양의 신부, 성도들’을 의미한다.
그 성벽은..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데, (성전은 하나님을 의미하고)
하나님은 ‘성전’만 재건하면 그만이고
‘성벽’은 아무렇게나 훼파되어도 괜찮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성전이 재건된다면, 이제 성벽도 당연히 재건되어야 한다.
성벽이 ‘영적’으로는 성도들이라고 했는데,
‘현실적’으로도 성벽은 성도들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성벽은.. 성도들의 복지와 안전에 결정적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성벽은 반드시 회복되어져야 한다.
에스겔47장의 예언을 보면,
생수의 강이 ‘성전’(지성소)에서 스며 나와 겔47:1
‘성벽’(북문, 동문)을 지나서 47:2
창일한 강을 이루어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 예언되어 있다.
말씀/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 예언되었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사2:3
느헤미야 시대 상황에, 지금 <성전>은 이미 재건되었고,
이제 <성벽> 재건만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일단 세상이 복음으로/생수의 강으로 가득 차기 이전에
먼저 성전(예배)과 성벽(언약 백성들)이 먼저
복음으로/생수의 강으로 가득 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샘의 근원에서 흐르는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경로가 있는데,
중간 과정(성벽/하나님의 백성들)을 건너뛰어서.. 세계로 퍼지지는 않는다.
강물은 그렇게 흐르는 법이 없다.
이런 회복은,
‘영적 회복’과 동시에 ‘현실적 회복’도 이루어져야 한다.
70년 바벨론 포로의 정화의 기간을 거친 이스라엘 언약 백성은
지금 영적 회복과 더불어 육적(현실적)회복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것이 ‘성전 재건’과 ‘성벽 재건’의 의미이다.
◑적용
▲성벽은 또한 성전을 보호하는 역할을 갖고 있다.
여러분, 성벽이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세상이 성벽 안으로 쇄도해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세상적 가치관이 밀고 들어와서
생수의 강물을 버려놓게 된다. 흐려놓게 된다.
‘돈이 좋고, 출세해야 되고, 성공해야 되고...’
이런 세속주의의 물결이 생수의 강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이유는
성벽이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느헤미야 시대처럼, 무너진 성벽을 다시 재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성전으로부터 나오는 그 생수의 강, 샘물을
온 세상으로 널리 보급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아픔을, 누군가는 느헤미야처럼, 지금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벽이 무너져 있는 그 하나님의 아픔을,
느헤미야처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 아픔을 느끼고, 항상 자기 아픔을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있다.
물질주의가 성벽으로 쇄도해 들어와서, 성벽이 군데군데 다 허물어진 것을
느헤미야처럼 바라보고, 마음 아파하지 못하고..,
현실 파악을 전혀 못하고, 오히여 산발랏과 도비야과 짝하고 있는 현실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은 거의 관심 없고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물질, 취직, 출세)을 똑같이 원하면서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해서 마음 아프다고
내 마음 위로해 달라는 성도들이... 가득한 것이 오늘날의 세상이다.
그래서 오늘날 느헤미야와 같은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오직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만 염두에 두면서
성벽을 돌아본 느헤미야!
나는 밤중에 과연 어떤 일에 골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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