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반전 느2:1~10 -08.11.07.설교스크랩, 출처-
▲신하가 임금님에게 간언하는 5가지의 방법.
정간- 정면에서 아주 정직하게 임금님에게 간언하는 방법입니다.
풍간- 간접적으로 부드럽게 말 하는 것
순간- 순리를 따라서 임금님에게 간언 한다
함간- 목숨을 걸고 목이 떨어져 나갈 것을 각오하고 간언한다.
주간- 임금님의 안색을 살피면서 눈치 것 간언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주된 업무가 뭐냐 하면 임금님의 오간의 입장에서 볼 때
정간도 아니고, 순간도 아니고, 지간도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주된 일은 ‘주간’입니다.
임금님의 안색을 살펴야 되는 것이에요.
임금님의 안색을 살피고 임금님의 안색이 항상 기쁨이 충만할 수 있는 방향으로
시중을 들어야 되는 것이에요.
▲수심이 있었던 느헤이먀
근데 오늘 본문에 보면 1절부터 이렇게 얘기 하죠.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어찌하여 수심이 있느냐? 느2:1~2
그동안은 수심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임금님의 얼굴의 안색을 살펴야 될 것이 본분인 신하가
임금님 앞에서 얼굴에 수심을 띤다 이거는 사형감입니다. 사형감이예요.
근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는 거예요.
네가 얼굴에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2:2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했다고 그래요.
깜짝 놀라는 거지요. 두려워 할 수밖에 없지요.
▲느헤미야의 안색을 오히려 살피는 임금님
이 뒷얘기는 전부 임금님이 느헤미야의 안색을 살피면서
왕이 느헤미야의 시중을 든다는 것입니다. 이게 왠 반전입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기막힌 반전의 이유가 도대체 뭐겠습니까?
그래서 느헤미야가 구하기도 전에, 왕이 알아서 마병을 내줍니다.
군대 장관과. 사령관과 마병을 내주는 것이에요.
시중을 드는 일환으로 자발적으로 느헤미야를 돕고 있는 거예요.
느헤미야는 지금 왕 앞에서, 이미 왕위에서 왕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실감하고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측근이 된 것, 하나님의 마음을 읽은 것이에요.
자, 여기서 신앙인들이 경험할 수 있는 ‘기가 막힌 반전’이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시중을 들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면,
사람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면서, 우리의 시중을 든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하나님의 시중을 들었을 때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의 마음을 감동시키며(마병을 내 주며)
느헤미야의 시중을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2:2
왕이 신하의 시중을 들다니, ‘기막힌 반전’이지요. ←이 설교제목
▲적용
물론 말은 느헤미야가 존대를 하지요. ‘임금님이시여!’
말은 임금이 ‘하대’를 하지요. ↔존대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왕이 느헤미야를 섬기는 게 돼 버린 것이에요.
아, 이거 기가 막힌 이야기 아닙니까?
이것이 그러면 느헤미야의 이야기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니지요. 이 기가 막힌 반전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 신앙인들의 일상적인 경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 내가 돈 걱정을 합니다.
돈 걱정을 한다는 것은.. 마음이 돈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에요.
자식걱정을 한다는 것은.. 자식의 포로가 됐다는 겁니다.
목사의 경우, 교회 일로 걱정한다는 것은.. 교회 일에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상황이 어떻게 역전이 됩니까?
마치 느헤미야가 임금의 안색을 살피듯이
하나님의 측근이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중보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면,
그 마음을 갖기만 하면.. 갑자기 ‘기막힌 반전’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돈들이 나를 따라오는 겁니다. 돈들이 나를 시중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자식의 일이 나를 시중듭니다.
내가 이제 더 이상 자식의 일을 시중들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걱정을 내 걱정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내 삶의 모든 영역들이 나를 섬기고, 나를 시중들게 된다는 것이에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되니까
돈도/ 일도/ 사람도.. 나를 따라 옵니다.
기가 막힌 내용이에요. 이 이야기가.
▲산발랏과 도비야의 근심 ↔ 느헤미야의 근심
오늘 본문 느2:10절에 이제 왕이 써준 조서를 들고 예루살렘으로 오면서
이것을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사람 도비야에게 보여주게 되자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의 근심이 뭡니까?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기득권을 쥐고 있던 자기네들의 형편이
이제 느헤미야라고 하는 임금님의 아주 총애 받는 이 술 관원이 와가지고
여기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이스라엘이 부강해버리면
자기들의 기득권에 악영향을 미칠까봐 근심을 한다는 것이에요.
느헤미야의 근심과 대비가 되는 겁니다.
-내 삶의 지배영역이 줄어들까봐
-내 삶이 안 될까봐
-내 자식이 안 되고 내 가정이 안 될까봐
-내 사업이 안 될까봐 하는 걱정... 이방인들의 걱정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을 실감하며 사는 느헤미야의 걱정이 뭐냐고요?
하나님의 측근이 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서
이 세상은 갑자기 나를 시중드는 요소와 사람들로 바뀌어 버린다는 거예요.
물론 내가 말을 존대를 하고,
말로써 나에게 하대하는, 나보다 높은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하나님을 돕는 마음으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만나는 사람마다, 벌어지는 일마다
내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한 나의 욕정과 욕망과 야심과 꿈과 드림 이런 걸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을 때, 내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세상을 이긴다는 말이 거기서 통용이 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왕 같은 제사장이다 고 하는 말이
이런 뜻의 의미도 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 - 십자가
하나님의 마음이 가있는 곳에 우리 마음이 가야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렇죠?
이 지구표면위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자리,
그 자리보다 더 하나님의 마음을 끄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마음은
이 지구표면위에서 미국의 백악관도 아니고
중국의 북경도 아니고, 서울의 그 어디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사건위에 머물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의 측근이 되려면
하나님의 마음이 가 있는 곳에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마음이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자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과 만나게 된다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 말고, 하나님이 어디에 마음을 두시겠습니까?
당신의 가장 귀하신 외아들이,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는데
그 곳보다 다른 곳에 마음을 두실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다면
반드시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향해 마음이 움직여 가야 되지요.
그러니까 자식을 바라볼 때도, 십자가를 통해서.. 자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업을 바라볼 때도, 십자가를 통해서.. 사업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때 자식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읽혀진다는 것이에요.
이때 사업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읽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측근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니까요.
그렇게 되면 ‘기가 막힌 반전’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예요.
내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이, (하나님을 도우려는 마음으로)
나의 시중을 드는 일이 생긴다니까요! ▣ 삶의 통찰력
'분류 없음 > 2008'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밤중에 성벽을 돌아본 느헤미야 2037 (0) | 2009.08.17 |
---|---|
은혜의 통로가 된 느헤미야 2031 (0) | 2009.08.12 |
중보기도의 올바른 뜻 2023 (0) | 2009.08.07 |
성령을 따라 난 자가 핍박받는 이유 2021 (0) | 2009.08.06 |
하나님의 내미시는 손 2005 (0) | 2009.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