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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이 생명 보다 더 소중하다 2046

LNCK 2009. 8. 22. 20:21

◈사명이 생명 보다 더 소중하다                행20:24             09.06.19. 성목사님 설교녹취

 

부제: 슬픔 가운데만 되는 회개가 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우리가 인간적으로 극심한 아픔과 슬픔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런 기회를 만나면, 깊이 회개하는 (유리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깊이 회개한 결과, 자기 사명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데... 



◑설교자의 한라산 회개


제 삶에 한 때, 크게 낙심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기도원에 갈 마음도 생기지 않았고,

한라산 꼭대기 밑에, 어떤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팻말도 없는 묘지였다.

산행을 하다가 우연히 발걸음을 옮긴 곳이, 그곳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처녀 총각들이 죽었을 때, 묻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그 공동묘지에 앉아서, 낙심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막히고 안 풀리는가?’ 하며 좌절했다.


▲그 때 거기서, 주님이 그 절망 가운데, 내게 주셨던 은혜는 <회개>였다.

주님은 거기서, 사랑 가운데 저를 책망하셨다.


‘이 세상에서, 네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니?

네가 이런 문제로.., 죽고 싶으냐?

너는 지금 삶의 목적을 잃었다. 너는 회개하라!

 

탈북자들을 보라.

그들에 비하면, 네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너는 회개하라!’


저는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 저는 깨달았다.

사명생명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생명에 대해 연련하고, 애처롭게 생각할 처지가 아니라, 그런 것에 정력 낭비 말고,

사명에 대해 혼신의 힘을 다하라는 깨우침이었다.


거기서 나는 행20:24절 말씀을 깊이 묵상했다.

‘내가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대신에,

죽고 싶은 각오로, 사명/복음전파에 대해 돌진해야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바울은, 자기 사명을 자기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도 혹시

지금 자기 현실이 너무 힘들어 죽고 싶다는 분이 계시거든

(잘 되었다) 그 죽으려는 각오와 열정으로

복음전파(사명)에 한 번 돌입해 보시기 바란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오히려 더 값진 죽음이다.


제가 한라산 공동묘지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내 목숨이 스스로 죽고 싶을 때,

그딴 짓 말고, 사도바울을 보니까, 그도 죽고 싶었는데, 나와는 목적이 달랐다.

그래서 나도 사도바울처럼

‘내 사명을 따라서 한 번 죽어봐야 되겠다...’ 고 결심한 것이다.



◑어느 사업가의 지리산 회개


▲한 사장이, 자기가 운전하던 차가 사고가 났는데, 아내와 자녀는 즉사하고,

자기만 간신히 살았다.

그 분은, 자기 스스로, 자기가 더 이상 계속 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앙심도 극심히 흔들렸고, 하나님의 사랑에 깊은 불신이 생겼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지리산 정상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자신을 한탄하고 있었다.

더 이상 살거나, 사업해서 돈을 벌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한 사자messenger를 보내셨다.

그는 탈북자 소년이었다.

어떻게 지리산 꼭대기에서 둘이 만나게 되었는지..

우연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 탈북자 소년은, 그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도 국경을 넘어 오면서, 엄마, 아버지, 형제를 다 잃었습니다.

그리고 저 혼자 살아있습니다!’


그 분은, 탈북자 소년을 만나서 그 슬픈 얘기를 자세히 듣고는,

거기서부터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회개가 시작되었다.

‘저 소년은 저렇게 부모 형제 다 잃고도, 저렇게 꿋꿋하게 살아가는데,

난 죽으려고만 하다니.. 이게 뭔가?’


그 지리산 산꼭대기에서

그 사장은 ‘생명보다 소중한 사명’을 굳게 결심했다.

‘내가 죽으려고 했는데, 그 죽을 각오로 이제 한 번 사명을 위해 살아보자!’


▲그는 기도 중에, 자기 사명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기와 비슷한 슬픔을 당한.. 탈북자를 돕는 일이었다.

그의 장점은, 가족을 잃은 탈북자들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가 탈북자 선교를 하라고,

그의 아내와 자녀까지 다 먼저 데려가신 것일까?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는 없다.)


▲그는 지금 두만강에 가 있다.

거기서 탈북자들과 똑같이 입고, 탈북자들과 똑같이 먹으면서

거지와 흡사하게 살면서, 그들을 돌보고 있다.

그는 탈북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탈북자와 동일한 수준으로 살기로, 스스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과거에 한 업체의 사장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사명을 발견한 이후로,

사명은, 자기에게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는 많은 사람을 도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걸인들이 사는 움막에, 탈북자들과 같이 사는데, 그의 기도는 이렇다.

‘주님, 제가 한 명을 (제대로) 사랑하게 해 주소서!’


그는 그렇게 만난 그 한 명에게, 자기의 아픈 가슴으로,

그 한 명의 아픔을 싸매어 주는.. 그런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한다.


‘네 슬픔이 그렇게 중요하냐?’

우리가 슬퍼서 죽고 싶은 지경일 때,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신다.↖


‘정말 중요한 일을 위해서, 한 번 슬퍼해 봐라!, 한 번 죽고 싶은 마음이 들어 봐라!’

스스로 죽고 싶다는 사람에게,

주님은 오늘도 이렇게 도전하실 것이다.


요즘 자기가 애지중지 기르던 사랑하던 개가, 갑자기 차에 치어 죽어서..

정말 죽고 싶다/더 이상 살기 싫다/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애완견 때문에 죽고 싶은 그 열정으로

주와 복음을 위해서 한 번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가 보시기를 축원 드린다.



◑두 자녀를 잃은 어떤 재미교포의 회개


▲2004년인가 교민신문에서, 교통사고로 두 자녀를 한꺼번에 잃은 분의 기사를 읽었다.

‘그를 만나라’고 주님이 제 마음에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그를 찾아갔으나, 그가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 슬픔과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에, 아무도 만나기 싫었던 것이다.


그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찾아가서, 욥기의 말씀으로 위로하려고 했으나

‘목사님, 그런 설교하지 마세요. 저는 욥이 아닙니다!’ 라고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주님이 제게 너무 강한 감동을 주셨고,

저도 만나 뵙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한 번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분이 이렇게 제게 말했다.


자기가 두 자녀를 교통사고로 잃기 전에,

‘네 자녀를 내게 달라’는 주님의 내적 음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자기는, 자기 자녀를 신학교에 보내는 것인 줄로 알고.. 안이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분이 저희 교회 새벽기도회에 한 번 나오셨다.

(교인들은 모르는 상황에서, 나만 알고 있었다.)

그 날 새벽기도시간에, 제가 특별히 그분을 위해 (안수)기도해 드리는 시간에,

주님의 강력한 내적음성이 제게 들려왔다.

    (그 분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전하라! 


그런데 저는, 도저히 그 음성을 대언할 수 없었다.

지금 슬픔을 당해서 죽을 지경인 성도님께, 위로를 찾아 나오신 분께

위로는 못해드릴 망정, ‘회개하라’는 소리가.. 될 소린가?

    ‘주님, 안 됩니다. 그가 시험 듭니다.

    주님, 대신에 성경구절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말하겠습니다.’


그 때 제 마음에 이런 음성이 들렸다.

    ‘(자녀를 잃은) 욥도 회개했다. 너도 회개하라!’ (라는 말씀을 전해라)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다.

그런 의인도 하나님이 회개를 시키셨는데, 그래서 욥이 회개했는데,

부족한 우리 인간들이야.. 어찌 회개할 것이 없다고,

자기를 정당화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부끄럽게도, 결국 저는 ‘회개하라’는 말씀을,

그 당시에 그 분께 직설적으로 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제가 부드럽게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욥도 자녀를 잃고서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는데,  욥42:6

하나님, 이 분이, 이 슬픔 속에서만 할 수 있는 회개가 있다면, 하게 하옵소서’

 

▲지금 그 분은, 수많은 사람들을 중보하며.. 살고 있다.

주님께서 내적으로 강하게 그에게 말씀하셨을 때,    ‘네 자녀를 내게 달라’

좀 더 귀담아 듣고, 좀 더 신중하게 반응했었어야 했는데...

자기가 그렇게 하지 않고, 부주의하게 대처하다가...

끔찍한 일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그가,

주님의 내적인 어떤 음성을 들었을 때

신중하게 대처하는 사람으로/간절한 중보하는 기도자로 ... 바뀐 것이다.


 

▲마치는 말

당신은, 당신의 생명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시는가?

아니면 당신의 사명을 정말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가?


사도바울은, 자기에게 사명이,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고백했다. 행20:24

우리가 그 고백을 못 드리고,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애지중지 싸고도니까,


하나님은 그 애지중지하는 생명을 ‘내게 달라’ 하시며, 거두어 가 버리기도 하신다.

그 이유는 ‘이제 사명을 애지중지하고 살아라’는 뜻이다.


물론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분명하다면,

그래서 그 사명을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산다면

주님이 굳이 그 생명을 달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분명한데도,

내 생명(자녀, 사업, 명예)을 내 사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애지중지 하면서 살면...

어느 날 하나님은, 그것을 가차 없이 거두어 가 버리신다. 우리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

그 이유는, 사명이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그렇다고 하나님은 냉혈한이 아니시다.

나중에 천국에 갔을 때,

‘주님의 판단이 옳으셨습니다.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시119:137등

우리는 그렇게 고백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슬픔 가운데서만 되는 회개’가 있다.

그래서 혹시 자녀를/배우자를/연인을/부모를

잃게 되는 극한 슬픔을 당했을 때

내가 회개하는 복된 기회로 삼아야 한다.


도저히 깊은 회개가 안 되니까

하나님은 ‘깊은 슬픔을 주시고, 회개로 나를 인도’하신다.


그 복된 회개가 정말 되었다는 증거는

‘생명보다 더 중요한 사명’을 내가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슬픔이 없이는, 그 사명을 깨닫지 못하니까

그 슬픔 가운데서, 회개하면서, 자기의 사명을 제대로 깨닫는 것이다.                      ▣ 꿈, 비전, 소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