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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믿음, 환란과 믿음

LNCK 2009. 9. 2. 19:36

 

◈지식과 믿음, 환란과 믿음       행18:24~28       09.07.30.설교녹취

 

◑1. 지식과 믿음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사람, 아볼로                                        

행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마치 오늘날 미국의 보스턴처럼.. 학문의 도시였다.

지성과 학문의 전당과 같은 도시였다.

세계적인 도서관이 그 도시에 있었고, 거기서 많은 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그 도시 출신 아볼로 라는 유대인이, 에베소로 왔다.

그는 공부를 많이 했으며, 성경에 능한 자였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는, 학문이 많고(공부를 많이 하고) 성경에 능한 사람을,

즉 아볼로 같은 사람을.. 목사로 청빙하기 좋아한다.

 

그런데 만약 환란의 날이 닥쳤다고 가정해 보자.

그 때 빛을 발하고, 두각을 나타낼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사람’이 아마도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던, 시골의 어느 산골 교회에서

하나님의 복음 전하는 일에,

자기 목숨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그 날에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고비 고비마다 위기가 찾아왔을 때

복음을 지키고, 기독교의 생명력의 바통을 받아서 계속 유지했던 주인공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위클리프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지식이 우상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 만족을 추구하고,

그런 지적 만족을 충족시켜주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당신의 삶 속에,

당신의 노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절망과 염려, 근심, 걱정이 엄습했을 때,

당신이 추구해왔던 ‘성경 지식’ ... 그것은 별 것 아니다. 거의 소용없다.

(혹시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나) 저는 제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과 ‘지식’은 별로 상관없다.

예수님이 12사도를 택하실 때, ‘학력, 지식’ 이런 것 보고 뽑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믿음 좋다고 칭찬하신 백부장, 수로보니게 여인도 보면

성경 지식이 탁월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제 말 뜻은, ‘성경 지식이 필요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무식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식이 전부는 아니라는 뜻이다.

지식이 있든지/없든지..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식이 있으면 좋겠지만,

만약 그 지식이 믿음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없는 지식이 되고 만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날 현대 교인들이나, 신학도들 중에,

믿음이 거의 없으면서, 성경지식을 채우는 것으로 믿음 생활 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위험성을 경고 드리는 것이다.

 

12사도는, 나중에 보면, 지식으로 쓰임 받은 사람은 극소수이고, 

자기 생명을 내어 던지면서, 주님을 위해 살고, 복음전파에 투신한 사람들이었다.

그물을 다 버려두고.. 주를 따른 사람들이었다.

 

사도바울처럼, 지식적으로도.. 탁월하고,

믿음Action 면으로도..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른

둘 다 구비한 사람도 간혹 있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주님이 쓰시는 사람은

지식적으로 뭘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내어버리고 주님을 좇는 사람...

이런 헌신적인 믿음의 사람을.. 주님은 오늘도 찾고 계시고, 쓰시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자기 지식으로 많은 유익을 준 아볼로, 그러나... 

아볼로는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았는지,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다.

행18: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 이러라.

 

행18: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아볼로는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준 것은 사실이다.

기旣신자들에게 아볼로는 유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未신자들을 전도해서, 주께로 인도한 사람은 아니었다.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주께로 인도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어지는 행19:1절부터 보면,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은

에베소 신자들은, 아직 성령에 대해서 눈뜨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분, 오늘 같은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지식이 필요 이상으로 숭상될 수도 있다.

물론 성경 지식도 필요하지만

믿음’을 추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란다.

만약 그 지식이, 내게 믿음을 더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없다는 뜻이다.

 

행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그래서 거의 초신자와 다름없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에게 복음의 도를 개인적으로 가르쳐주었다.

대학자가 초신자에게 배워야 했었다.

 

▲사도바울에게는 지식+믿음이 있었다.

유라굴로 라는 광풍이 대작할 때, 열흘이 넘도록, 낮에도 해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14일 동안 태풍에 배가 낙엽처럼 쫓겨 다니는데, 행27:20

 

27: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러분, 사도바울은 성경지식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14일 동안 풍랑이 대작하는 위기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믿음에서 오는 능력이 있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정통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그대로 믿는다고 그러고,

무슨 신학과 지식을 엄청 습득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구해 낼 수 있는 답을 가진 사람은.. 찾기 어렵다.

 

지식은 많은지 모르나 (그것도 불확실하지만),

바울처럼 ‘믿음에서 나오는 능력’이 없다.

 

그럼 현대의 지식인들과, 사도바울의 차이가 과연 무엇인가?

지식은 별 차이가 없다고 치자. 그것은 고난의 차이다.

현대인들은, 사도바울이 당한 만큼의 고난은 1/100도 겪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깊이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절대 같을 수 없다.

 

그러나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많이 겪은

중국교회의 지도자, 북한교회의 지도자 중에는

‘굳센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복음을 전하지도 않으면서, 지식만 양산하고 있다.

지식의 다이어트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지식의 체지방을 좀 빼시기 바란다.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여러분, 또 다른 성경지식에 매료되지 마시기 바란다.

단순한 말씀 한 가지라도

깊이 묵상하고, 그대로 순종해서 살기로 결단해서

그것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키워지기 바란다.

 

▲성경에는/예수님 가르침에는, 예수를 믿으면, 핍박이 따른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놀랍게도, 서구권에서 핍박이 사라져 버렸다.

핍박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 2가지다.

-복음을 전하지 않거나

-예수를 제대로/정식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때에, 마귀들은 자기들 때가 다 된 줄 알고,

우글우글 거리고 있다.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 극렬하게 날뛰고 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에게.. 어떻게 아무 일(핍박)도 안 일어날 수 있는가?

제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 환란과 믿음

 

▲인생의 유라굴로 광풍

하나님이 하다 못 해,

핍박보다는 좀 덜 하지만,

삶의 문제를 허락하실 수도 있다.

문제를 통해서라도, 주께 부르짖어서, 마지막 때에 사명 감당 좀 하라고!

(바울이 당한 유라굴로 광풍도, 주님이 주신 ‘삶의 문제problem’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나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란다.

 

그 속에서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너는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 행27:24

이렇게 주님은, 풍랑 속에서 우리에게 ‘사명’을 말씀하기도 하신다.

 

▲현재 여러분에게 닥친 풍랑이 있다면, 감사하시고, 회개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란다.

평소에 잘 안 들리던 ‘사명의 부르심’도

풍랑 속에서는 확성기처럼 크게 잘 들려온다.

 

마8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처럼 마8:26

사도바울이 유라굴로 풍랑을 만난 것처럼

내 인생에 닥치는 풍랑도.. 내 믿음을 굳세게 단련시키는 절호의 기회이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이런 것을 도통 못하는 사람도

유라굴로와 같은 풍랑 속에서는

기도가 잘 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나중에 믿음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예수님처럼 풍랑 속에서도 주무신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음식을 만들어 먹이면서 사람들을 안심시켰고, 27:35

사도 베드로도 잡혀서 처형되기 직전 날도, 편안하게 잠을 잤다.) 행12:7

 

▲믿음의 사람은.. 풍랑 속에서도.. 주의 일을 계속 한다. 복음을 전한다.

절대로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다.

환란이 와도.. 절대로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유라굴로 광풍이 닥쳐도.. 절대로 복음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으니까!

 

▲풍랑과 어려움 속에서.. 인물이/믿음의 사람이 단련된다.

여러분, 삶의 문제는.. ‘내가 얼마나 믿음이 없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문제가 없었다면.. 나는 믿음이 없는 줄도 모르고.. 편안히 잘 지냈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제가 터지면.. 막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백방으로 뛰는 나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 .. 그 심각성을 비로소 깨닫는다. 

내 믿음이 살얼음이요,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 비로소 실상을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문제와 인생의 풍랑을 감사해야 한다.

 

문제와 풍랑은.. 믿음의 실전 테스트다.

우리는 그 동안 기도와 말씀으로, 믿음을 갈고 닦아 왔다.

그런데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듯이,

내 믿음이 진짜 역사하는 믿음인지는.. 삶의 문제와 풍랑 앞에 대봐야.. 드러난다.

 

그리고 풍랑을 겪으면 겪을수록.. 웬만한 풍랑은 두려워하지도 않게 된다.

마르틴 루터가 하루는 밤에 자다가, 시커먼 마귀가 환상 중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 때 루터는 한 번 쓱 마귀를 쳐다보고는, 다시 이불 덮고 자 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워낙 마귀와 많은 영적전쟁을 치르고, 승리를 경험하다보니까,

이제는 마귀의 환상을 봐도.. 루터에게는 별것 아닌 게 되어버렸다.

그만큼 ‘믿음의 단련’이 된 것이다. 환란과 풍랑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이런 예레미야와 같은 기도의 사람이 되는 길도... 문제와 환란 가운데 있다.

편안한 가운데서 그런 경지에 이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마치는 말

오늘도 잃어버려진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거늘

복음을 전할 열망도 없고, 사태의 심각성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 우리 믿음이, 자꾸 지식 쪽으로 치우쳐 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식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깨어나야 한다.

그 지식이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게 우리 힘으로 잘 안 되니까,

주님은 우리 삶에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을 일으키신다...

그래서 많은 풍랑과 역경을 겪으면서,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도바울 같은/람보 같은.. 백전노장을 만들어 가신다...

 

....................................... 더 읽으실 분 ....................................

 

 

◑주님은 믿음을 보신다            마8:5~13               09.06.25.설교녹취

 

예수님은 지나가시다가 믿음이 있는 사람을 볼 때에, 길을 멈추신다.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에게 반응해 주신다.

 

그래서 백부장, 열 두 해 혈루증 걸렸던 여인 등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반드시 주님은 길을 멈추시고, 그를 칭찬/인정해 주셨다.

주님은 자기를 믿는 자를 아신다.

 

오늘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기 원하는 것은

‘내 속에 과연 믿음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열심히 기도로 아뢰는데,

그것이 믿지 않기 때문에, 계속 반복적으로 아뢸 수도 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계속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하다가 믿음이 오면/생기면,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도를 중단한다.

 

머리에 성경구절을 많이 외울 수 있어도, 믿음이 안 생길 수 있다.

 

제가 이스라엘에 선교하러 갔을 때, 확실한 후원 약속을 받지 못하고 갔기 때문에

생계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 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을 외고, 과거에 이 말씀으로 설교한 적도 있었지만,

당장 현실적 어려움이 닥치자.. 제 마음에 염려가 생겼다.

 

그 때 제가 깨달았다.

‘내가 성경지식이 있지만, 성경구절을 암송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구나, 나는 여전히 믿음이 없구나!’

 

그런데 오늘 ‘백부장의 본문’이 주는 놀라운 교훈은

그가 비록 성경 지식이 많지 않았지만,

믿음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주님의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아이러니컬하게

복음서에서 ‘믿음이 있다고 칭찬 받은 사람’들은

그들 중에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요 문장만 따서 말하면.. 이단 되므로, 그러지 마시기 바란다.

‘저 교회 가니까 성경보지 말래!’ 이렇게 말하시면 안 된다.

얘기의 흐름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제 구미대로 말을 옮기면 안 된다.)

 

여러분, 제가 오랜 시간에 걸쳐, 체계적인 성경강해를 많이 준비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성경지식을 많이 가르치고도,

성경에 보니까,

성경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믿음이 있다고 칭찬 받은 것을 보고서,

‘체계적인 성경강해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체계적인 성경강해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설교를 듣는 청중들로 하여금, ‘믿음이 생기도록 하겠는가?’이다.

많은 지식을 가르치고도, 청중들에게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