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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죽임, 살림, 증인 2072

LNCK 2009. 9. 8. 20:19

◈1. 죽임, 살림, 증인                        행3:11-19               09.04.26.설교/ 어느 블로그에서 스크랩


훌륭한 신학적 설교라서 스크랩 했습니다. 성경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가 세 번 등장합니다.

2:1절 이하의 오순절 설교,

3:11절 이하의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

4:8절 이하의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의 설교가 그것입니다.


이 설교는 단순히 베드로의 설교라기보다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설교의 대상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입니다.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의 관계는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했습니다.

원래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이외의 모든 추종자들은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경험 이후에도, 여전히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유대교 안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있듯이

나사렛파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당시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유대-기독교인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들과 다른 기독교 공동체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중심이 되는 기독교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로부터 복음을 받았지만, 점점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이방인 기독교의 특징은 유대교의 율법과 할례를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를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대표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 지도자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 지역에서도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행16:6~7에, 성령이 허락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있습니다.)

결국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으로 밀려났습니다.

지금의 그리스 땅인데, 바울에 의해서 복음이 유럽으로 넘어간 셈입니다. 


▲이렇게 두 갈래로 갈라진 초기 기독교의 차이가, 세월이 흐르면서 더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동생이 주축이 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

기독교적 특징을 잃고 결국 역사에서 사라진 반면에,

바울이 중심이 된 이방인 기독교는 큰 세력으로 자랐습니다.


이 이방인/헬라 기독교 전통에 속한 누가라는 사람이

기원후 80년대에 기록한 문서가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그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방인 기독교가 유대교와 어떻게 다른지를,

기독교가 왜 유대교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설명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놓여있습니다.

 


◑죽임


▲누가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설교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했던 빌라도를 반대했다고 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유대인들의 잘못을 정확하게 짚습니다.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자를 놓아주었습니다.(행3:14)

결국 그들은 “생명의 주”를 죽인 것입니다.(15절)


유대인이 예수님의 죽음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역사는 죽임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는 마세요.

지금 유대인이라는 한 민족에게만 책임이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이런 죽임의 역사를 자행해온 인류를 대표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①하나는 신성 모독죄입니다.

이것은 유대교의 산헤드린 지도부가 내린 대답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가 신성 모독으로 비쳤다는 건 이해할만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율법과 성전을.. 절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 논쟁은 대표적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사람들의 죄도 용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헤드린 종교지도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예수님은 명시적으로 자신을 신이라거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거나

메시아라고 드러낸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가르치고 행동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참칭하는 죄로, 신성모독으로 비쳤습니다.


②다른 하나는 사회 소요죄입니다.

이것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내린 대답이었습니다.

 

복음서와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하고 싶었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민중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형 선고를 내린 것처럼 말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서 기자들은 종교적인 차원으로만 예수님의 사건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와 질서를 훼손할 가능성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의 판단은 물론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회 혁명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대를 갖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차원의 사회개혁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회가 민주화된다고 해서, 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만.. 영적인 만족이, 구원이 가능했습니다.


빌라도가 오해했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정치적 위협이 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사람이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인 생명과,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산헤드린과 유대 민중들의 압력에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분명한 정치적, 사법적 관점에서 예수님을 사형시켰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일을 반복했습니다.

때로는 진리 투쟁이라는 명분으로, 때로는 유치한 생각으로 상대방을 죽였습니다.

선악과를 취한 아담과 이브는 남에게 책임을 미루기에 바빴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이유는 시기심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도 그런 일들은 수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반복됩니다.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편이냐/아니냐 하는 차원으로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을 행할 때.. 자신들은 그게 무언지도 잘 모릅니다.

아니 자신들이 옳다고 (무조건) 합리화합니다.

 

마녀를 죽이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부류들이 비슷한 논리로, 김대중 선생을 사형언도 내렸습니다. 주)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에 회부해서 지동설을 주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 보편적인 인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개인들도 이런 죽임 역사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런 피해의식은 순식간에 공격심리로 나타납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우리는 죽임을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닐는지요.  

 


◑살림


▲베드로는,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선포합니다.

이 말을 처음 들은 유대인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은 예수 공동체의 주장을, 술에 취해서 외치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걸 잘 알고 있던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그 시간이 오전 9시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 요엘이 말한 것처럼, 성령이 임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부활 사실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전할 뿐이었습니다.


솔로몬 행각 앞에서 설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기회는 그 앞에서 일어난 어떤 특별한 사건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 기도하는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걷지 못하는 거지가 성전의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엇을 얻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는 그를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웁니다.

   그 사건을 본 예루살렘 주민들이 크게 놀라워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솔로몬 행각 앞에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게 아닌데

왜 자신들을 주목하느냐... 하고 말합니다.(3:12)


이를 걷게 한 것은 바로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이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라는 것입니다.


    거지 장애인의 치유 자체는 여기서 핵심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유대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표적에 불과합니다.

 

베드로는 그런 종교적 표적이라는 호기심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유대인들의 관심을 돌립니다.

그게 초기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장애와 병이 치유되기를 원합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도, 근본적으로 이런 치유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복지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성서에도 자주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 불치병이 치유되고

가난에서 벗어나서 부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편리하게 살아가는 도구입니다.

정치와 경제는 모두 그것을 목표로 합니다.


유대인들이 바라는 하나님의 '표적'도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기독교에도 그런 요소들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거의 미미할 정도의 의미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자녀들이 부모에게 용돈을 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용돈으로 부모의 사랑을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용돈을 한 푼도 주지 않는 부모가, 많은 용돈을 두는 부모보다

더 깊이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알리셨습니다.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 부활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달성할 수 없는 생명의 아르케, 생명의 알짬입니다.


이에 비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노력들은

헤어스타일을 꾸미거나 화장을 하는 정도입니다.

또는 성형수술을 통해서 외모를 가꾸거나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거나,

약을 먹는 정도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생명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그것은 단지 겉모양의 개량일 뿐입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살림은 사람이 손을 댈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만이 가능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력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을 죽지 않도록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민중을 동원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접수하고

로마를 몰아낸 뒤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새로운 세상을 펼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모두 무기력하게 손을 놓았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부활 생명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배타적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설명을 드려야 하겠군요.

 

저는 역사를 새롭게 개혁해야한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저희 교회도 역시 한국교회의 개혁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민주화되고 정의로워져도

인간의 삶은 질적인 차원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 집안에서 부모가 준 용돈을 공평하게 나눠 쓰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새로워져도

그것으로 우리가 참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살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집중할 일은, 부활의 복음 전파입니다. 그 일에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증인


▲기독교는 바로 이 사실을, 즉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허락하시는가를,

어떻게 죽임의 질서로부터 살림의 질서로 이끌어주시는가를

우리의 온 영혼을 기울여 대면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으키는 생명나라의 파수꾼입니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는 베드로의 말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3:15b)

증인을 가리키는 ‘마르투로스’라는 헬라어에는 순교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재판정에서 증인들은 자기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이라는 말은 부활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에 자기 목숨을 건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서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거기에 자신들의 모든 삶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만이 ‘퀴리오스’(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로마의 황제를 퀴리오스 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주가 부활의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의 증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거부될 경우에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서 오늘 우리도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베드로와 동일한 차원에서의 증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람도 아니고

그 사실을 사도들에게서 직접 말을 들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성서와 기독교의 전승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부활 경험자들이며, 동일한 증인들입니다.

이 사실을 동의하시나요? 이런 사실로 우리의 마음이 움직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사도들의 교회 전통을 잇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경험했고, 그것에 증인으로 나선 사도들의 공동체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 2천년동안 역사적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2천년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닙니다.

바로 어제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들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가 무엇을 말해 왔는지를 숙고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이어져온 예전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르게 수행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사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이런 영성이 깊어지는 사람은 죽임으로부터 살림의 세계로 나가기 마련입니다.

죽임의 문화에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오늘 한국의 청소년들이 죽임의 교육제도에 묶여 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살림의 교육으로 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물질 만능적 시대정신이 죽임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죽음의 자리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토대인 자연까지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돈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들이 평생 풀어야 할 신앙적인 숙제입니다. 완전히 풀지는 못할 겁니다.

부활이 현실이 되는 종말에나 완전히 해결되겠지요. 그때를 기다려야겠지요.    


▲오늘은 부활절 셋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그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증인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부활 생명의 증인으로 나설 자격이 있을까요?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끌어주십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 저희를 붙으시고, 부활의 빛을 비추소서. 아멘!                 ▣ 부활, 추수, 성탄, 성찬, 장애  



................................................. 관 련 글 .....................................................

 

아래 설교문은, 동일한 설교자에 의한 메시지인데,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전파한 주된 메시지가 <부활>이었으며,

오늘날 기독교의 본질적 메시지도 <부활>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2. 복된 믿음                             요 20:19-31              09.04.19. 어느 블로그에서 스크랩



▲기독교 신앙의 토대 - 역사적 예수 (예수가 역사에 실재 존재)

기독교 신앙이 일반 종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토대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한 인물에게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그에게 일어난 사건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와 좀 다릅니다. 부처님이 없어도 불교 신앙은 성립됩니다.

선승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오히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합니다.

각자가 자기 안에 있는 부처를 발견하고,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그런 깨달음의 길에서, 역사적 부처가 방해가 되면.. 그것을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님을 없애면 신앙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우리 내부에 있는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찾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의존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토대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가장 중요한 구원 사건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 증명이 가능한

역사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분명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완전히 끝났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십자가 처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와 그 측근들도 확인할 수 있고,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본 산헤드린 위원들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지만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은 누구나 똑같이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현현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추종하던 이들에게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활 경험자 리스트가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제일 처음 게바에게 나타나셨고, 다른 열두 제자,

그리고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마지막으로 바울에게 나타났습니다.(고전 15:4-8)


이런 질문이 생길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공개적으로 일어났던 것처럼

부활도 공개적으로 일어났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질문입니다.


만약 부활의 주님이 빌라도와 산헤드린 공회에 신문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뉴스를 쓸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났다면.. 어쩌면 복음 선포가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처한 영적인 딜레마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활의 주님에 대한 저들의 경험이 아주 명백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늘 위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부활이 부정되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될까요?

사이비 교주를 따르던 사람들이 교주의 실체가 드러날 때

모두 실망하고 흩어지는 것과 똑같은 일들이 벌어질 겁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에 서 있다는 사실은 백척간두와 같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을 느끼고 있을까요?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런 영적인 위기 상황을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부활했든지/ 않든지

내 삶이나 신앙생활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돈 버는 일 급한데.. 부활은 무슨 부활인가요?

부활은 죽어봐야 아니까 그때 부활하면 좋고/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신앙이

흔합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 문제는 적당하게 넘어가고

대신 교회 공동체의 확장을 최대 목표로 하거나,

또는 도덕주의적 변화를 그 목표로 삼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하나의 종교생활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없어도 교회 운영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그렇게 해도 쉽게 답을 얻기 힘든 부활 생명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기보다는 교회 성장을 내세우면

신자들의 더 뜨거운 반응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도덕성과 사회적인 역사개혁을 주장하는 것도

청중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겁니다. 그런 것들은 세상에서도 인정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차원에서 보면,

이런 일들(사회 개혁 등)은, 나이브한(유아적인) 차원인 겁니다. 

(‘예수 부활’을 전면에 내세우고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주일 사도신경으로 부활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가

왜 다른 일에만 관심이 많을까요?

믿음이 없거나 지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과, 부활에 놓인 경계선을 뚫고 나가지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마치 죽음이 명백한 현실인데도

우리가 평소에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결국 여기에는 무엇이 ‘생명의 현실’(reality of life)이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가 씨름했던 문제도 이런 것과 연결됩니다.



◑도마의 의심


요한복음 20:19절 이하에 따르면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일요일 저녁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제자들이 한 방에 모여 있을 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마침 그곳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도마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


도마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죽었던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을 직접 확인해보지 않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여드레 후에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는 도마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도마는 초기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형식을 통해서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

예수님은 다시 도마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셨습니다.

한번은 도마가 없을 때, 다른 한 번은 있을 때입니다.

공통되는 사실은 문이 닫혀 있었다는 것과

예수님의 몸에 십자가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실은 상충되는 것입니다.


문이 닫혀 있는데 거기를 출입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우리와 똑같은 존재라 할 수는 없습니다.

몸에 십자가 상처를 그대로 갖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인간과 똑같이 이 세상의 생명 형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쉽게 말해서 혼령이면서 사람일 수 있을까요?

기체이면서 동시에 고체인 물질이 가능할까요?

기온에 따라서 기체가 액체로 변하기도 하고, 액체가 고체가 될 수는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그것이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전하는 보도에 따르면 부활의

주님은 이 두 가지 속성을 그대로 지닌 분이십니다.

밀폐된 공간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동시에 인간과 똑같이 시공간 안에 존재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현현에 대한 성서의 보도를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며, 더구나 인정하기도 힘들 겁니다.


부활 경험은 제자들의 착각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사무쳐서

생전의 주님이 그들에게 환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서나 서신이나 막론하고 기독교 전통은 예수님의 부활 현현을

제자들의 심리적 현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경험된 명백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어느 한 순간에도 소홀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의 부활 경험이 명백하지 않았다면

부활 사건을 굳이 신앙의 중심으로 삼지 않았을 겁니다.


부활보다는 일반적인 사랑과 평화와 정의를, 내면의 자유를 전하는 게

교회를 확장하는데 더 유리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 주장은 아무에게도 부담 없이 받아들여졌을 테니까요.

(오늘날 일부에서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평화와 정의를 내세웁니다.)


부활 주장은 기독교 공동체를 오히려 위태롭게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부활을 초지일관 하게 전했습니다.

바울 같은 이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것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고전 15:14)이라는 그의 진술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생명 현실과 믿음


▲요한복음은 대략 기원후 90-100년 사이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그 시기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과 초기 공동체의 교우들이

모두 죽었을 때입니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요한공동체 안에 도마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확인하지 않으면 그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요한복음 기자가 주는 대답은 이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보지 못하고 믿는다는 게 무슨 뜻이며, 그것이 가능할까요?


▲본다는 것은 실증적으로 확인한다는 뜻입니다.

보는 것이야말로 무엇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우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물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 킬로미터라는 사실을 보고서가 아니라 들어서 믿을 뿐입니다.

모든 물질이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는 없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또는 부모나 자식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대충만 알뿐이지 완벽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예로 든 것과, 예수님의 부활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물리적 사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일부의 사람들만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전자는 실험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후자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게 아닙니다.

물리적 사실도 그것이 확실한 것으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가설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더구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에 의해서 주장된 지동설이

처음부터 진리로 받아들여진 게 아닙니다. 그들은 종교재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같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설왕설래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은 기독교인만 그것을 진리로 믿고 있을 뿐이지, 다른 이들은 거부합니다.

이는 마치 지동설이 처음 제시되었을 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부활의 실체가 완전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와야만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전까지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사람들의 선입관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불가능하다는 선입견 말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그런 생명 현상에만 묶여 있어서

사로잡히게 된 선입견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남녀가 만나서 자손을 번식하고,

자신이 욕망을 성취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명 현상 안에만 머물러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예수부활과 거기에 의존해서

우리가 미래에 참여하게 될 부활 생명을 인식할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큰 형이 한 여자와 결혼해서 살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은 뒤에 율법에 따라서 동생이 형수와 결혼했지만

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칠 형제가 모두 죽었을 때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부활의 세상에서는 장가와 시집가는 방식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게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처럼 하나님의 존재 안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부활 생명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막12:18-27)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부활 생명의 현실을 오해하지 않고

바르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아마 이 설교문의 결론)

어떻게 우리의 영성이 하나님의 통치에 가 닿을 수 있을까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점입니다.


①소극적인 점은 우리의 선입견을 허무는 일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그 사람은 풍년이 들은 뒤 창고를 넓히고

먹고 그곳에 곡식과 재산을 보관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거둬 가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렇게 ‘소유가 생명을 확보하는 길’이라는 선입견을 허무는 작업이

쉽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런 작업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②더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부분인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그의 통치, 그의 약속을 더 깊이 학습하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이고 성서읽기이고 공동체 활동입니다.


이는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물리학과나

유수한 연구소에 들어가 공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 부활에 근거한 공동체가 지난 2천년 동안 지속되어 왔습니다.

중간에 변질되기도 했지만 세례와 성만찬과 설교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가

살아 있는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몰두하는 이들의 모임으로

독보적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런 전통에 서 있습니다.

이런 전통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라면 자기가 직접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했어도

그분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걸 믿는 사람은 그 이름에 힘입어 생명을 얻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결론이기도 합니다.(요 20:31)


▲여러분, 우리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고도 믿을 수 있으니, 이에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혹시 이 사실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오지 않고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중입니다.


믿어지지도 않은 것을 억지도 믿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건 광신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진실하게 한 평생을 살았다면

보지 않아도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그동안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서 있었다면

부활의 주님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생명의 신비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샘터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도한 제자들이 아니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복된 믿음’인가요? 주님을 찬양합시다.        

                                                                                                          ▣ 부활, 추수, 성탄, 성찬, 장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