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설교 (3편) 모음
몇 편의 설교문 가운데서, 메모해서 기억해야할 내용들만 골라 보았습니다.
◑1.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 -출처-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특별한 달란트와 재능에 대해서
감동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은 자랑에 현혹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자기를 부인하고)
그런 겸손히 낮아진 상태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열망할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사용하고 싶어 하십니다.
▲출3:5,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려고 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은 그것을 거절하십니다.
거절하신 이유는, 모세가 굳이 가까이 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있는 여기도 거룩한 땅이지만, 지금 네가 선 곳, 거기도 거룩한 땅이다.
그러므로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마라’ ... 이렇게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Do not come any closer,” God said.
“Take off your sandals, for the place where you are standing is holy ground.”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내가 서 있는 자리를.. 거룩한 곳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고 다른 곳으로 찾아갈 필요 없습니다.
‘가까이 오려고 하지 말라, 지금 네가 선 곳이 거룩한 곳이다!’
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거룩’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도덕적 완전주의 perfectionism’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룩’이란 무엇입니까? 구별(분리, 성별)되었다는 것인데,
좀 더 나아가면,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거룩한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그 자리가 ‘거룩한 자리’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사람이 바로 ‘거룩한 사람’이 된다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불붙는 가시나무 쪽으로 더 나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모세가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셨고,
‘지금 네가 서 있는 그 자리가 거룩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the place where you are standing is holy ground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거룩한 곳으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자리에 오시도록 내가 간절한 마음으로 모실 때.. 가능합니다.
▲불
그런데 하나님이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임하셨다는 것을, 내가 거룩한 곳에 서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 한 가지 증거는 ‘불’입니다.
가시나무에 불이 임한 것처럼, 하나님은 종종 뜨거운 불로.. 임재하십니다.
오늘 내 가슴에 '불'이 있습니까?
맥스 루카도가 감히 하나님께 말싸움을 건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 모세한테 했던 것처럼 떨기나무에 불을 붙여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여호수아에게 했던 것처럼 성벽을 무너뜨려 주십시오,
하나님 그러면 제가 싸움하겠습니다.
갈릴리에게 하신 것처럼 풍랑을 잔잔케 하십시오, 하나님 그러면 제가 듣겠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떨기나무 옆에, 성벽 근처에, 바닷가에 앉아
하나님이 입을 열고 말씀하시거나, 몸소 행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떨기나무에 붙일 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붙일 불이었습니다.
그는 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돌로 만든 성벽이 아니라, 인간의 죄의 벽을 깨뜨리셨습니다.
그 분은 폭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바다에 폭풍이 아니라,
영혼의 이는 폭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의 반응을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리시고...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떨기나무만, 성벽만, 바다만을 바라보고서
‘하나님은 아무 일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고 단정지어버렸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보며 물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능력을 잃어 버렸나요?”
그때에 하나님은 그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내가 말했는데, 내가 일을 했는데,
넌 아직 듣지 못했느냐? 아직도 보지 못했느냐?”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장소가.. 바로 거룩한 자리입니다.
그 어느 곳에 거룩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에 지정된 거룩한 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
“예, 제가 여기에 있나이다.” 응답하는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자리이고
응답하는 그 사람이 바로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이야기하는 말이.. 거룩한 말이고
하나님 앞에 응답하는 내 손이 만지는 그 자리가.. 거룩하게 되는 곳이고
응답한 내가 일하는 그 장소가.. 거룩한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전공이 무엇이든,
여러분이 가정이 있든, 직장이 있든,
여러분이 이 사회 속에 어떤 일을 담당하든.. 우리들을 부르실 때,
“예, 제가 여기 있나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그 자리가.. 거룩한 땅으로 변화되고
그렇게 고백한 우리의 언어대로, 그 행동이 나타나는 바로 그 사건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 성결
◑2.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도 같다 잠언12:18
앤드류 로버츠는 <CEO 히틀러와 처칠, 리더십의 비밀> 이라는 책에서
히틀러와 처칠의 웅변술을 이렇게 비교합니다.
▲히틀러는 연설을 통해서 독일 국민의 마음을 휘어잡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연설은 늘 이기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기적인 연설을 성취하기 위해서
반드시 때려 부셔야 할 적대자들을 설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유대인이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만일 유태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말은 이렇게 표현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적을 만들어 내야 한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적을 가져야 한다.’
(오늘도 이런 식으로 대중을 규합하는, 잘못된 지도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지도자의 혀, 한 독재자의 혀에.. 모든 국민의 마음이 현혹되고 마비되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동원된 나치에 의해서, 유태인 6백만 명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민족적 증오심을 불러 일으키는 한 독재자의 언어,
한 독재자의 혀가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반면에 처칠, 그는 탁월한 웅변가는 아니었으나
피나는 연습과 노력으로 연설을 해나갑니다.
그가 정치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총리가 되고 나서 3일 후에 하원연설에서
그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그때 그는 말합니다.
“내가 드릴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패배주의에 놓여져 있었던 영국인들에게, 다시금 소망을 심어 줍니다.
그래서 또 다른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불굴의 용기만이 우리의 유일한 방패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처칠 수상의 연설은
영국 국민에게 다시 희망을 불러일으키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한 지도자의 말을 통해서 한민족이 파멸에 이르고, (독일)
한 민족이 다시금 소생하게 되는 역사의 현장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영국)
그런 점에서 우리는, 혀를 잘 사용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요사이 기업마다 그래서 특별히 친절 교육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구둣방 주인이, 종업원에게 이런 말은 쓰면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가씨, 당신의 발이 너무 커서 이 구두가 맞지 않는데요?”
이것은 무례한 언어라고 합니다.
이것을 이렇게 바꿔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이 신발이 아가씨의 발에는 너무 적군요.”
▲맥스 루카도의 동화 <너는 특별하단다. You are special> 을 소개해 드립니다.
목수 아저씨 앨리(하나님)가, 나무인형들(사람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특별한 사랑을 갖고 만들었는데
이 나무인형들이 한 마을 속에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인형들이 하는 일은
서로 만날 때마다 자기가 지닌 상자속에 있는 두 가지,
하나는 빛난 별표, 하나는 회색빛 동그란 점표를 갖고 있다가
만나는 인형한테 ‘아~ 그가 잘생겼군.’ 하는 생각이 들면, 그에게 별표를 붙여주고
‘난 네가 마음에 안 들어’하는 생각이 들면, 그에게 회색 점표를 붙여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인형마을에 ‘펀치넬로’가 살고 있었는데
자기는 지나가다가 친구 나무인형을 만나면
친구들이 자기에게 ‘별표’를 붙여 줬으면 좋겠는데
‘회색빛 점표’를 자꾸 자기 몸에 붙여줍니다.
얼굴에도 붙여주고, 가슴에도 붙여주고,
등 뒤에도 붙여주고, 자꾸만 붙여주니까
‘아, 나는 왜 이렇게 못 생겼는가? 나는 다른 인형들의 마음에 안 드는가?’
그러면서.. 자기 자신도 자기가 싫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인형)들을 만나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혼자 방구석에 박혀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을 나갔는데 루시아라고 하는 예쁜 소녀인형을 만납니다.
그런데 보니까 옷에 아무 것도 붙이지 않고 아주 깨끗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너는 어찌해서 별표도 없고, 점표도 없느냐?”
그랬더니 그 소녀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를 만들어 주신 앨리 아저씨를, 저는 매일 매일 찾아가거든요,
그 분을 찾아만 가면, 제게 붙어 있었던 별표와 점표가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간답니다.”
그 말을 듣고 이 펀치넬로는
자기도 앨리 아저씨를 찾아야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을 받아줄 수 있을까? 그는 염려하면서 언덕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펀치넬로를 본 앨리 아저씨가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의 이름을 불러 줬습니다.
“펀치넬로야! 나는 날마다 너를 기다렸단다.
남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너를 만든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주 중요하단다.
너는 내게 아주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란다. You are so special for me. 내가 만들었기 때문이지!”
‘너는 내게 아주 특별한 존재란다.’ 그 말을 듣고
‘정말 저 말이 사실일까? 혹시 사실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자기의 몸에 붙었던, 그렇게 떼어내려 해도 떼어지니 않던 그 점표가
하나 툭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펀치넬로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면 조금 우쭐해지고,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면 우리 마음이 오그라듭니다.
이것이 쌓이면 교만해 지고
아니면 그 반대로 아주 위축이 되어 사람들 앞에 서기도 싫고
“스스로 나는 못생긴 사람이야” 탄식하는 경우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 나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얘야! 너는 내게 아주 특별한 존재란다.
내가 너를 위하여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너를 사랑하는 존재란다.
(내 이름을 부르시면서) 너는 나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란다.” 라는
그 분이 네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에, 내가 나를 용납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나의 귀한 점을 다시금 발견하게 됩니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언어를 그때부터 배워 나갈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언어,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하는 언어,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언어를 갖게 되는데,
나를 사랑하고, 나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이 “너는 특별한 존재야!” 라고 네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이것이 가능해 진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말씀으로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언어가 사람을 살리는 언어로 바뀌려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너는 특별한 존재였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것을 마음속에 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를 우리 주위에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고
그것을 함께 나눌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언어의 중요성
◑3. 홀로 있기를 배우시라 눅5:15~16 -출처-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5:15~16
우리 주님은 인생을 어떤 모습으로 사셨을까요?
예수님이 사신 공생의 3년 동안은 아주 짧은 기간입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만난 사람 중에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고달프고, 인생을 탄식하는 사람들,
자기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깊이 빠진 바리새인들까지 만났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 삶 속에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예수님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쉴 틈 없이, 때로는 식사할 시간도 없이 바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바쁜 와중에서도 예수님이 끊임없이 지속하신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바로 바쁜 와중에서 그 일을 딱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던 사건은
예수님의 그 바쁜 와중 속에서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는,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병 환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아마 예수님이 고쳐 주셔야 할 사람이 매우 많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 더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실 필요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십니다. 그리고 뒤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표현된 2가지 동사가 나타납니다.
①첫째로, ‘물러갔다’입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물러가셨습니까?
한적한 곳, 광야,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의 모든 자리를 차단시키고, 단절시키는 곳입니다.
그분을 향한 그 기대, 그분을 향한 기다림, 그분을 향한 많은 사람들의 호소마저도
예수님이 더 이상 듣지 않으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물러서다’라는 단어는
예수님 자신도 홀로 있기를 원하셨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더 이상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그분조차도, 물러가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의 참 자아를 다시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다시금 확인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시간을.. 우리 주님은 가지셨습니다.
②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표현한 또 하나의 동사가 바로 ‘기도했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에 다시금 확인하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사람들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그분과 동행하시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실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에 함께 계시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동행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바로 외딴 곳, 한적한 곳을 찾아서
이 시끌벅적한 삶의 현장을 탈출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정말 조용히 홀로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홀로 있는 것 자체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줍니다.
혼자 조용히 있다 보면 ‘아, 내가 혹시 왕따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사회에서 친구를 사귀는 존재가 되지 못해서, 이렇게 혼자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별난 존재가 아닐까? 나와 함께 어울리는 친구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이런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혼자 있기를 무서워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누구에겐가 귀속해 보고 싶고,
많은 사람이 있는 그곳에, 내 자신을 집어넣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군중 속으로 자신을 파묻는 경우가 우리들의 삶에서 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군중’은 하나의 집단입니다. 이 집단이 형성되면 마비 현상이 나타납니다.
양심과 도덕이 '집단' 속에 들어가면.. 다 마비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나를 숨길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내가 했어도 그것은 내 일이 아니라, 그 집단이 행한 것이기 때문에
양심도 사라지고, 도덕도 사라지는.. 그런 마비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단독자로 사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단독자로 서는 순간,
갑자기 나의 실패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한 모습 때문에, 내가 나를 거부하면 어떻게 할까,
이 실패한 모습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나를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에
우리가 홀로 있는 그 자체를 무서워하고 도망가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거부당할까 하는 두려움, 실패가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이
홀로 있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집단이나 군중속에서, 자기를 보호받고자 하는 심리는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끼리끼리 무리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는 홀로 있는 것을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홀로 있을 때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있는 것도 배울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켄트 너번은『세상에 홀로 서는 너를 위하여』라는 책에서
‘외로움’과 ‘홀로 있는다’는 두 말을 비교합니다.
‘홀로 있는다’는 것은 내 주위에 혼자만의 사색 공간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외로움’이란 그 반면에 분리, 분리하는 조건이다.
그러나 홀로 있는 것은 화합하는 조건이다.
외로움은 편협하다.
그러나 홀로 있기는 관대하다.
외로움은 내 주위를 차단하지만, 홀로 있기는 무한을 향해서 내 주위를 확장한다.
외로움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내적 대화에 뿌리를 두지만
홀로 있기는 끝없는 영혼에 침묵에 뿌리를 둔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외로움을 경험할 뿐이기에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고 있다.’
여러분, 혼자 있으면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납니다.
외로움을 느끼든지, 아니면 외로움을 넘어서
혼자 있을 때의 당당함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홀로 있는 것은 강인한 삶의 태도를 나타냅니다.
삶을 활력 있게 만드는 내적인 충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진정 홀로 있을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 속에 들어갈 때도
편안하게 그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홀로 있을 줄 아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겁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지배당하지도 않기 때문에
자기의 고유함, 자기의 독특함, 자기의 개성을 가지고 홀로 있을 수도 있고
남들과 더불어 삶을 함께 누릴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홀로 있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 속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으로써
자신이 얼마만큼 귀한 존재, 독립적인 존재,
이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인지 알게 됩니다.
▲특별히 이 홀로 있는 것은..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필요한 삶의 태도입니다.
어느 사회의 지도자가 목사님과 상담 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바쁩니다. 사람 만나는 일도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도 일이 잘 진전되지 않습니다.
제가 맡은 역할을 계속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러면 며칠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지도자가 며칠 후에 다시 와서 탄식합니다.
“그렇게 해 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목사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셨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남으면 클래식 음악을 들었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소설책을 봤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다시 충고했습니다.
“그런 것 좇아 하지 말고, 조용하게 홀로 있으면서
자기 자신과 내면의 대화를 좀 해 보십시오.”
그랬더니 그가 되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까?
내가 나 자신과 조용히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십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끔찍한 당신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만나면서 괴로워했겠습니까?
당신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정면으로 대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과 스스로 만나는 것을 기피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속입니다.
자기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곧 그것에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그의 공생애를 시작할 때
40일 동안 조용히 자기 자신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삶을 다 드려야 할 것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도 이러한 시간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열두 제자를 택하실 때도 홀로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예수님의 인기가 막 올라갈 때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딱 그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다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마지막으로 수행하실 그 때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하나님만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마음속에 깨닫기까지.. 홀로 무릎을 꿇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의 언어로 다시금 표현해 봅시다.
홀로 있다고 하는 것은.. 세상 이데올로기에 내가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는 용기입니다.
홀로 있다고 하는 것은.. 내 자신의 고유함과 내 자신의 독자성에 대해
스스로 존중해 준다는 말입니다.
홀로 있다고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종속되고
세상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은 홀로 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본회퍼가 홀로 있는 것과, 함께 있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홀로 있지 못하는 사람은, 함께 있는 삶을 조심하도록 하라.
함께 있지 않은 사람은, 홀로 있는 것을 조심하도록 하라.
함께하는 것과 홀로 있는 것은, 각각 다 깊은 함정과 위험을 가지고 있다.
홀로 있기 없이 함께 있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공허한 말과 가정에 빠지고 만다.
또한 함께 있는 것 없이 홀로 있기를 추구하는 사람도..
공허한 깊은 수렁과 자기 도취와 절망에 빠지게 된다.”
홀로 있을 줄 알아야, 함께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함께 있는다는 것을 알아야, 홀로 있는 것을 경험 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지도자에게 있어서.. 이 외로움과 고독은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외로움을 홀로 있기로 승화해야 진정한 지도자가 됩니다.
그때 자기 열등감으로부터 넘어설 수 있습니다. 자기 비하로부터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나의 고유한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 속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당한 후 사람들이
그의 옷 주머니에 있는 것을 꺼내 보게 되었습니다. 들어 있는 것은 별것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링컨 대통령이 즐기고 있었던 그 고독,
그 외로움이 깊이 배어 있었습니다.
1865년 4월 14일 밤, 암살당한 대통령의 주머니에 있었던 물건들은
에이브러햄 링컨이라고 수놓아진 손수건,
시골 청년들이 쓰는 주머니 칼,
실로 수선한 안경 케이스,
5달러짜리 어음이 든 지갑,
그리고 가위로 오려 낸 낡고 오래된 신문 기사 몇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려 낸 신문 기사에는 존 브라이트라는 사람이 연설한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거기에는 에이브러햄 링컨은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고
극찬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링컨은 남북전쟁의 고통과 정적들의 비난 속에서
이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위로를 얻고 자신감을 얻던 지도자였습니다.
외로운 지도자, 연약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링컨은 기도하는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께 확인되면 그의 길을 갔던 지도자였습니다.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지도자는 외롭습니다.
우리도 링컨처럼,
우리 크리스천들을 이 한국 땅의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 앞에 부복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나 자신의 내면을 강하게 다듬은 후에
모든 백성들을 함께 아우르고 일어서도록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스윈돌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영감의 사색』이라는 책 중
“고독한 지도자” 편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의 자리에 임명하시는 사람은 히말라야 정상에 선 사람처럼
희박한 공기 속에서도 (히말라야 정상에는 얼마나 공기가 희박하겠습니까?),
거기에서도 편안히 숨쉬는 법을 필수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래야 모든 일들을 처리할 수가 있다.”
이 말은 지도자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지도자들입니다. 가정에서 지도자입니다. 우리 직장에서 지도자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공동체에서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함께 지도자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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